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막내아들-880화 (880/1,001)

제 880화

220화. 지치지 않는(2)

“무슨 일이냐!”

루나가 쇄천을 펼친 순간, 소환된 진마계의 성내에 있던 마왕 지칼로 라미에르는 충격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기습입니다, 지칼로 님! 경계병들이 눈두꺼비와 기사 두 명의 모습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비궁의 소궁주와…… 백경인 것 같습니다!”

백경.

얼마 전 대장군 플렉 칼루가를 죽인 룬칸델의 1기수, 이제 진마계에도 그녀의 이름과 이명을 모르는 마족은 아무도 없었다.

지칼로는 잠시 루나가 퍼뜨리고 있는 기운의 크기를 가늠했다. 그 힘을 엿본 것만으로도 일순 목덜미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쩌엉…… 쿠쾅-!

해일처럼 성벽을 두들겨대고 있는 루나의 기운은 곧 내성까지 침투할 것이다.

지칼로는 허투루 마왕이 된 자가 아닌 만큼, 즉시 판단을 내렸다.

“대장군 빌라굴 라미에르와 시칸 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 대피하라. 사키엘이 있는 칼림 주둔지로.”

“예? 지칼로 님, 그게 무슨.”

“대피하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크저적, 쾅!

지칼로가 다시 한 번 소리치자마자 별안간 내성 전면부가 통째로 파괴되며 수백 줄기의 서슬 퍼런 검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칼로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왕좌 옆에 놓인 대검을 들어 검기를 받아쳤다. 그 충격파에 곁에 있던 보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억!”

“지, 지칼로 님……!”

“이미 아랫것들이 3할은 죽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 병력으론, 대장군 미만 전투원은 놈을 상대할 때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 말대로였다. 루나가 펼친 그녀 자신만의 쇄천은, 성벽 전면을 완전히 박살 낸 후 성내 구석구석으로 검기를 퍼뜨리며 마족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결전기인 만큼 루나의 쇄천은 더 강화된 형태였다. 지면을 뚫고 치솟는 검기는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가로막혀도 그 힘이 쇠하지 않았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다시금 목표를 찾아 휘몰아쳐댔다.

지금 지칼로가 막아낸 검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장을 뚫고 내성 바깥으로 튕겨 나간 검기는 어느새 다시 지칼로와 보좌들을 노리며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지칼로의 명령을 곧바로 납득한 보좌들은 이미 몸을 피하고 있었기에 살았고, 아직도 황망한 상태를 정리하지 못한 보좌들은 검기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지칼로는 다시 대검을 휘둘러 검기를 밀어냈다. 이제껏 성내의 무엇과 부딪혀도, 무엇을 집어삼켜도 맹렬하기만 하던 루나의 검기가 대검에 닿을 때는 명확히 약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 중, 겨우 몇 줄기에 불과했다.

‘성은 이미 복구가 불가하다. 그건 어차피 지토 님이 다시 다른 성을 소환하면 그만이지만…… 저 흉악한 인간을 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겠군.’

지칼로가 있는 쪽을 제외한 구역은 이미 성이라 부를 수도 없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나마 빌라굴과 시칸, 두 대장군이 대기하고 있던 쪽은 그나마 성했으나 얼마 가지 못할 터였다.

심지어 쇄천은 시작에 불과하다.

지칼로는 루나의 거대한 투기가 주둔지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걸 느끼며, 뻥 뚫린 파손부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부서진 성벽을 넘어 내성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는 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쇄천의 검기가 그녀의 걸음에 맞춰 움직이며 도망치지 못한 마족들을 육편으로 흩어버리고 있었다.

보랏빛 피와 살점이 마구잡이로 바닥과 허공을 더럽게 물들이고 있으나, 그녀의 검은 기수 코트엔 단 한 방울도 묻지 않고 있었다.

“어찌 너 같은 자가 인간인 것인지, 알 길이 없는 노릇이군.”

“난 지하에서 자기들끼리 잘살던 놈들이 왜 인세로 올라와 설치는지 모를 노릇이다. 꼴에 좀 싸울 줄 아는 모양이지? 내 쇄천을 이토록 무심하게 쳐낼 수 있는 인물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데.”

“지칼로 라미에르, 진마계 라미에르가의 수장이자 염화지대를 지배하는 왕이다.”

“어쩐지, 지금껏 대장군이네 뭐네 설치던 놈들보단 무게감이 느껴지더라니. 마왕이었군그래. 루나 룬칸델, 검가의 1기수다.”

막 쇄천을 뚫은 대장군 빌라굴과 시칸이 지칼로의 아래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족들은 루나의 힘에 전율하고 있었으나, 루나는 그저 대장군들을 보자마자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 너희 둘은 좋은 경험치가 되겠어.”

“뭐라고?”

“그냥 하잘것없는 벌레처럼 의미 없이 찢어지는 걸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면 내게 덤비고, 그래도 마지막은 싸움다운 싸움을 하다가 죽고 싶으면 나를 지나쳐 저 뒤쪽으로 가라. 너흴 반겨줄 사람이 있으니.”

빌라굴과 시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모욕을 받은 건 확실했으나, 지칼로가 가만히 있으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지금의 루나는 문자 그대로 전력을 방출하고 있는 상태, 플렉 칼루가를 처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빌라굴, 시칸. 그자를 상대하러 가라.”

