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50화 (350/508)

재건 (8)

사람들이 대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마지막 종말의 씨앗을 파괴한 뒤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잠깐, 대식 씨 어딨어?”

“어?”

승리의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던 조장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여기는 케인, 고기러버 응답바란다. 여기는 케인······.”

이에 주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전기를 꺼내 대식을 호출했다.

지금 대식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강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능력치와 포인트를 동료들에게 양보했다고는 해도, 그 역시 가만히 놀고먹은 건 아니었으니까.

이제는 자신도 보스 몬스터만 만나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판에, 다른 사람도 아닌 대식이 변고를 당했을 리가 없었다.

- 칙, 치이익.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전기에서는 잡음만이 흘러나올 뿐,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기 러버, 고기 러버.”

반복해서 대식의 콜싸인을 호출하는 주훈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순간 자리에 불길한 적막이 깔렸다.

“설마······.”

누군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떼자, 곁에 있던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다 멀쩡한데 대식 씨가 당했겠어?”

“그건 그렇지만······.”

“그럼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연락이 끊긴 건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팔을 흔들며 주훈에게로 달려왔다.

“주훈 씨, 주훈 씨!”

그의 손에는 대식이 남긴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이거······.”

쪽지를 펼친 주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건넨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 내일 아침까지 복귀할 테니까 찾지 마.

쪽지의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 * *

“허허허허, 그려서 진짜로 쪽지만 남기고 온 겨?”

아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배를 부여잡은 채 낄낄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제가 죽은 줄 알고 찾아다니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긴, 세상이 워낙 험하니께. 아니, 이제 험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구먼.”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 죽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반면 지혁은 그게 가당키나 하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어찌 됐든, 괜히 걱정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다들 돌아가서 쉬어야지. 나 때문에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말을 마친 대식은 입맛을 다시며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재, 여기 정말 광어 나옵니까?”

“허, 참. 지금 나를 의심하는겨? 여태까지 줄곧 자네를 보필해 온 자네 오른팔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계속 망둥이만 걸렸잖습니까.”

파란색 물통을 바라보는 대식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소위 ‘바께스’라고 부르는 새파란 물통 속에서는 아재가 낚은 다섯 마리의 망둥이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에이, 광어가 바로 그렇게 탁 잡히나. 망둥어는 매운탕 국물 내는 데 쓰면 되니께 급하게 굴지 말어.”

아재는 타박하듯 대식을 나무라며 또다시 낚싯줄을 던졌다.

“그런데 아저씨, 낚시를 제법 잘하시네요?”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능숙해 보이는 아재의 동작에, 지혁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감탄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이, 낚시, 바둑, 당구. 요 세 개는 나 같은 한량들한테는 기본 소양이지.”

“세대 차가 느껴지는 발언이군요.”

“어어? 자네는 나랑 얼마 차이도 안 나.”

“정말입니까?”

그렇게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낚싯바늘이 흔들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지혁이 너 진짜 회도 뜰 줄 아냐?”

대식이 조금 불안한 듯 질문을 던지자, 지혁이 입술을 샐쭉 내밀며 툴툴거렸다.

“형님, 전공은 아니어도 할 줄은 압니다. 절 뭘로 보시고. 어중간하게 취미로 낚시 다니는 아저씨들보다는 훨씬 잘한다니까요. 매운탕도 끓일 줄 아니까 걱정 탁 붙들어 매십쇼.”

바로 그때, 입질이 온 것을 확인한 아재가 얼른 낚싯줄을 감기 시작했다.

“걸렸다, 걸렸어! 이번껀 묵직허구먼!”

* * *

“누나, 찾았어요.”

같은 시각. 윤호가 혜나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래? 어디 있어?”

혜나의 물음에, 윤호는 한참이나 망설이며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바닷가요.”

“바닷가?”

“네, 아재랑 지혁이 형도 거기 같이 있나 봐요.”

대식이 쪽지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혜나는 곧바로 윤호를 시켜 그를 찾았다.

사라진 게 대식 하나뿐이었다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재에 지혁까지 같이 사라졌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호에게 정찰을 시켜 본 그녀였다.

“그래? 다행이네.”

