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6화
228화. 격전의 그로쉬에 성(2)
이게, 정녕 한 인간이 일으킨 불이란 말인가?
마족들은 방어선으로 밀려드는 업화의 불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 닿는 모든 곳에서 시퍼렇고 거대한 불들이 멸망을 예고하며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이 브라다만테를 휘두를 때마다 온 하늘과 바다가 사납게 뒤집어졌다. 아래에선 충격파에 해일이 치솟고, 위에선 마족들을 도륙하며 나아간 검기가 구름을 찢어댔다.
“지플을 막겠다고 우리 방벽을 맡고 있던 병력을 빼다니, 진마계의 지휘관들은 지능이란 게 없는 것이냐?”
낮고 싸늘한 목소리지만 창성에 가까운 기운을 품고 있다. 정면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모든 마족들은 전장 전역을 낮게 진동시키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진의 시야에 들어온 마왕은 총 셋.
그중 하나는 진에게 대답을 하거나 이름을 밝힐 틈도 없이, 벌써 업화에 파묻혀 녹아내리고 있었다.
초재생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끔찍한 화기에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건 그의 좌우로 늘어선 나머지 두 마왕들이었다.
“끄아아아악……!”
“카하악!”
하지만 그들도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했을 뿐, 반격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검기가 닿지 않는 곳에는 불이, 불이 닿지 못하는 곳에는 어둠이 번졌다. 무라칸이 내뿜는 흑쇄와 숨결도 쉴 새 없이 마족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갖고 있던 지토의 살점을 미리 사용했다면,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마왕들이 위기로 몰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진은 처음부터 살점을 염두에 두고 전력으로 업화를 펼쳤다. 영원화의 기운을 품은 푸른 화염은 지토의 살점을 가장 먼저 녹여버렸고, 진은 행여 마왕들이 남은 잔기를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계산해서 검기를 쏘았다.
마왕 셋의 상황이 이 지경이니 이하 병력들은 진을 쳐다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진이 내뿜는 투기에 온몸이 빠르게 굳고 있었다.
몸이 굳지 않았어도 일반 병력 대부분은 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공기 대신 채워진 업화를 피해 살길을 찾고자 발악할 뿐이었다.
“투항하는 자들은 죽이지 않겠다. 도망치는 놈 또한 죽이지 않겠다. 나를 피해 도망칠 수 있다면.”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
진이 다다른 경지는 그런 ‘숫자’를 무시할 수 있는 영역이다. 숫자만으로는 결코 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진, 무라칸과 ‘전투’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방어선은 이대로 그로쉬에 성까지 열릴 운명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두 사람을 저지해야만 진마계군의 수적 우세가 의미 있을 수 있었다.
[가엽구나, 마족들이여. 일반병이라 할지라도 너희 대부분은 분명 우리 용들처럼 오랜 세월 존재했을 텐데, 그저 이토록 무의미하게 머릿수나 채우다 개죽음을 당하고자 그 긴 세월을 살아왔단 말인가?]
무라칸이 업화에 휘감겨있던 또 다른 마왕의 목숨을 거두며 말했다. 이제 이쪽 방어선에 남은 마왕은 단 한 명, 그러나 그는 숨만 붙어있을 뿐 사실상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황금함의 포격이 정확히 그를 조준해서 날아들고 있었다. 방벽도 계속해서 총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츠아아아악……!
황금 함의 주포가 공간을 찢으며 거대한 궤적을 남겼다. 광심장 동력원과 페이텔의 권능으로 강화된 뇌격포는 마지막 마왕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말았다.
그 궤도에 놓여 있던 모든 마족들을 함께 절명시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내 진이 빙결계 마력을 일으켜 허공에 직선으로 길을 형성했다. 진은 여유롭게 그 길을 밟으며 불타는 진마계군 사이를 나아갔다.
기괴한 풍경이었다. 마족들은 업화에 재가 되어 마치 꽃가루처럼 흩날렸고, 무라칸이 펼친 거대한 영기 장막이 진의 뒤를 받쳤다. 빽빽하게 대열을 이루고 있던 마족들이 진의 걸음에 맞춰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연합군 쪽에서 들려오는 먼 포성, 그리고 진마계군과 그들의 병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운 좋게 살아남은 한 병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바다에 뜬 진마계 함선의 잔해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항자도, 도망자도 아니니 살려줄 이유는 없다. 진이 잠시 그에게 시선을 두자 근처에 있던 화염이 모여들어 그를 잡아먹었다.
“대체 누가 마족이고, 누가 인간인지 모르겠군그래. 그저 명령을 따르다 좌절한 일개 병사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던가? 진 룬칸델. 이거 원, 무서워서.”
별안간 진의 앞쪽에 차원 문이 열렸다. 새로이 다섯 명의 마왕이 차원 문을 빠져나오는 모습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사키엘 그로쉬에가 급파한 마왕들이었다.
다일러스 클라우피노, 티카노 벨가시움, 베겔 밀로타네, 슬람 바쿠리아, 라갈 펀.
진은 그중 병사의 비애를 운운한 라갈 펀에게 시선을 두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가 발산하는 강렬한 독기 덕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라갈 펀이군, 벌써 만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현재 바멀 연합은 라갈 펀이 켈리악 지플과 협력하는 중이리라 예상하는 중이다.
또한 라갈은 특유의 대량 살상 능력으로 엘로나를 몰아세운 전적도 있으니, 최고의 요주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라갈 펀.”
