제 816화
204화. 전쟁 선포(3)
* * *
1805년 10월 25일.
지플이 적명족의 선전포고를 받고 닷새가 흘렀다. 바멀 연합의 입장은 전 세계에 모두 전달이 되었고, 남은 건 적명족이 약속을 지키는가 확인하는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적명족의 침공 대상인 지플뿐만이 아니라 모든 거대 세력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바멀 연합은 지플의 1급 마탑 수에 맞춰 침투조를 다섯으로 나눠 연방에 잠입을 끝낸 상태였다.
“엄청나긴 하군.”
메리가 말했다. 그녀는 요나, 토나 형제들과 함께 리스릿 자치구의 1급 마탑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게요, 누님. 마탑 하나에 함선이 대체 몇 대인지. 모든 1급 마탑에 이 정도 함선이 배치되어 있다면, 흉신전 때보다도 몇 배는 많아진 셈입니다.”
“적게 잡아도 백 척은 되겠어. 2급 마탑들에도 대략 오십 척씩은 배치되어 있으니, 지플 놈들 생산력은 상식을 한참 벗어나 있다고.”
“아마 막내가 말한 성지라는 공간 때문일 거다. 그 공간이 가진 특수성은 밝혀진 바가 많지 않으니까, 함대 생산에도 관여할 가능성이 높아.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설명할 수가 없어, 이런 생산력은. 소타 사막 지하 건조장 같은 곳이 스물은 있어야 하니까.”
“히, 함대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예쁘긴 해, 메리 언니. 별 가득 뜬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걸.”
“그, 요나 누님. 저건 우리 적들입니다. 그렇게 예쁘게 보시는 건 좀.”
“좀 뭐? 다시 말해봐, 히.”
“하하, 아닙니다.”
“요나야, 헤이토나 말이 맞아.”
“메리 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히히. 알았어, 나쁘게 보도록 할게. 다시 보니 쓸데없이 휘황찬란해서 짜증이 나네.”
“그래, 그래. 착하다 우리 요나. 그리고 토나 녀석들도 기수니까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는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된다?”
“응, 기 잘 세워줄게!”
토나 형제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흉신전 이후 가문의, 세상의 영웅이 되었음에도 형제들에게 받는 대우는 별반 달라진 바가 없었다.
사실 요나는 그런 토나 형제들이 귀여워서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일 뿐이고, 메리도 토나 형제가 거만해지지 않는 모습에 대견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누님들, 그런데 진짜로 적명족이 저런 마탑을 손쉽게 끝장낼 수 있을까요? 마탑 내에 초인에 준하는 망령대나 유령단도 셋 이상은 대기 중인 것 같은데.”
“그걸 확인하려고 온 거니까 잘 살펴봐야겠지. 특히 여긴 일반인 거주 지역과 가장 멀리 떨어진 1급 마탑이니, 놈들의 우선 목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공격하기에 아무런 제약도 없을 거고.”
바멀 연합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물론 적명족의 침공에 지플이 대등한 수준으로 반격을 하는 것이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받을수록 바멀 연합이 얻는 이득은 그만큼 더 커진다.
“지플이 맥없이 당하기만 한다면 가문의 주적이 바뀔 수도 있겠군요. 지플에서 적명족으로.”
“그럴 수도 있지만, 차라리 놈들이 어느 시점에 갑자기 동맹을 맺는 게 더 가능성이 높지. 놈들은 이미 황족 잔당과도 동맹을 맺은 정황이 있으니, 수세에 몰리면 또 동맹을 늘리지 말라는 법은 없어.”
“막내의 형제들이 라프라로사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그 경우는 진짜 버거울 것 같네요. 흠, 일단 식사 준비 하겠습니다.”
토나 형제가 미리 파둔 구덩이로 들어가려는 찰나, 메리가 흠칫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동작 그만, 밥은 나중에! 시작된 모양이다. 상공에 차원문이 열렸어.”
“이런 미친, 뭐가 저렇게 크답니까?”
“히? 저것도 예쁘다, 은하수가 통째로 내려앉은 걸 보는 기분!”
“저놈들도 적이라니까요, 요나 누님.”
지금 형제들의 시야에 나타난 차원문은, 지금껏 진을 비롯해 적명족 차원문을 직접 겪은 이들이 본 것보다 더 거대한 크기로 형성되어 있었다.
얼핏 측정해도 함선 오백 척 정도는 우습게 빠져나올 수 있을 공간이 하늘에 열리고 있는 것이다.
위치는 정확히 리스릿 1급 마탑의 바로 위.
메리 일행은, 당연히 그 차원문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대량의 함대이리라 생각했다. 마탑도 만전을 기한 채 대기하고 있었으니 즉시 함대 간 포격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이다.
“저게 뭐야?”
그러나 차원문을 빠져나온 건, 도저히 일개 함선이라고 칭할 수 없이 거대한 무언가였다.
“아메리스 님이 말했던, 공중요새인가……!”
