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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58화 (358/508)

북으로 (1)

11월 중순.

지긋지긋한 좀비들과의 싸움이 끝난 지도 어언 한 달.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일과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바빠져 있었다.

좀비들을 해치우는 건 집에 붙은 불을 끄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까맣게 타버린 집을 말끔히 치우고, 다시 사람이 살만한 건물을 세워야 하는 시기였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를 재건하는 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몰랐다.

“일단 철원과 경기 북부에서 먼저 수확 작업을 마쳤고, 경기 남부도 거의 수확이 끝났습니다. 도정 작업도 차질없이 계속 진행 중이니 쌀 문제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수확량을 보고 받은 원석은 조금 초조한 듯 입술을 핥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물었다.

“생산량은 얼마나 됩니까?”

“14만 톤 정도 됩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통계치를 되짚어보았다.

‘전년도 경기도 쌀 생산량이 38만 톤이었던가······.’

작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생산량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데, 이 정도라도 해낸 게 어디인가.

게다가 아쉬워한다고 생산량이 늘어날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이 정도 양을 마지노선으로 잡아야겠군. 1인당 연간 양곡 소비량이 65킬로그램 정도였지······.’

다만 올해의 생산량과 기존의 통계를 바탕으로 내년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필요는 있었다.

일 인당 연간 미곡 소비량은 대략 50킬로그램 내외.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쌀 외에도 먹거리가 풍부한 사회였기 때문에 나온 수치였다.

지금은 다른 식재료가 부족하니 단순한 쌀 소비량이 아니라 양곡 소비량으로 계산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공공 비축미 제공하기로 약속한 곳이 어디였죠?”

이어지는 원석의 질문에, 이제는 사실상 그의 비서가 된 홍일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빠르게 목록을 읊어 내려갔다.

“옥천, 진주, 나주, 구미, 포항······.”

연합군의 병력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좀비들을 정리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약을 맺었다.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역, 다양한 사람들이 손을 잡아야 했고, 그 과정을 온전히 신뢰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다른 지역의 식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미곡 창고를 개방하는 것은 탐색조가 맺은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였다.

올해 추수한 햅쌀은 다시 저장하고, 전국의 미곡 창고를 비롯해 다른 곳에 남아있는 식량들을 우선적으로 소비한다.

그렇게 어떻게든 1년을 넘기면 그다음부터는 식량 부족으로 걱정을 할 일은 없을 터였다.

“농장들은요?”

“성장 촉진 능력 가진 분들 전부 수배해서 여기저기 뿌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나 돼지, 닭 등을 키워 줄 능력자와 추자 할머니처럼 농사일에 도움이 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적절히 배분해 전국 단위로 파견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흐아······.”

그렇게 정신없이 이런저런 보고들을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때를 훌쩍 지나있었다.

“원석 씨, 원석 씨!”

하지만 잠시 숨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이 소령이 원석을 찾아왔다.

목소리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상당히 급한 용무가 있어 보이는 태도였다.

“왜 그러십니까?”

“싸움이 났습니다. 빨리 나와 보시죠.”

“싸움이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반쯤 누워있던 원석은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 주민들의 사소한 다툼 따위로 이 소령이 자신을 찾을 일은 없었다.

즉, 이 싸움이 중재가 필요한 제법 중대한 사안이라는 의미였다.

“가보죠.”

* * *

“이런 x부랄 새끼들이, 아주 남의 건물에서 말이야 응?”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원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요, 당신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서 이러는 거야?”

“여기 사람들 없었으면 당신 지금 살아있기나 할 것 같아?”

탐색조의 보호를 받으며 아포칼립스 속에서도 안전한 생활을 영위했던 마을의 주민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장년의 사내와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사내의 요구 사항은 너무나도 뻔뻔하고 어이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후······.”

옅은 한숨을 내쉰 원석은 천천히 머리가 벗겨진 사내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말이야, 돈도 안 내고 내 건물을 무단 점유 해서 살고 있어?”

사내가 마을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대식 빌리지의 건물 중 두 채가 자신의 소유이니, 그곳에 살려면 세를 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10개월은 살았을 테니까, 10개월 치 집세부터 내!”

한술 더 떠, 그는 아예 아포칼립스가 열린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집세를 내놓으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아······.”

원석은 기가 차다는 듯 짧은 숨을 내뱉었다.

좀비들이 사라지자, 재산권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첨예한 것이 바로 부동산의 소유권 문제였다.

실제로 현재 구성된 임시 국회가 가장 중요하게 논의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 역시 바로 부동산에 관련된 것이었고.

“선생님.”

원석은 애써 분노를 눌러 참으며 점잖게 운을 뗐다.

“내가 왜 선생님이야?”

“상황 다 아시잖습니까. 세상이 이런데 사람들이 일단 살고 봐야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가 대책을 마련하고······.”

“하, 이놈들 봐라? 어디서 공짜로 내 집에서 자려고? 임대료를 내라고 임대료를!”

