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31화 (331/508)

결전의 날 (3)

* * *

“······.”

왕관을 쓴 악마의 발걸음에 점점 더 속도가 붙었다.

이대로 종말의 씨앗을 포기하는 건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서울에는 아직 왕이 되지 못한 놈들이 남아있었다.

일단 잠실에 자리 잡은 그 괴물과 손을 잡고 저 인간들을 쓸어버린다. 그리고 왕이 되지 못한 놈들을 집어삼키고 그 씨앗을 빼앗는다. 그것이 놈의 계획이었다.

그런 괴물과 힘을 합치는 게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자신 혼자서 전차와 대포를 가지고 있는 군대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불행 중 다행인 건, 저 인간들이 함부로 도심 깊은 곳까지 들어올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근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고층 빌딩들은 그 자체로 천연의 방벽이 되어주었고,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변이체들을 상대로 지근거리에서 포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즉, 일단 도심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다면 전차와 포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울 터였다.

놈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산을 끼고 최대한 숫자를 줄이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자신은 변이체들로 가득한 이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목표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충돌만 없으면 되겠지.’

다른 놈들의 영역을 지나쳐야 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그쪽에서도 함부로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사자라도 사자를 상대로는 쉬이 발톱을 드러낼 수 없는 법이니까.

“크륵, 크르륵······.”

“크륵?”

왕을 발견한 변이체들은 붉은 눈을 번득이며 황급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것은 사자를 마주한 개나 늑대가 보일 만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서 놈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두 가지였다. 달아나거나, 복종하거나.

* * *

두 마리의 맹금류가 천천히 하늘을 선회하며 검은 얼룩에 뒤덮인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크고 작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잿빛 도시 곳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곳 주위에는 사지가 떨어져 나간 좀비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고, 팔다리가 멀쩡하게 붙은 놈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계속해서 연합군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

김 하사는 온 정신을 집중해 그 물결을 거슬러 움직이는 물고기를 찾아내려 애썼다.

“여기는 고기 러버, 포병대는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좀비들 끌어들이세요.”

그사이 대식은 무전기를 통해 우면산에 자리 잡은 포병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그들의 위치는 예술의 전당 입구였다.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공연장이었던 그곳에서는 이제 아름다운 음악 대신 포 소리와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기는 탱고, 그럼 탐색조와 발을 맞춰서 이동하도록 하겠다.”

회신을 받은 대식은 가볍게 대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길을 막는 변이체들을 청소했다.

그리고는 스킬을 활용해 검은 얼룩에 뒤덮인 동그란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서는 예술의 전당부터 서초역까지 이어지는 뻥 뚫린 도로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쪽에서 서초역 인근을 볼 수 있다는 건, 반대편에서도 여기서 치솟는 불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태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거지?’

그때, 대식의 머릿속에 아재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식이, 뭘 찾는 겨?」

「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서요.」

대식의 목소리에서는 강한 확신이 묻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틀림없이 왕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몰려든 변이체의 숫자, 지형, 그리고 서초역 인근으로 이어지고 있는 줄기의 크기까지.

그 모든 게 저곳에 왕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작에 뛰쳐나와 자신과 맞섰어야 할 왕은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가능성은 하나였다.

‘정말로 종말의 씨앗을 포기하고 달아난 건가?’

순간 대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벌써 두 번째. 아케이아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식은 자신의 경험을 과신하지도 않았고,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는 걸 우연으로 여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우연의 일치 따위는 있어도 없다고 생각해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

대식은 그렇게 확신하며 빠르게 단서를 그러모았다.

아케이아의 어떤 대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인구 밀도. 이로 인해 불과 수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오밀조밀 생겨난 종말의 씨앗들······.

특별한 이능이나 높은 능력치 없이도 변이체를 정리할 수 있는 무기와 대량 살상 병기의 존재.

그리고 잠실 인근에 나타난 초거대 변이체.

그 순간, 대식의 머리에 번갯불이 튀었다.

‘동쪽으로 가는 거군.’

때맞춰 윤호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형! 찾았어요!”

“혹시 대로를 타고 강남역 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대식의 질문에, 윤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얻은 대식은 얼른 무전기의 송신 버튼에 손을 올렸다.

“여기는 고기 러버, 지금 당장 포격 지점 바꾸세요.”

이어서 그는 곧바로 아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아재, 방향 틀어요.」

「뭐?」

「안쪽으로 들어가서 정리할 것 없습니다. 이대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포병대만 지키세요.」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이었지만, 아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지시를 전달했다.

대식이 이럴 때는 보통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예측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으니까.