지칼로는 소궁주를 처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설령 지금 자신이 루나에게 패배하더라도, 소궁주를 처리한다면 진마계 전체에 큰 이득이 될 터였다. 행여 그 과정에 만빙을 붙잡기라도 하면 진마계의 인세 침공은 단숨에 큰 도약을 이룰 수 있기도 했다.

‘대장군 둘이라면, 지금의 소궁주를 잡는 건 분명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백경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나를 죽이고 소궁주를 도울 생각인가, 많이 얕보였군.’

루나는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자, 대결 구도는 정해졌으니. 이제 긴말은 필요 없겠지? 와라, 마왕 지칼로.”

지칼로가 성채 아래로 도약하자, 빌라굴과 시칸도 따라 몸을 움직였다. 루나는 대장군들이 잔뜩 긴장하며 자신을 지나칠 때 약속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녀의 의식과 투지는 오로지 지칼로를 향해 있었다.

꼴에 좀 싸울 줄 아느냐고 비웃듯 말하긴 했으나, 루나에게 지칼로는 ‘그럴싸한 적’에 속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염화지대의 마왕.

과연 그 지위처럼 지칼로는 불을 다루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칼로가 뛰어내린 순간 별안간 성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며 남아 있던 쇄천의 기운을 녹여댔다.

루나는 그에 맞서 가장 먼저 유성우를 터뜨렸다. 지상의 화염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의 검기가 맞부딪히며 전장은 순식간에 마경으로 돌변했다.

룬칸델이자 바멀 연합으로서의 의무와, 세계 수호라는 무거운 대의를 업은 채 전장으로 왔으나.

도끼검과 대검이 뒤섞인 순간, 루나는 희열을 느꼈다.

첫 기습에서 마왕이라는 지칼로를 죽이고, 마계의 한 축을 무너뜨려 가문과 연합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한 그건 ‘성장’의 희열이기도 했다.

경험치.

싸우기 직전, 루나가 시리스에게 말한 내용은 시리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루나 역시 아직 흑해에서 얻은 경험치들이 폭발하고 만개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성장의 창고를 완전히 개방하려면 바로 지칼로 같은 도화선들이 필요했다.

두근, 두근!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심장과 혈관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꿈틀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루나는 이미 유소년기에 완성된 무인이었다. 따라서 청년기부터 그녀는 분명 강해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정체된 느낌을 받았다.

그나마 흑해에선 내내 명백한 성장을 이뤘으나 하루하루 마물과 마성화로부터 생존하느라 향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마치 한창 생도로서 처음 검을 익힐 때처럼,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었다.

‘반신, 지상을 넘어 하늘에 오른 자. 사람들이 아버지를 표현할 때 했던 말들…… 그게 바로 이런 기분인가. 하늘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마침내 지상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아직 초입이지만, 이대로라면 머잖아 분명 하늘에 있게 될 것이다.

루나는 지금의 자신을 그렇게 인식했다. 성장에 심취한 와중 지칼로의 검이 눈앞을 스쳐도, 뺨을 긁고 지나가도 그녀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악하고 약한 자가 발악을 하고 있을 뿐.

투카악-!

크란텔의 칼날이 지칼로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검이 아니라 마치 둔기로 가격한 듯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칼로의 육신이 그만큼 단단한 까닭이다. 불과 마기가 보호하는 그의 육신은 진마계에서도 제대로 상처입힐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룬칸델의 축복받은 육체, 그중에서도 강체 중의 강체인 루나의 몸 곳곳엔 끊임없이 생채기가 번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모두 조금만 깊었다면 치명상이었을 상처.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분이 갈수록, 초가 갈수록, 그보다도 더 작은 단위의 시간이 지날 때마다.

지칼로의 검이 루나에게 닿는 횟수는 줄어들었고, 도끼검 크란텔이 지칼로를 내리찍는 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둔기가 아니라 검이 살과 뼈를 베는 스산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칼로는 루나의 검이 예리해지는 속도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백경은 분명 처음에도 전력이었다. 그 힘으로 내 육신을 훼손하려면 분명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었어. 그런데 지금…… 성장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지칼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건 창성에 올라보지 못한 자는, 혹은 루나처럼 창성을 향해가는 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경지다.

이내 지칼로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루나의 검이 예리해진 걸 넘어 정교해지기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과 마기도 이제는 방패가 될 수 없으니, 지칼로는 무방비한 맨몸으로 루나의 앞에 선 기분이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대검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상대는 여전히 루나 룬칸델, 백경이고, 그 흉측한 도끼검은 세상에 찢을 수 없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더 보여줄 건 없어?”

방금까지 분명 눈앞에 있었건만,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루나의 목소리에 지칼로는 헛숨을 삼키며 홱 몸을 돌렸다.

루나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을 한 채 지칼로의 옆얼굴을 반쯤 날려버리고 있었다. 날아간 얼굴은 바로 회복되었으나, 영원히 재생할 순 없었다.

“없으면, 이제 그만 끝을 내야겠군. 그러나 내게 죽는다고 하여 너무 낙심하지는 마라. 너는 충분히 강했다, 지칼로 라미에르.”

* * *

루나가 지칼로를 상대하는 사이, 시리스는 대장군 두 사람을 노려보며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대장군의 합공에 시리스는 전투 시작부터 지금껏 내내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룬칸델의 1기수께선 날 성장시키려는 것인가, 아니면 죽이려는 것인가…… 어째 잘 모르겠는데. 정말 이게 맞는 건가……?’

다시 마기를 분출하는 대장군들을 보며 시리스는 퉷, 핏물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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