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 (1)
대식이 말을 마치는 순간, 포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거였군······.’
지금 대식은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대식은 앞으로 그들이 얻게 될 온갖 자원에 대해 일정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인력을 동원하는 것도 가능했고, 그 땅에서 나는 자원이나 식량 등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 당장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현명한 방식이었다.
당장 올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금은 작은 요구도 부담스럽고 버거웠지만, 남한의 지원을 받은 내년에는 그 열 배를 요구해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 투자 방식을 휴전선 너머 북쪽 전체로 확대한다면······.
‘정말이지 굉장하군.’
이 과감한 투자의 가치를 어림잡아 계산해 본 포드의 몸이 흥분으로 가볍게 떨렸다.
농지에 지하자원, 그리고 연해주, 만주와 접경해 있는 지역의 지배권까지······. 지금 대식이 뿌린 씨앗은 수십, 어쩌면 수백 배가 되어 돌아올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민감한 사안이니, 다른 주민분들과 상의하고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대식은 포드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개성의 주민들에게 논의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 * *
그날 저녁.
“네, 네.”
대식과 무전을 마친 원석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사자는커녕 부상자도 없고, 고작 하루 만에 개성 수복이 끝났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북진통일의 명분을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개성 주민들의 의견이 곧 북한 전체의 의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단 다른 도시로 진출할 명분을 얻었으니, 이런 방식으로 하나하나 다른 도시들을 수복해 나간다면 조만간 북한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역시 대식 씨는 대단하군.’
대식은 언제나 그렇듯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다.
“그럼 가죠.”
“네.”
가볍게 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한 원석은 홍일과 함께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문기를 비롯해 미리 이곳에 와있던 몇몇 의원들이 대화를 중단하고 원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문기의 질문에, 원석은 짤막하게 개성의 상황을 브리핑했다.
“개성 지역의 중국인 약탈자들을 제압, 이백 명 이상을 포로로 잡고 개성 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고작 하루 만에요?”
자리에 있던 대여섯 명의 의원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상반되는 표정이 떠올랐다.
‘젠장, 이건 상상 이상이잖아.’
‘역시 소문이 헛것이 아니었나 보군.’
대식의 능력을 의심하고 그를 고깝게 생각하던 종철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그리고 어떻게든 대식의 기분을 맞춰주며 조건을 조율하려 애썼던 문기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원석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와중에도 그 둘은 패를 갈라 파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벌 싸움은, 평화로운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아마 제가 개성을 수복하고 나면 탐색조와 저희를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확실하게 파벌이 나뉠 겁니다.」
모든 게 대식의 말대로였다.
「대통령은 공석이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현재 한국 내에서 가장 확실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저와 탐색조니까요.」
「설마 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을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못 할 것도 없죠. 게다가 저희는 미군과도 친분이 있으니까요. 미국과 끈이 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데다가 확실한 무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런 집단과 손을 잡으면 대권으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 아니겠습니까? 정 아니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도 그만이고요.」
「······. 까딱하면 우리가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려는 놈들의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건가?」
승덕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땡기십니까?」
「자네는 날 뭘로 보고······!」
「장군님은 믿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군인 중에는 가장 군인답더군요.」
「아, 그래? 허허허, 그렇지?」
대식의 칭찬에 승덕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다른 군인들도 모두 그럴까요?」
그러나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질문에,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한국의 사회 재건은 임시 국회와 군, 이 두 조직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중에 주도권을 쥐는 사람이 나올 거고, 주도권을 뺏긴 사람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대식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놈들한테 일을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게다가 좋든 싫든 가만히 있으면 그 자체로 위험해질 겁니다. 이미 저희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고, 확실한 무력까지 손에 가지고 있으니까요.」
권력자란 민심과 무력을 동시에 손에 가지고 있는 존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무슨 수를 써서든 이쪽을 포섭하려 들 테고, 그것이 실패하면 견제하거나 제거하려고 할 거다.