“다들 방향 틀어! 시가지 안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대로 포병대 지키면서 동쪽으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패조가 일사불란하게 방향을 틀었다.

“여기는 고기 러버, 현 위치에서 어디까지 포격 가능합니까?”

뒤이어 대식은 현 위치에서 포격이 가능한 최대 사거리를 물었다.

“견인포는 최대 사거리 20킬로미터 이상이니 강남 쪽은 전부 커버 가능하네, 전차는 8킬로미터, 81mm 박격포는 5킬로미터 이내야.”

그리고는 지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포격이 닿는지를 확인했다.

“그럼 서초역에서 강남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포격해 주십시오.”

“뭐? 그럼 전선이 너무 확대될 텐데······”

“상관없습니다. 절 믿고 그쪽에 포탄 쏟아부으세요.”

말을 마친 대식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달아난 걸 후회하게 해주지.’

* * *

- 쉬이이익!

묵직한 포탄이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에 이어, 높다란 빌딩의 최상층 인근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았다.

- 쾅!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에 뒤따라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신의 진로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악마의 눈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종말의 씨앗을 놔두고?’

놈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인간들은 자신이 버린 종말의 씨앗을 파괴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포병대가 자리 잡은 우면산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며 인근의 좀비들을 정리하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었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능력치를 올리면서 종말의 씨앗을 파괴하고, 그것을 지키는 왕을 처치해 더욱 강해질 수 있으니까.

이렇게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심에 포격을 가하며 무리해서 전선을 확대해야 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함부로 이동하지 않고 산을 등진 채 변이체들을 끌어들이는 전술을 썼던 것은 그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놈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

놈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문 채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행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왕이 종말의 씨앗을 버리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행동을 취하는 개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싸우거나 먹이가 된 놈들 중 어떤 개체도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설령 그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종말의 씨앗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선택을 예측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악!”

“끼이이익!”

갑작스러운 공격에 자극을 받은 변이체들이 곳곳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영토에 있던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성의 근원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 쉭!

또 한 번 섬뜩한 소리와 함께 포탄이 떨어지며 지면이 바르르 떨렸다.

대로 인근에 서 있던 변이체들은 불나방처럼 남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 전차와 대포를 가지고 온 인간들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변이체가 아니라, 명확하게 대로를 향해 포격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이건······.’

떨어지는 포탄의 수가 늘어날수록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정말 날 노리고 쏘는 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은 분명히 자신의 행동을 읽고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 훅······.

당황한 악마는 얼른 스킬을 활용해 최대한 먼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 * *

“빌어먹을, 또 몰려오잖아! 정말 이게 맞아?”

“대식 씨가 이게 맞다잖아!”

또다시 몰려드는 검은 파도에, 잠시 밝아졌던 병사들의 얼굴에는 다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본래 그들의 계획은 이곳으로 보스 몬스터를 끌어들여 잡는 것이었다.

보스를 잡은 후에는 종말의 씨앗을 부수고 인근을 말끔하게 정리하며 능력치를 올린 뒤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대식은 휴식조차 없이 전선을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 결과······.

“젠장, 양재역 쪽에서도 몰려오잖아!”

지금 그들은 양재역과 강남역 인근에서 내려오는 변이체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대식이, 진짜 이게 맞어!?”

스킬을 사용해 장비를 교체해준 아재가 대식에게 단창을 건네며 물었다.

대식은 빠르게 복원을 사용해 부서진 단창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아재의 인벤토리에 가득 쌓인 장비들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이제는 싸우는 와중에 복원을 사용해 장비를 되살리지 않으면 교체해줄 장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대식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전략을 고수했다.

“이런다고 왕에게 맞지는 않을 겁니다, 포격이 그렇게 정밀한 게 아니잖아요.”

민호는 보기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식의 전략에 의문을 표했다.

반면 아재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민호의 의견을 부정했다.

“대식이는 절대로 그렇게 운에 맡길 사람이 아니여. 뭔가 생각이 있겄제.”

그리고는 대식의 얼굴 위로 시선을 옮겼다.

이에 복원한 장비를 다시 아재에게 넘겨준 대식이 피식 웃으며 답을 내놓았다.

“설마 이 거리에서 운 좋게 표적이 맞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럼 뭡니까?”

민호가 장검을 휘둘러 변이체의 머리를 날려버리며 물었다.

“패잔병이 내 땅으로 도망쳤는데 그것 때문에 나한테 불똥이 튀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이어지는 대식의 질문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네?”

“지금 제가 하는 게 그런 짓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마친 대식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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