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4)
“고, 고!”
“앞으로,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갑시다!”
“쓸어버려!”
세 개의 다리 위, 셋으로 나뉜 수천의 병력이 동시에 진격을 시작했다.
“지지 마, 우리가 제일 먼저 넘어가는 거야!”
“다른 조랑 내기라도 할까? 간식 내기?”
“오오, 좋은데!”
“안 돼, 박자가 너무 안 맞으면 한쪽으로 변이체가 쏠린다고!”
“그렇네······.”
“조금 아쉬운데.”
“전진, 전진!”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분위기는 불과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두 눈은 자신감으로 빛났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심지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고 있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크륵!”
“끼이이익!”
앞을 가로막은 변이체들은 썩은 짚단처럼 픽픽 쓰러져 나가자, 병사들의 몸놀림에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우, 우와아······.”
다리 건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용준과 그 동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울의 변이체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그 괴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이제 와서는 몇 마리만 나타나도 온 마을이 공포에 떨 정도로 막강했다.
저 괴물들은 포식자였고, 인간은 먹이였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이 신세계의 법칙이었다.
이능이 있다고 해도, 총이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최, 최고다!”
누군가가 응원을 시작하자, 뒤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뒤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화이팅!”
“쓰, 쓸어버려!”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뒤바뀌는 광경은, 그들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율과 흥분을 선사했다.
오랫동안 먹잇감이 되어 쫓겨 다니던 울분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응원단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신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모습에, 대식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였다.
무전기에서 그를 호출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챔피언, 여기는 챔피언, 올림픽 대교 위에 보스 몬스터 출현. 고기 러버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고기 러버가 도착할 때까지 내가 시간을 끌겠다.”
‘보스 몬스터’라는 표현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반대편을 한 번 슥 바라보더니 대검을 빼 들었다.
“그럼 전 일이 생겨서 좀 다녀오겠습니다. 조금 더 안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업 도와주세요.”
말을 마친 대식은 용준 일행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검은 안개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 *
“굉장해! 이 사람들이라면 정말로 서울에서 저 좀비들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이미 강남 쪽도 정리가 끝났다잖아.”
“강남에 있는 놈들도 몰아냈는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어?”
“그럼 설마 그 사우론 타워에 있던 괴물도······?”
“바보냐! 당연히 그놈을 잡았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겠지!”
용준과 함께 정리 작업을 돕기 위해 온 이백은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다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감상했다.
대식은 그들에게 전투에 나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뒤를 따라다니며 전장을 정리하고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요구 사항에 깔린 의도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진짜로 되겠어! 이건 된다고.”
“그럼 우린 뭘 하지? 정말로 정리 작업만 해?”
“그래, 뭐라도 더 도와야지!”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그 자체로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지금 대식 일행은 서울을 정화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만나자마자 구호물자를 나눠줄 만큼 다른 집단에게 호의적이었다.
목적이 일치하고, 위아래가 분명하고, 상대에게 이미 도움을 받았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인간이란 알아서 눈치를 보며 할 일을 찾는 법이다.
너희는 싸워라, 우리는 약하니까 가만히 앉아 도움이나 받겠다. 그렇게 뻔뻔하게 굴며 배짱을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전쟁도 안 해 본 민간인이 현지 민간인의 협력을 끌어내는 방법을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던 포드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그는 단순한 구경꾼으로 이곳에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데려갈 인재의 용병술과 능력을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 인간을 조금 더 면밀히 관찰해 포섭할 방법을 찾기 위해.
그것이 그가 직접 현장에 와서 상황을 살피고 있는 진정한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대식의 방식은, 실제로 전장에서 현지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그가 보기에도 너무나 능숙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대식이 그들을 전장으로 불러낸 진짜 목적은, 단순히 일손을 빌리거나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 * *
“우와······.”
“문자 그대로 순삭이구만, 순삭.”
“김대식은 신이야!”
“신은 신이지, 식신.”
대식의 대검이 처음 보는 보스 몬스터의 머리에 꽂히는 순간, 병사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김대식! 김대식!”
“김대식! 김대식!”
심지어 몇몇 병사들은 두 손을 높이 든 채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 행동에, 대식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긴장 풀지 마시고요. 강남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있는 변이체들도 제법 강하니까 너무 여유 부리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대식이 가볍게 주의를 주자, 병사들은 걱정 말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식 씨, 저분들은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겁니까?”