계속되는 호통에, 원석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이 한 번 엎어졌다고 남의 재산을 마구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왔는데, 세상이 평화로워지자마자 덜컥 찾아와 그 기간 동안의 집세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원석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사시는 곳이랑 이름을 좀 알려주십시오. 곧 서류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원석의 답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원석 씨, 말이 됩니까!”

“무슨 서류를 보내줘요!”

“야, 이 새파랗게 어린 노무 새끼가! 나는 건물 없는 줄 알아? 여기 건물 중에 여섯 개가 내 꺼야!”

특히 세상이 평화로운 시절 제법 유명한 알부자였던 황씨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고함을 쳐댔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켜줬더니 이제 와서 집세를 받아? 뭐 이런 호로 잡놈 새끼가 다 있어! 너 이 새끼야, 너, 너 혼자서 살아남았어? 엉?”

그러거나 말거나, 장년의 사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거주지와 이름을 밝혔다.

“곽순동, 수원시 스테이트힐 아파트······.”

상대가 수원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석은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수원은 남하작전 이전부터 함께한 오래된 동맹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평화를 어떻게 얻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수원에 사시는데······. 여길 오셨다고요?”

“왜? 안 돼? 내가 진작부터 벼르고 있었어, 내 건물이 이 동네에만 있는 줄 알아? 앞으로도 내 건물 있는 곳은 싹 돌아다니면서 집세 받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건물이 있는 곳을 모두 돌며 세를 받겠다고 선포했다.

말하는 꼬락서니로 보아 하루이틀 생각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는 거지?’

가만히 상대를 노려보던 원석은 곧바로 무전기를 빼 들었다.

“아, 네. 차원석입니다. 곽순동, 수원시 힐스테이트 아파트 116동. 식량 배급 끊으세요.”

그리고는 곧장 식량 배급을 끊어버리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네?”

무전기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사람이 지금 안양까지 찾아와서 집세 내놓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밀린 10개월치 다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원석이 상황을 설명하자, 무전기에서는 곧장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별 미친······. 알겠습니다. 주민들한테도 전달해 두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원석은 싸늘한 눈으로 순동을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불만 있어?”

“뭐, 뭐가 어째!? 이, 이 도둑놈이!”

“당신 아가리로 들어가는 음식, 전부 젊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워서 지킨 논밭에서 나온 거야. 이 와중에도 안전하게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기어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른 사람들이 목숨 걸고 좀비를 처리해 줬기 때문이고.”

원석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마을 주민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 개새끼야, 수원이면 탐색조 사람들 덕분에 전쟁 피한 곳이잖아!”

“서수원에서 무사히 농사 지어서 추수한 게 누구 덕인데!”

“우리가 너희한테 보호비 달라고 했냐!”

“도움받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이 뻔뻔한 새끼야!”

말문이 막힌 선동은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하, 됐어! 일단 돈이나 내놔, 그깟 식량 얼마나 한다고!”

“걱정 마, 법에 따라서 절차를 밟을 거니까.”

역겹다는 듯 한마디를 쏘아붙인 원석은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지금 임시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률 내용을 알려주지.”

“뭐?”

“당신이 말한 무단 점유를 긴급 재난 상황에 의한 대피로 간주, 임대료는 지불하지 않게 될 거야. 다만 집에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고, 거주자가 책임이 있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수리비를 부담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원석은 이를 악물며 법안의 내용을 읊어줬다.

“그리고······. 건물주가 이미 사망하거나 소유주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국고로 환수해서 생존자들의 거주지로 쓰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어.”

그 순간, 선동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건물주가 사망한 경우’라는 말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그거 협박이야?”

“아니, 그냥 알려주는 거야. 돈을 받더라도 몇 달은 지나야 할 거고, 그마저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그때까지 배급해주는 식량 없이 어떻게 살아남나 한번 보자고.”

* * *

결국 선동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난 후에야 수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 어이없는 놈. 뭐 저런 뻔뻔한 새끼가 다 있지?”

“아니 식량은 공짜로 받아먹으면서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한테 집세 내놓으라고 하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래도 원석 씨가 잘 해결했네.”

“그러게, 대통령감이야, 대통령감.”

“그런데 대통령은 살아있대?”

사람들의 칭찬에, 원석은 머쓱하게 웃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해결이랄 것도 없죠.”

딱히 민망해서 내뱉은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자신이 문제를 잘 해결한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좀비를 치웠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터져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자의반 타의반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에휴, 아니야, 이번 기회에 끊어야지.’

바로 그때, 마을 어귀에 군용 차량 한 대가 멈춰섰다.

이어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차에서 내려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어, 장군님, 오랜만입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승덕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식이 있나?”

“아뇨, 윤호랑 같이 사냥 갔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대식이 마을에 없다는 소식을 접한 승덕은 초조한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원석은 조심스럽게 승덕에게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북쪽에서 일이 터졌어, 대식이에게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북쪽이요? 그곳은 군인들이 정리한 거 아니었습니까?”

원석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경기 북부는 군인들끼리 한 차례 내홍을 치른 뒤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심지어 철원과 포천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까지 성공적으로 마칠 정도로 안정을 되찾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승덕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북쪽.”

“네? 철원보다 더 북쪽이요?”

승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그래, 북한에서 일이 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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