세 사람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혜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마음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제 막 싸움이 끝났는데, 뒷수습도 내팽개치고 바닷가려 달려가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근데 왜 거기에 있어? 그것도 셋이서만.”

“글쎄요······.”

그렇게 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철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 가지 추측을 제기했다.

“······. 회 아닐까요?”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인원이 다 먹을 생선을 구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몰래 빠져나가서 회 먹으려고······.”

순간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오늘 같은 날 모든 걸 뒤로 제쳐두고 회를 먹기 위해 종적을 감추다니, 상식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동료들과 함께 기쁨의 술잔을 나누고, 일장연설이라도 늘어놓으며 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가 대식이라면······.

“아저씨라면 낚시도 잘하지 않을까요? 회나 매운탕 만들 때 필요한 도구도 다 인벤토리에 넣어서 이동할 수 있고.”

이어서 윤호가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어?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부터 주섬주섬 뭐 챙기고 돌아다니시는 것 같던데요. 낚시 도구 파는 곳도 들리셨던 것 같고······.”

이에 철준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손뼉을 탁치며 자신이 본 것을 증언했다.

“그럼 지혁이는······.”

“회도 일식이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돈가스 말고 다른 것도 이것저것 잘하던데.”

“······.”

하나 하나 증언이 얹어질 때마다, 철준이 제기한 말도 안 되는 의혹(?)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저······.”

그때, 유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회 좋아하는데······. 사실 고기보다는 생선 좋아하거든요.”

그러자 주훈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있던 동료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잠입해서 상황을 좀 살펴볼게.”

“설마······. 대식 오빠한테 먹을 걸 뺏으려고요?”

“······. 주훈 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요.”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일단 상황을 살펴보겠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주훈의 말에, 혜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우며 전략(?)을 제시했다.

“잘못하면 진짜 사달 나니까, 든든한 사람들로 조를 좀 짜보죠.”

“그럼 일단 민호 씨랑 형섭 씨는 있어야겠네요.”

그렇게 대식이 모르는 사이, 그의 회를 빼앗기 위한 특공대가 조직됐다.

* * *

“이야, 이거 제법 큰데요?”

“거봐, 내가 여기 광어 나온다고 했잖여.”

두 번째 광어를 낚은 아재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망둥어만 헤엄치던 파란색 물통에는 어느새 제법 커다란 광어 두 마리가 담겨 있었다.

“훗, 드디어 제 솜씨를 보일 차례가 왔군요.”

오른팔이 고기를 낚고, 왼팔이 요리를 한다.

이 그린 듯 완벽한 상황에, 지혁의 입가에 특유의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아저씨, 칼을.”

간만에 활약할 찬스를 잡은 지혁은 팔뚝을 걷어붙이며 아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재가 칼을 내미는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것을 낚아챘다.

“어?”

“응?”

“잉?”

회를 먹기 위해 몰래 빠져나온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렇게 변했다.

“······.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익숙한 얼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주훈을 발견한 대식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야, 진짜로 자기들끼리 회 먹으러 빠져나온 거였어!”

뒤이어 혜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식의 귓등을 때렸다.

“진짜 너무하네, 너무해!”

“같이 좀 먹읍시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 정도는 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원망의 말에, 대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혜나와 유경, 민호와 형섭을 비롯해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함께해 온 동료들이 서 있었다.

“아니, 뒷정리할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대식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꾸하자, 혜나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걸 저희한테 맡기고 혼자 회를 드시겠다?”

“혼자는 아닙니다.”

“이 뻔뻔한 인간이!”

“그럼 이렇게 하죠. 저도 낚시는 좀 하니까 잡어라도 몇 마리 더 잡아서 나눠 먹는 걸로.”

“민호 씨 낚시도 할 줄 알아요?”

“아버지 따라서 좀 다녔습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소란을 피우는 동료들의 모습에, 대식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 그럼 낚싯대 하나씩들 가져가. 고기 못 잡는 사람은 회도 없는 겨.”

“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어허, 입이 늘어났잖여.”

“서운하네 정말······.”

반면 혜나는 의욕으로 눈을 불태우며 낚싯대를 붙잡았다.

