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게 한 입 (1)
“아저씨······. 설마 아저씨도?”
아재의 묘한 표정을 확인한 지혁이 살짝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는 대식으로 인해 특성이 바뀐 첫 번째 사람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누구도 모르지만, 아마도 식신과 요리사라는 관계의 특수성 때문인 것 같았다.
제아무리 대식이라도, 뛰어난 요리사가 없이는 제대로 된 먹방을 선보이기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아재는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대식의 오른팔로 활약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변화가 생긴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 역시 아재인 게 당연했다.
“뭐예요?”
지혁이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지자, 아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식신의 행보관이라는구먼.”
아재의 캐릭터와 딱 맞는 특성에, 지혁과 대식은 약속이나 한듯 픽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아재의 이미지나 역할은 행보관과 비슷했다.
대식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항상 타이밍 좋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다른 그룹을 만났을 때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대식이 보스를 공략할 때는 지휘관의 역할을 대신하는 데다가 장비의 보급까지 맡고 있으니 그야말로 행보관이라는 직책에 딱 맞는 캐릭터였다.
“네? 행보관이요? 그게 뭔데요?”
미필인 혜나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대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행보관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뭘 하든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소리입니다.”
말을 마친 대식이 자신을 바라보자, 아재는 흐뭇하게 웃으며 새로 생긴 스킬의 목록을 읊어 내려갔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식량 보급이라는 스킬인 것 같구먼. 음식을 넣어두면 그 상태 그대로 보관이 가능혀.”
“기한은요?”
“72시간이니께, 삼 일 정도여.”
첫 번째 스킬에 대한 설명을 들은 대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은 7월이었다. 벌써부터 공기가 꽤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했으니,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할 무렵에는 더욱 기온이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건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지혁이 요리한 음식을 아재의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음식의 보존 기한은 더욱 늘어날 테고, 그럼 베이스 캠프에서 매일 두 번, 세 번씩 음식을 배달해 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쓸만하네요. 확실히 보급 부담이 줄겠어요. 두 번째는요?”
“특급 배송이여. 일정한 거리 내에 있는 부대원에게 필요한 장비를 곧바로 보내줄 수 있다는구먼.”
“그것도 좋네요.”
두 번째 스킬에 대한 설명을 들은 대식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 배송 스킬이 있다면 신속하게 부서진 장비를 교체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장비를 바꾸어가며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전투에서 한번 써먹어 보죠.”
말을 마친 대식은 만들어진 장비를 곧장 아재에게 넘긴 뒤 작업실을 나섰다.
* * *
“대식 씨, 안내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식이 밖으로 나오자, 마을의 관리를 맡고 있는 원석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왔다.
“벌써요?”
보고를 들은 대식이 조금 놀란 듯 되물었다.
안내조는 군포 의왕 일대에 뿌려둔 벽보를 보고 찾아오는 생존자 무리를 마을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맡은 신설팀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벽보를 뿌린 것은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아직 생존자들이 연락을 취하거나 합류 지점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벽보를 뜯어갔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생존자들이 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기대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원석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벽보를 뜯어간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군가에게 그 벽보를 보여주고 대식 빌리지에 의탁할지 말지를 의논하려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잘됐네요. 마침 과천에도 가야하니, 장군님에게 호위대를 좀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
“과천이요? 수원으로 다시 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가기 전에 장군님한테도 맡길 일들이 좀 있어서요.”
이어서 대식은 화학팀의 이사 준비와 교역소 설치를 비롯한 몇몇 사항들에 대해 간략하게 지시를 내렸다.
“으, 으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업무량에, 원석의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깔렸다.
현재 그는 정리조 운용에 농사일, 무전 개설, 마을의 크고 작은 시설 관리에 인력 관리, 안내조 운영까지, 상당히 많은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직접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종적인 결과물을 확인하고 문제없이 일이 진행되도록 하는 게 모두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너무 많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그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을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건 대식이 아니던가.
매일 밤낮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도저히 일이 많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으음······. 오늘도 영양제를 좀 맞아야겠는걸.’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체력 회복 능력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요즘 원석이 매일 x카스 대신 체력 회복 능력자를 찾아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식은 휑하니 마을을 떠나버렸다.
* * *
“와하하하! 왔나!”
대식의 얼굴을 확인한 승덕은 입이 귀에 걸린 채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뛰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예 위병소까지 직접 나와 대식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나와 계십니까?”
하지만 대식은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물을 뿐이었다.
“연대장에게 들었네, 하루만에 수원의 싸움을 멈추게 했다고! 역시 대단해, 자네 아예 재입대해서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꿈에 들을까 겁나는 끔찍한 발언에, 대식은 보기 드물게 인상을 구겼다.
심지어 그의 두 눈에서는 약간의 살의마저 묻어났다.
“허허, 우리 장군님께서 일 잘한 사람한테 왜 벌을 주려고 그러십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아재는 얼른 끼어들어 농을 던졌다.