라갈에겐 받아야 할 빚이 있기도 했다. 이제 가네스토가 된 룬칸델의 탕자들을 이용해 루나를 위협하려 했으니 말이다. 그 뒷배에 정말로 가네스토가와 켈리악 지플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호오! 과연 이 몸의 위명은 이미 인세 전역에 알려져 있었군. 하긴, 인세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을 내가 반쯤 죽여놨으니, 당연지사겠지? 그래, 내가 바로 독, 마! 마계에 단 둘뿐인 마의 칭호 보유자, 독마 라갈 펀이다.”
한껏 자아도취가 느껴지는 라갈 펀의 자기소개에 함께 나온 마왕들은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들은 애초에 라갈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모두 클라우피노가나 벨가시움가와 가까운 이들이었다. 진은 잠시 비셉스가 알려준 정보를 기억하며 나머지 마왕들을 알아보았다.
‘장검은 다일러스가의 가주 클라우피노와 벨가시움가의 마왕 티카노. 나머지 둘은 빙결 지대의 주인 베겔 밀로타네와 역병 지대의 주인 슬람 바쿠리아인가.’
대부분이 지금껏 루나가 선제공격 임무를 수행하며 상대한 마왕들에 비해 훨씬 굵직한 인물들이었다.
“인세.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엘로나 지플이 아니다, 라갈 펀. 솔직히 나도 조금은 궁금했는데, 네 덕에 서열이 확실해졌지.”
“하?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만약 그날 엘로나 지플이 아닌 검가의 가주를 만났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스아악-!
진이 먼저 마왕들에게 검기를 흩뿌렸다. 다일러스와 티카노를 제외한 마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업화의 검기를 피했다.
다일러스와 티카노는 정면으로 검기를 쳐내며 진과 거리를 좁혔다. 심지어 다일러스는 창을 내질러 진의 머리칼을 스치는 모습을 보였다.
겉보기엔 상당히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으나, 진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일러스의 이마로 검을 떨궜다. 다일러스는 그 일격을 막느라 일순 바다로 추락할 뻔했다.
“앞선 마왕들이 너무 약해서 내심 별 재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번엔 꽤 하는 놈들이 나온 모양이군.”
그사이 티카노가 진의 옆구리를 노리며 쇄도했으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흑쇄를 뚫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이 새로 나온 마왕들 중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일러스는 다소 충격을 받은 채 기운을 끌어올렸다. 방금 단 일격에 자세가 무너질 뻔한 것이다.
‘검가의 소가주와 내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건만, 이래선 비교가 의미조차 없는 수준이로군…… 지토 님의 진기를 바로 사용할 수밖에.’
물론 진은 이번에도 지토의 살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다일러스와 티카노만큼은 절대로 살점을 취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둘이 강화되는 것만 막으면 전투가 피곤해질 일은 절대로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다일러스는 격차를 깨닫자마자 살점을 사용하려 시도했으나, 도무지 틈이 나질 않았다.
겨우 1초, 2초 남짓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만 진은 그조차 꿈꿀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다일러스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지토의 살점을 쓰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오기 전에 미리 사용했어야지. 미리 사용했다가 행여 내가 그냥 뺄 경우 낭비되는 게 걱정됐나?”
“큭……!”
다일러스는 태산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브라다만테를 겨우 밀어내며 앞서 죽은 세 명의 마왕들을 떠올렸다.
전장 어디에서도 그들이 사용했어야 할 지토의 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도 그들처럼 살점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진의 말대로 명백한 실수였다.
“나는 네놈들이 그런 걸 계산해가며 싸울 수 있을 만큼 물렁물렁한 인간이 아니다. 이 꼴을 보면 지토가 참 좋아하겠군. 지토에게 네놈들은 대체 무엇이냐? 내가 지토라면, 살점이나 파먹는 기생충으로 보일 것 같은데.”
무라칸도 진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는 티카노가 살점을 꺼내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중이었다.
나머지 셋도 살점을 못 쓰게 만드는 게 가장 좋기는 하나 그것까진 어려웠다. 아무리 격이 떨어진다 한들, 그들이 살점을 꺼내 깨뜨리는 건 고작 2초 정도가 필요할 뿐이니까. 베겔과 슬람은 둘이 압박당하는 틈을 타 이미 살점을 깨뜨리고 있었다.
물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라갈 펀이 가진 살점을 가장 먼저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군은 저 멀리 방벽에서 포격 지원을 하는 중이며, 적지에서 싸우는 건 진과 무라칸밖에 없다. 라갈이 인질극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와…… 진짜 켈리악 친구 말대로 무서운 놈이네, 진 룬칸델. 그 다일러스를 초장부터 숨도 못 쉬게 만들고 있잖아? 티카노 놈도 만만찮은데, 무라칸 앞에서는 그냥 애송이처럼 보일 지경이로군.’
다만 라갈은 애초에 지금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키엘의 지원 요청을 무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행차했을 뿐, 함께 온 마왕들이 죽건 말건 자신의 알 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살점을 사용할 수 있는데도 꺼내지 않았다.
‘보아하니 마왕들이 저 둘에게 뒤지는 건 시간문제다. 놈들을 방패 삼아서, 적당한 시기에 도망치면 되겠군. 사키엘, 이 멍청한 자식. 켈리악 친구도 알고 나도 아는 걸 왜 사키엘만 모르는 거야? 지금 진마계에 진 룬칸델과 가망성 있는 전투를 할 수 있는 건, 지토 님을 빼면 겨우 네다섯 정도라고.’
과거와 달리 라갈의 충심은 지토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 그는 이제 지토보다도 켈리악 지플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