“하! 좋아요, 내가 코를 납작하게 해주죠! 두고 봐라, 나한테 횟감 하나만 더 달라고 빌게 해줄 테니까!”

“누님,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있던 물고기도 다 도망갑니다.”

“뭐!?”

“그건 그렇죠.”

“이 인간들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그렇게 소란속에서 밤은 깊어갔고,

“우와! 진짜로 잡았어!”

“이거 돔 아니에요?”

“우럭이여.”

“돔이라고 해줘요.”

“우럭이여.”

“저도 잡았어요!”

“그건 매운탕 거리로도 못 쓸 것 같은디······. 어떻게 바다에서 송사리를 잡은겨?”

시원하다 못해 조금은 쌀쌀한 늦가을의 바닷가에서는 밤새도록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쁘지 않네.’

얼큰한 매운탕 국물을 안주삼아 소주를 털어넣는 대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엔딩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전의 엔딩은 너무 쓸쓸했으니까.

* * *

3년 후, 정카츠.

“형님, 또 왔습니다, 또!”

“이런 x발!”

여유롭게 육즙 가득한 치즈 돈가스를 맛보던 대식의 입에서 미처 억누르지 못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앞에는 네 개, 세 개, 두 개, 도합 아홉 개의 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허허, 대식이.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나?”

이제는 4성 장군이 된 승덕이 짐짓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식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진짜······.”

대식은 차마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하고 치즈 돈가스를 우물거리며 상대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부산을 정리하고 배를 띄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주도를 시작으로 사람이 사는 작은 섬들을 돌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수복하고,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 미군을 도운 후에 얼마 전에는 동남아와 인도 북부까지.

그것이 한국이 평화를 되찾은 후 대식의 여정이었다.

말이 좋아 3년이지, 한국에 가만히 붙어있던 시간은 채 1년을 넘지 못했다.

“아니, 미군이랑 포드 그 영감은 대체 뭐 하고 있는데 자꾸 날 찾아옵니까! 세상은 미군이 지켜야지! 내가 그러라고 미군 키워준 건데!”

“미군도 다 열심히 하고 있지, 하고는 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남의 나라에 비행기 띄워서 민간인이 남아있는 곳에 폭격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승덕에 이어 태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협조 부탁하네. 자네 덕에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지고 있는지 알지 않는가.”

그의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었다.

무너진 생산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자원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덕분에 세계 각국은 사회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첨단 병기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유능한 이능력자들을 앞세워 사회를 재건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식은 자의든 타의든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괴물 사냥꾼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아오, 이 빌어먹을 군바리들! 내가 그때 다 죽게 놔뒀어야 하는데······!”

“허허, 그래도 함께 사지를 뚫고 나온 전우가 아닌가.”

“전우는 개뿔!”

대식이 매정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하자, 승덕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 와중에도 치즈 돈가스는 남기지 않은 대식이었다.

“후······.”

잠시 고민하던 승덕은 긴 한숨을 내쉬며 뒤쪽에 서있던 동학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줬다.

대령에서 2계급 특진해 이제는 소장이 된 동학은 얼른 준비해온 아이스 박스를 열었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대식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거······.”

“그래, 연어네.”

상대의 눈이 식탐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한 승덕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옛날에는 전 세계 연어 생산량의 80%가 노르웨이와 칠레에서 나왔었지. 연어 맛본 지 좀 오래되지 않았나?”

대식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태호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받았다.

“얼마 전에 차원석 의원이 연어를 보내주셨다고 들었네. 아주 좋아했다고 하던데.”

이어지는 태호의 말에, 대식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오해는 말게. 우리가 물어본 거야. 차원석 의원은 이 일이랑 무관하니까.”

상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확인한 태호가 신호를 보내자, 동학은 얼른 아이스 박스의 뚜껑을 덮어 대식의 발아래에 내려놓았다.

“지금 미군이 노르웨이 오슬로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약간 어려움이 있네. 딱 일주일 정도만 출장을 가주면 그 후로는 평생 언제든 연어를 맛볼 수 있어.”

말을 마친 승덕은 굳이 보채지 않고 가만히 대식의 답을 기다렸다.