“아니야, 한번 생각해보게. 이 상황이 잘 정리되면 자네는 30대에 장성을 달 거야. 내 장담하지.”
하지만 승덕은 짐짓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장성 자리를 미끼로 다시 한번 재입대를 제안했다.
표정으로 보나 뭘로 보나 단순한 농담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물론 대식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너무 단호한 거 아닌가?”
“이런 문제는 단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군인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승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식은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뒤통수를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군은 상당히 딱딱한 집단이었다. 결과가 좋으니 다 괜찮다고 넘어가기에는 대식의 문제 해결방식은 상당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물론 승덕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절차니 뭐니 하는 것을 따질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또 뭘 시키려고 왔나?”
잠시 고민하던 승덕은 곧장 화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게 대식을 재입대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치킨 정도면 넘어올지도 모르는데······. 한번 추진해 봐야겠군.’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그게 승덕의 결정이었다.
물론 그 속내를 모를 대식이 아니었다.
‘이 영감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후······.’
옅은 한숨을 내쉰 대식은 얼른 상대에게 용건을 말했다.
“우선 헬기를 좀 구하고 싶습니다. 사령부나 군단급 본부에는 헬기가 있지 않습니까?”
“헬기를?”
“네.”
“구할 수야 있지. 우리 사령부에도 있으니까.”
“그럼 정비할 사람을 보낼 테니 언제든지 헬기를 띄울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네. 그건 전혀 어렵지 않지.”
승덕이 첫 번째 제안을 수락하기 무섭게 대식은 연달아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사람에게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숨 쉴 틈도 없이 일거리를 던져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는 전 병력을 동원해서 연료를 확보해 주십시오.”
“알겠네.”
“중장비 운전 가능하신 분들 최대한 모집해 주시고, 수리도 마쳐 주셔야 합니다.”
“중장비를?”
“네, 크레인, 포크레인, 로더, 지게차, 뭐든지요.”
자꾸만 늘어나는 업무량에, 승덕의 얼굴이 미묘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희 마을에 생존자들을 마을로 인도할 안내조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안내조에게 붙여줄 호위조도 꾸려 주십시오.”
“그, 그러지.”
“아, 또 서수원 쪽은 아직 좀비가 남아있는 구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쌀농사를 망치면 안 되니 그쪽도 정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대식은 거의 열 개가 넘는 일거리를 던져주고 나서야 말을 마쳤다.
“그······. 혹시 또 있나?”
승덕의 낯빛이 흙빛이 된 것을 확인한 대식은 그제야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수원에 다녀오면 몇 개가 더 생길 겁니다.”
* * *
이후 대식은 빠르게 서수원의 논밭을 지나 남수원 그룹의 땅으로 들어섰다.
약속 지점에는 이미 남수원 그룹의 병력과 북수원의 정예들이 모여 있었다.
“숫자가 꽤 되네요?”
병력의 규모를 대충 훑어본 대식은 곧바로 아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이에 아재는 빠르게 북수원 쪽 사람들에게 다가가 미리 약속한 무기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우와······.”
“뭐야 이게?”
“진짜로 능력치 보정이 붙네?”
“우리 쪽 제작 능력자는 이런 거 못 하나?”
“대체 특성 레벨이 몇이면 이런 게 붙는 거야?”
그들의 반응은 대식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 한번 직접 써보시고 추가 주문 여부를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시제품을 나눠준 대식이 웃으며 동학에게 말했다.
식신 세트의 맛을 본 병사들은 분명히 사비를 털어서라도 더 좋은 장비를 사려 할 게 분명했다.
즉, 지금 이 앞에 있는 수백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잠재적 고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 그게 뭡니까?”
아니나 다를까, 규현 역시 벌써부터 식신 세트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제 능력으로 만든 장비입니다. 능력치 보정이 붙어있는데······. 하루 사이에 만들 수 있는 양에는 제한이 좀 있어서요. 일단 장비가 좋은 저희가 앞장서도록 하죠.”
또다시 장사꾼 모드로 들어간 대식은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은······. 안 쓰십니까?”
대식의 뒤를 따라가는 규현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쭉 이렇게 했으니께, 걱정 말어.”
기회를 잡은 아재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전투 능력자가 그렇게 많은 겁니까?”
이에 규현은 탐색조 사람들이 모두 전투 능력자라고 제멋대로 오해했다.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이 냉병기를 들고 변이체들을 사냥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뇨, 저희는 전투 능력자 별로 없는데요.”
하지만 지혁은 곧장 그의 추측을 부정했다.
“전 요리사고, 아저씨는 인벤토리 능력자, 저기 윤호는 테이밍 능력자고요······.”
지금 그는 탐색조 사람들 중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이능을 가진 사람들만을 딱 집어 언급하고 있었다.
그 행동에 깔린 의도를 알아차린 혜나는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차며 지혁과 아재, 대식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사기꾼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지혁이까지······.’
하지만 그녀는 대식이 또다시 뭔가 사기를 치려 한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렸을 뿐, 그 목적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대식이 단순히 무기를 팔려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