그것이 대식의 첨언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과거를 알고 있는 원석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절대 섣부른 추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직접······.」
「아뇨, 전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쪽에 확실한 우리 사람 하나 정도는 심어 놓고 싶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직접 그 판에서 선수로 뛰는 사람이 하나 있는 게 가장 좋으니까요. 아포칼립스가 수습되고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려서 동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말을 마친 대식은 승덕과 원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군부에는 이미 장군님과 특공 연대장님, 51사단장님에 한미연합군 사령관까지 있으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시 국회에도 저희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저다······. 그런 이야기입니까?」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마을을 관리한 건 원석씨니까요. 제가 밖으로 나도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문제없이 생활하고 저희를 지원해 줄 수 있었던 것도 원석 씨 공이 컸고요. 어쩌면 마을에 있던 분들에게는 저보다 원석 씨가 더 가깝게 느껴질지도 모르죠.」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정치같은 건 꿈도 꿔본 적이 없는 삶이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대식 빌리지의 관리자로, 또 연합의 주요 인사로 1년을 보내온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만히 손 놓고 일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뛰어들어 흐름을 만든다.
지금의 그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이었다.
「······. 해보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네. 뭐죠?」
「회식에는 끼워 주십시오.」
「그럼 뺄까 봐요?」
「정치인이라고 나중에 왕따시키기 없습니다.」
「그건 하는 거 봐야죠.」
「······. 전 오래 살고 싶은데요.」
북으로 떠나기 전 대식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원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북진을 계속할 명분은 확실히 손에 넣었습니다. 원한다면 더 북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은데요.”
이어서 원석은 능숙하게 돌을 던졌다.
물살의 흐름을 가만히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흐름을 만드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이니까.
* * *
한편, 개성에서는 식사를 마친 대식이 중국인들과 면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 원래는 어부였소. -
“어부?”
- 그래, 황해에서 물고기를 잡았지. -
“그래서 중국의 상황이 나쁘다는 걸 깨닫자마자 바다를 건너서 북으로 왔다?”
자신의 예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음을 확인한 대식은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 여기는 그래도 사람이 적잖소. 적어도 중국보다는 나으니까. 항로도 이미 알고 있고. -
대륙풍의 풍성한 수염을 가진 사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들이 북한으로 흘러든 경위를 밝혔다.
“여기 있는 놈들이 다 어부는 아닐 거 아니야.”
-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대다수는 배 몰 줄 알거나 황해 쪽에서 조업을 하던 사람을 통해서 이쪽으로 넘어온 거요. -
“개성 쪽 말고 다른 지역에 흘러든 중국 놈들에 대한 정보는?”
이어지는 대식의 질문에, 자오룬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부는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 그런데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
형태는 질문이었지만, 더 이상의 정보를 원한다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나 다름이 없었다.
“이 새끼들, 엄청 뻔뻔한데요?”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지혁은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했다.
“그러게요, 죽기 싫어서 피난을 오는 거면 모를까 남의 나라 쳐들어와서 살인에 약탈까지 해놓고.”
혜나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대식은 얼굴 위로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평소와 똑같이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말투로 한마디를 툭 내뱉을 뿐이었다.
“너희는 개성에서 살 거야. 너희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 뭐? 우리더러 노예가 되라는 건가? -
“왜? 너희가 할 때는 괜찮고, 너희가 당할 때는 너무한 일이 되는 건가?”
- 그럼 나도······. -
그 순간,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자오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서 있는 사내의 눈빛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사람을 많이 죽여본 놈들이야 지겹도록 봐 온 그였다.
위첸이 그랬고, 그의 측근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 사내의 눈빛은 어딘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너 말고도 다른 놈들이 많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뿐이다.
지금 이 사내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치의 감정도 없이, 심지어 겁을 주려는 의도조차 없이.
그 기괴할 정도로 냉정한 태도에, 그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셋 센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대식은 곧바로 허벅지에 차고 있던 비수를 뽑았다.
- 흐, 흑룡회. 흑룡회. -
이에 자오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른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토해냈다.
“흑룡회?”
대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 그, 그래. 산둥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조직이야. -
“조폭이나 삼합회, 뭐 그런 조직인 것 같습니다.”
통역을 맡은 사내의 말을 들은 대식은 다시 자오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맞아?”
- 우리가 더 위쪽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만 머무르는 이유가 그거야. 그놈들은 우리랑 다르다고. -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 황해도 일대는 그놈들 땅이야. 굳이 따지면 우리는 그놈들이 손을 대지 않은 지역에 간신히 발이나 붙이고 살고 있는 거고. -
이어서 자오룬은 대식도 생각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 다른 군소 조직들도 조금 있지만, 기본적으로 황해도는 그놈들 땅이야.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흑룡회 놈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곳에 손을 대면 그놈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