“후······.”

대식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주일, 일주일과 평생 먹을 연어.

연어 덮밥, 연어회, 연어초밥, 연어 스테이크.

연어를 활용한 온갖 요리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지금은 국회의원을 넘어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원석이 보내준 연어의 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젠장, 괜히 먹었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일단 맛을 보니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지혁아, 연어 덮밥도 메뉴에 넣자.”

“좋죠.”

지혁은 싱긋 웃으며 곧장 답을 내놓았다.

“짐 싸라, 아저씨한테도 연락 넣고. 일주일만 갔다 오자.”

- 본편 (完) -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너의 이름은

‘허······. 여기도 참 오랜만이구먼.’

중년의 사내는 약간의 웃음기와 회한이 어린 얼굴로 선반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냈다.

13년. 그것이 이 낡고 작은 철물점에서 그가 보낸 세월이었다.

고작 1년을 떠나있었을 뿐인데, 13년을 머무르던 이 작은 공간이 유달리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사이에 자신이 많이 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아재는 생각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이 손바닥만 한 철물점으로 출근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진열하고, 종종 출장 수리를 나가고, 손님도 없고 일도 없는 날이면 홀로 가게에 앉아 웹소설을 보던.

조금은 초라하고, 그보다 조금은 더 외롭고, 씁쓸함은 잦고 달콤함은 드문, 그것이 아재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가 열린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진 건 세상뿐이 아니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의 모험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으니까.

“허이고······.”

낯선 듯 익숙한 의자 위에 쌓인 먼지를 대충 치워낸 아재는 아껴뒀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오늘은 그가 이곳을 떠난 지 꼬박 1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대식이는 몇 년이나 이곳을 떠나있었던 걸까.

처음 이쪽으로 돌아왔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아재의 머리를 스쳤다.

“후우······.”

먼지 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중년의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철물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미닫이문을 밀자, 문은 열리지 않고 대신 ‘탁, 탁’하는 소리만 울렸다.

“에잉.”

아재는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어 낡은 문을 왼쪽으로 밀었다.

낡아빠진 미닫이문은 그제야 덜걱거리며 그 안의 공간을 드러냈다.

전기 포트와 잡다한 도구 몇 개.

그리고······. 낡은 앨범.

아재는 말없이 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오래된 앨범을 펼쳤다.

“허허.”

앨범 속에 담긴 사진을 본 아재의 얼굴에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따스하고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나 왔어.”

어느새 오십이 다 되어가는 사내의 얼굴에 걸린 미소에는 약간의 그리움이 맺혀있었다.

챙기면 보지 않을 자신이 없어 이곳에 두고 간 앨범 속에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는 아내의 사진이 한 가득 들어있었다.

조금 슬퍼하고, 많이 웃고, 가능하면 늦게 따라와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던 오래된 약속을,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할 얘기는 잔뜩 생겼구먼.”

자신이 대식을 만나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주면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 예쁜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들어주리라.

“아저씨?”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철물점 안에 울려 퍼졌다.

“어, 어어. 웬일이여?”

고개를 돌려보자, 젊은 사내 하나가 아재의 눈동자에 들어찼다.

“잠깐 들린다고 하시더니 한참 안 오시길래요.”

이어지는 주훈의 말에, 아재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아내 얼굴을 본 탓일까.

반가운 마음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뭐여?”

“돈까스 김치 나베랍니다.”

“허이구, 또 호사스럽게 준비혔구먼. 재료는 다 어디서 났대.”

“여기저기서 선물 겸 받은 게 많아서요.”

“그려, 그럼 얼른 가야제. 지혁이 서운해할라.”

잠시 추억에 잠겨있던 아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새장가는 안 들었지만 새 가족은 생겼다고, 이제 혼자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퍽 솜씨가 좋은 놈이 밥을 해준다고, 아내에게 해줄 이야기가 하나 더 늘었다.

* * *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세이프 하우스로 사용하던 신축 빌라의 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아재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셨네.”

“빨리 오세요.”

방 안에는 대식과 지혁, 혜나와 원석을 비롯한 그의 새로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뭘 또 늙다리 기다린다고 숟가락들을 안 들고 있었대.”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다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해야죠. 저희끼리 먹으면 정 없지 않습니까.”