아메리스가 활동하던 고대에, 각 세력의 힘은 함대가 아니라 공중요새의 숫자로 평가가 되었었다.
적명족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중요새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투왕들이 다스리는 각 성채 다섯과 투신의 전용 공중요새로 총 여섯이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 리스릿 마탑을 짓누르듯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스록 성채의 우스, 대투왕 가일라가 운용하는 공중요새의 이름이었다.
“흉신전의 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끔찍하군……. 호위함도 없이 저것 한 기면 1급 마탑쯤은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다는 건가?”
퍼엉, 콰아아아……!
공중요새 우스가 나타나자마자 지플 함대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마탑 전체에 보호막이 형성되었고, 대기하던 마법사들은 마력을 해방하며 연환 마법을 펼쳤다.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조차 단신으로 돌파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할 수준의 화력이 단숨에 폭발한 것이다.
메리 일행은 납작 엎드린 채 지플의 대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5리나 떨어져 있건만 마탑 측에서 번진 열기 때문에 바람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1급 마탑 화력도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뛰어난데요, 누님.”
“문제는 그래 봐야 저 공중요새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 보인다는 거지, 벌써부터.”
토나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말처럼, 리스릿 마탑에서 쏟아지는 포격과 마법은 우스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전 함대! 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라. 망령대와 유령단은 연환 마법조에서 빠지고, 적의 함내로 침투할 준비를 하도록!”
탑주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망령대와 유령단은 그의 명령을 따라 용들의 등으로 올라탔으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호막이 건재한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이를테면.
리스릿 마탑은 공중요새가 나타남과 동시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으나, 적명족에게 전혀 위협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스는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격차를 과시하려는 듯 가만히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항복할 기회를 주겠다. 싸움을 원치 않는 이들은 손을 들고 마탑 바깥으로 나와라. 하얀 신호탄은 투항의 의미로 간주할 테니, 각 함선의 지휘관들은 1분 내로 투항을 결정하도록.}
마탑 일대에 대투왕 가일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적명족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투항한 자는 즉시 일반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망령대와 유령단을 태운 용들은 우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 한 번, 가까스로 보호막 하부에 닿기는 했으나 송곳처럼 튀어나온 적뇌가 용의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용과 함선을 이용해 우스의 내부로 침투하는 건 명백히 불가능했다.
오로지 보호막을 홀로 찢을 수 있는 능력자만이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탑주, 도망쳐야 합니다.”
결국 마탑으로 돌아온 망령대와 유령단은 탑주에게 도주를 제의했다. 1급 마탑의 전력만으론, 공중요새와 ‘전투’가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아이와 무장한 기사.
1급 마탑과 공중요새를 가르는 격차는 그렇게 표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얼마 전 2급 마탑을 습격한 붉은 함대라면 이 정도로 대응이 불가하지 않았을 테지만, 공중요새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탑주는 즉시 유령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물러나자고 말한 유령단은 2급 마탑 습격의 생존자였다.
“빌어먹을……!”
탑주가 욕지거릴 내뱉으며 퇴각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았다. 함대 곳곳에서도 같은 신호탄이 쏘아졌다.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하얀 신호탄을 쏘았어야지, 어리석구나.}
가일라의 말이 끝난 직후 우스의 하부가 개방되는 모습이 이어졌다. 지플의 함대는 머리를 돌렸고 탑주와 망령대, 유령단은 이미 소형함에 탑승해서 비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리스릿 마탑에게 남은 목표는 오로지 살아남아 공중요새의 위력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가일라는 그조차 허락할 생각이 없을 뿐.
“시마트 동포, 발포해.”
가일라가 유리잔에 피를 따르며 말했다. 함교 너머로 의미 없이 도망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일라 동포, 마탑을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는 일부 획득해서 분석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척 보기에도 하등한 기술로 지은 건축물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해야 합니다. 하급 기술이라 할지라도 우릴 위협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간 우리가 진 룬칸델과 바멀 연합을 우습게 여긴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흠…… 그래, 시마트 동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마탑은 적당히 부숴서 회수하고, 나머진 모조리 없애. 이번에도 피는 포격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놈들 것만 취한다.”
“적명!”
우스의 하부에 거대한 붉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마탑 일대의 공간이 일그러졌고, 일부 마법사와 용들이 구체로 당겨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수깡처럼, 마탑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진 파편들은 우스의 상부로 흡수되는 모습.
이내 마탑이 회수된 후 쏘아진 우스의 주포는 단순한 직선 형태가 아니었다. 일대를 초토화하는 기둥 형태의 적뇌를 중심으로, 촉수 같은 뇌전이 빠져나와 도주하는 지플을 덮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마탑의 인원들은 그 포격에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채 그저 학살당할 뿐이었으며.
메리 일행은 그 모습을 확인하며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적명족 놈들이 오늘 여기만 치지는 않았을 텐데, 다른 쪽은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군. 하지만 매번 전투가 이런 식이라면, 지플엔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