그때, 형섭이 뒤쪽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민호가 생존자를 찾기 위해 위례 신도시로 갔다는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주민들을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전투에 참여시키는 것도 아니고, 전장을 정리하는 것 정도라면 지금까지 그랬듯 정리조가 해도 충분했으니까.
“구경 좀 하라고요. 여러분이 어떻게 싸우는지,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걸 직접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답하며 대검에 묻은 변이체의 피를 닦아냈다.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해서 자기를 키웠는지도 자기가 어른이 돼서 돈을 벌어봐야 느끼는 게 인간입니다.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고마움도 못 느끼고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지만······. 서로 감정이 상하고 나서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는 미리미리 차단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식이 뒤에 덧붙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뒷부분의 반만 진심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믿지 않았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그리고 그 본능이 지금껏 목숨을 걸고 싸워온 사람들을 얼마나 허탈하게 만드는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문제가 될 일이 생기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
“하긴, 정리조분들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손이 늘면 좋죠.”
대식의 목적을 이해한 형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그거 말고도 저분들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대식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동쪽을 바라봤다.
‘자, 그만 숨어있고 빨리 빨리 나와라.’
* * *
한편, 아차산 인근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짝 몸을 낮춘 채 천호대교와 광진교를 넘어 진군하고 있는 탐색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진짜로 다리를 건넜어?”
강 건너에서 벌어진 화려한 불꽃놀이는 그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몇 시간 째 이어진 포성은 그들에게 강렬한 호기심과 걱정,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결국 가장 전투력이 뛰어나고 능력치가 높은 사람들이 자원해서 정찰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니까.
“대체 뭐야, 단순한 싸움이 아닌 거야?”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은데.”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강 건너에 도열해 있는 포병대.
다리를 틀어막은 채 변이체들을 상대하는 방패조.
끝도 없이 불을 뿜어대는 소총들까지.
“아니, 저거 군부대잖아. 왜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몰려오는 건데?”
“그건 모르지.”
한 가지 의문은, 그들이 군부대가 밀집되어 있는 경기 북부가 아니라 남쪽에서부터 올라왔다는 사실이었다.
“이야······. 무지막지하게 잘 싸우는데?”
“버티는 게 아니라 계속 전선을 밀어 올리고 있어.”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의문의 군대의 진군 속도였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진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으니까.
“잠깐, 가만 보니까 강남이랑 다른 쪽도 좀비들이 안 보이는데?”
“정말······. 큰놈도 안 보이네.”
큰놈. 잠실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괴물에게 그들이 붙여준 별칭이었다.
마천루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그 괴수는 줄곧 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가장 큰 위협이었다.
처음에 그놈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는 여느 때처럼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만한 크기의 괴수를 쓰러뜨릴 인간 따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투는, 그 믿을 수 없는 추측이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 우린 어떻게 하지?”
그때, 유달리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의문의 군대는 강북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어도 언제 구리와 남양주로 넘어올지 모르던 괴물들을 말끔히 정리해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상황을 관망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아?”
뒷일이 걱정된 키 작은 사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미쳤어?”
“저길 가자고?”
“잘 생각해 봐, 강남에서 강북으로 포를 쏴가면서 진격할 정도라고. 조만간 이쪽으로 넘어오지 말라는 법 있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자리에는 잠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넘어오면 싸워야지.”
누군가가 날 선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곧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미친놈, 제정신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야.”
“그럼 뭐, 우리가 여기서 우르르 몰려가면 저기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것 같냐?”
하지만 사내는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았다.
“저놈들이 그 새끼들이랑 똑같으면? 또 도와주러 갔다가 독박 쓰고 싶어?”
사내는 생각만 해도 역겹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포칼립스가 열린 지 열 달.
그들 역시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생존자들이었다.
상대가 강해 보인다고, 혹은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고 냉큼 달려가는 건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는 경험이 많았다.
어떤 이유든, 어떤 상황이든, 새로운 무리가 나타나면 일단 경계하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차라리 가만히 구경하다가······.”
바로 그때, 한마디 말도 없이 신중한 표정으로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던 대머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움직여야 돼.”
“뭐?”
“움직여야 한다고.”
“여태 뭐 들었어.”
이어지는 동료들의 말에, 대머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사람들은 그놈들하고 달라. 지금이 기회야.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