아재가 나타나자, 오랜만에 회식 자리에 참석한 원석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허, 그거야 그렇지.”

원석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은 아재는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어느새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게 더 익숙해져 버렸다.

어쩌면 그것은 아포칼립스가 아재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일지도 몰랐다.

“크······. 역시 지혁이구먼.”

첫술을 뜨기 무섭게 아재의 입에서 구수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훗······. 아저씨, 그거 아십니까?”

아재의 반응을 확인한 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엉? 뭘?”

“이제 평화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새 시대가 오면 권력 교체가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뭐시여?”

“이제 제가 오른팔이 될 날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혁의 실없는 농담에, 아재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내용인지 관심도 없으면서 그저 적막이 싫어 틀어놓던 티비의 소음을 대신하기에는 썩 재미있는 농이었다.

“훗, 저를 너무 쉽게 보시는군요. 언제나 그렇게 방심하다가 당하는 법입니다.”

“어이구, 그려.”

그렇게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서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주훈이 아재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저씨, 아까 전에 뭘 챙기신 겁니까?”

아재가 철물점에 돌아온 건 1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챙길만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무언가 의미가 있는 물건일 터였다.

“아아, 우리 마누라 사진 있는 앨범.”

아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베에 든 돈가스 한 점을 집어 먹으며 답했다.

반면 주훈은 무언가 중요한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1년 사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족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1년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잊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주훈이 눈을 내리깔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아재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아니여! 우리 와이프는 진즉에 먼저 갔어. 나는 홀애비 된 지 꽤 됐고.”

이어지는 아재의 말에, 혜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저씨 결혼하셨었어요?”

“그럼 뭐 이 나이 먹도록 혼자였을까 봐?”

“아, 아니 한 번도 그런 말씀을 안 하셔서······.”

“나 같은 매력남이 여태 장가도 못 갔을 리가 있나.”

그리고 아재의 말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생각해보면 아재는 대식 못지않게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것저것 재주도 많고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은데, 과거는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아저씨, 대체 뭐 하던 분이에요?”

결국 이번에도 호기심 많은 혜나가 물꼬를 텄다.

“뭐 하긴, 철물점 주인이지.”

“진짜 그게 다예요?”

“그게 다지.”

“그럼 왜 그렇게 똑똑하세요?”

“똑똑? 똑똑은 무슨, 그냥 할 일 없는 홀애비라 맨날 놈팽이들 만나 놀러 다니고, 어디 갈 때마다 이래저래 주서들은 거 많고 맨날 웹소설 보고 티비 보고 그래서 그려.”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듯 아닌 듯 애매한 대사에, 혜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본다고 사람이 그렇게 똑똑해져요?”

“이거 공부만 하던 양반이라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모르는구먼.”

그때, 대식이 혜나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정말 눈치가 빠르시긴 하죠.”

대식의 한마디에, 아재는 피식 웃으며 대뜸 낚시바늘을 던졌다.

“그려?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니까 오른팔 아닙니까.”

“다른 쪽 놈들이랑 비교혀도?”

아재의 질문은 얼핏 맥락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식이 회귀자나 귀환자 둘 중 하나라는 이야기는 탐색조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주인공은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마음조차 없어 보였으니까.

“그럴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내놓았다.

“네? 다른 쪽이요? 국정원?”

물론 학업에 매진하느라 그런 쪽 상상력은 씨가 말라버린 사람도 하나 있었지만.

“어뗘? 이제 플래그 세울 일도 없는 것 같은디, 자네 과거 얘기도 좀 풀어 보는 게? 이야기로 치자면 지금이 외전쯤일 텐디, 원래 외전은 다 그런 거잖여.”

혜나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아재는 착실하게 이야기의 진도를 뺐다.

“음······.”

이에 대식은 조금 애매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훑어봤다.

“얘기한다고 믿기나 하시겠습니까?”

“형님, 저는 믿습니다.”

“저도 이제는 믿을 거 같은데요.”

“에이, 초능력에 상태창도 생기는 판에 무슨 얘기인들 못 믿겠어요.”

그렇게 호기심의 대상은 어느새 아재에서 대식으로 옮겨가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뀐 것을 눈치챈 대식은 피식 웃으며 반격을 가했다.

“왜 이야기의 시작은 아저씨인데, 결론이 이렇게 납니까?”

그러자 아재는 못 당하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허, 으허허허! 역시 귀신같구먼.”

그렇게 한참을 웃던 아재는 돌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식을 바라봤다.

“그럼 내 얘기해주면, 자네 얘기도 해주는겨?”

“이걸 그런 식으로 딜을 겁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겨.”

“뭐, 그렇게 하죠.”

대식은 시원하게 아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역시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한 번쯤 얘기하고 싶었으니까.

“대신, 아재가 먼접니다.”

대식이 다시 화살을 아재에게 돌리자, 지혁은 기다렸다는 듯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이름! 이름!”

“이름이 아니라 성함.”

“아, 그렇네. 성함, 성함!”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아재를 바라봤다.

아재의 이름이나 정체는 대식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그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화제였으니까.

“흠, 흠. 거참······.”

가볍게 헛기침을 한 아재는 픽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김철수여.”

“네?”

“철수 영희할 때 그 철수요?”

“그려, 성도 하필이면 김이고.”

아재는 빙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난 내 이름 싫어혔어. 성의 없잖여. 성도 김 씨인데 이름까지 철수면 너무 평범하기도 허고. 원래 어릴 때는 그런 거 싫어하잖여. 난 그게 좀 오래갔지.”

첫째는 일남이, 둘째는 이남이, 막내는 말자, 뭐 그런 이름보다는 낫지만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지 않느냐. 그것이 아재의 말이었다.

“뭐 인생도 평범혔지.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않어, 운동을 잘하지도 않어, 얼굴 반반한 거랑 붙임성 좋은 거 말고는 하등 쓸데가 없었거든.”

“얼굴이······. 반반해요?”

“그거 정말입니까?”

“어허! 내가 젊었을 때는 꽃미남이었어.”

믿거나 말거나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아재는 뻔뻔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튼, 뭐 하나 내놓을 거 없는 놈이었지. 그런 주제에 야망은 커 가지고.”

철수라는 평범한 이름, 공부도 운동도 집안도 뭐 하나 빼어난 구석이 없는, 그저 그런 남자.

그게 아재가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 사람들한테 박수도 받고, 돈도 많이 벌고,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고. 근디 인생이 생각처럼 쉽나.”

“얼굴은 잘생기셨었다면서요?”

“그려서 여자들한테는 인기 많았어. 우리 마누라도 대학 때 인기 엄청 많았거든. 판검사들이 청혼했는디도 딱 나한테 와부렀제.”

이 대목에서 아재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앨범을 꺼내 자랑하듯 펼쳤다.

“어? 진짜네?”

“진짜 예쁘신데요?”

“이 정도면 거의 연예인 아니에요?”

아재의 말대로, 그의 부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지금이랑 거의 차이가 없는데요?”

“어떻게 결혼하셨대.”

“어허!”

가볍게 호통을 친 아재는 웃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여하튼······. 우리 마누라 살아있을 때는 나도 제법 주인공 같았제. 그냥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아니, 딱히 주인공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께.”

아재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헤아릴 수 없는 애정과 그리움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런디, 뭐, 그냥 먼저 가부렀어. 뭐가 그리 급했는지.”

말을 마친 아재는 피식 웃으며 빛 바랜 사진을 가볍게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그냥 뭐, 혼자 철물점이나 했제. 외롭고 적적하니께 맨날 소설이나 보면서.”

무대의 중심에서 다시 무대 아래로 내려온 조연, 아니 엑스트라.

그것이 아재가 생각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자신은 끝내 주연은 되지 못했지만, 썩 쓸만한 조연이 되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그것마저도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이렇게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으니 조연이든 엑스트라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어쩌면 인생은 그냥 그런 것이라고.

‘이제야 철이 들었구먼.’

주연이 아니면 어때요.

언젠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 그럼 대식이. 내 얘기는 끝났는디. 자네 얘기는?”

아재, 아니, 철수가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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