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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71화 (371/508)

마름의 역할 (2)

말을 마친 대식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4시간 정도 남았나······.’

개풍 인근의 중국인 근거지는 이미 말끔히 정리했다.

문제는 서쪽으로 더 깊게 들어가 흑룡방의 본거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예성강을 도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 것은 언제나 큰 위험을 동반했다.

“어떻게 할 텐가?”

그때, 식사를 마친 포드가 대식에게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미군의 4성 장군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대의 장군이니 당연히 도하나 상륙 작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더욱 골치 아픈 건 이 인근의 지형이었다.

“강 건너편에 산이 너무 많아. 이곳에서 도하를 시도하면 어느 쪽으로 가든 적의 눈을 피해 서쪽으로 진격하는 건 불가능하네.”

지도를 펼친 포드는 손가락으로 예성강 서쪽에 위치한 산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북쪽으로는 전지산과 치악산, 남쪽으로는 미라산과 전지산.

그리고 대식이 잡아 온 중국인 포로들의 말에 따르면, 이 산에는 모두 흑룡방의 병력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즉, 이 근방에서는 어디서 도하를 하든 적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포드가 생각한 전략은 크게 세 가지였다.

“지금 바로 진격을 시작해서 단숨에 넘어가는 게 어떤가?”

지금 대식은 완벽하게 적의 연락망을 끊으며 이동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최대한 신속하게 강을 넘어간다면 눈은 피하지 못해도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도하를 완료할 수 있었다.

“아뇨, 그럼 적의 본진까지 모조리 힘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포도 아깝고, 일이 잘못 흘러가면 북한 주민들까지 죽이면서 진군해야 할 가능성도 너무 크고요.”

하지만 대식은 인명 피해가 커질 거라는 이유로 첫 번째 전략을 기각했다.

“황해도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그 위로 갈 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북한 주민들 눈에 저희는 단순한 침략자로 보일 뿐이에요.”

대식이 제시한 근거는 너무나 합리적이었다.

이 분단국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서로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서로를 남보다는 낫고, 또 어떤 때는 남보다도 미운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남한 사람들의 편에 설만큼 아주 살갑지는 않은 사이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북한의 주민들이 중국 놈들 편에 선다면 연합군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대충 지형만 그려진 지도에 의지해 이 낯선 땅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야 했다.

대식의 의견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포드는 빠르게 두 번째 전략을 제시했다.

“그럼 적들의 보초를 피해 우회하는 건?”

하지만 대식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근거 역시 명확했다.

“그럼 위쪽으로 10킬로미터는 돌아가야 합니다. 어찌어찌 우회에 성공한다 해도 보급로도 그만큼 길어질 테고요. 적이 보급로를 공격할 걸 상정하면 그 이상으로 보급로가 늘어질 겁니다. 이건 기름이 너무 아깝죠.”

“음······.”

포드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대식이 생각한 것을 미군의 장성인 그가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회를 2안으로 한 것은, 3안이 너무나 도박성이 짙은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역시 자네와 리가 산으로 들어가 보초병을 제거하려는 건가?”

질문을 던지는 포드의 눈에는 약간의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묻어났다.

확실히 대식과 주훈, 윤호와 유경 등은 이런 작전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대식이 직접 그들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간다면 적의 눈을 피해 조용히 보초병들을 솎아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장군이랍시고 그런 걸 전략이라고 내놓는 게 스스로도 조금 한심하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자원을 아낄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식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대식은 그렇게 말하며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이 14시, 저놈들이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다는 시간이 18시입니다. 산 네 개를 돌면서 보초병을 전부 찾아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죠.”

시간이 부족하다는 대답에, 포드는 저도 모르게 뒤통수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걸 알면서 여기서 한가롭게 먹방이나 찍고 있었단 말이야?’하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대감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뭔가 다른 수단이 있는 거군?”

‘킴’은 유능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늘 자신보다도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여태 이렇게 느긋하게 굴었다는 건, 틀림없이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다른 방식으로 이 난관을 돌파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없으면 여기서 무찜이나 먹고 있었겠습니까.”

말을 마친 대식은 피식 웃으며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 뭐야. -

-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

- 뭔가 불안한데······. -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수백을 포로로 만든 장본인이 다가오자, 자리에 있던 중국인들의 눈에 공포와 불안이 차올랐다.

혹시 방금 전의 식사가 마지막 만찬은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말을 뒤집고 갑자기 무기를 휘두르는 건 아닐까.

온갖 불안과 걱정이 그들의 마음을 옥죄였다.

“자, 지금부터 부르는 사람들은 다 앞으로 나와.”

이어서 대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든 명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나갔다.

북한의 주민들에게 건네받은 ‘가장 악독한 놈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였다.

“위하오란, 장쉬안, 멍······야오?”

이름이 다섯을 넘어 열에 가까워지자, 자리에 있던 중국인들은 그것이 ‘살생부’임을 직감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같은 중국인이 보기에도 너무할 정도로 북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인물들이었으니까.

- ······. -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장쉬안의 눈에 벌겋게 핏대가 섰다.

저놈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게 분명했다.

죽기 싫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이 먼저 손을 써야 했다.

- 죽어! -

바닥에 있던 돌을 집어 든 장쉬안은 그대로 대식을 향해 돌진했다.

- 퍽!

그와 거의 동시에, 장쉬안의 복부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처박혔다.

- 끅······. -

대식에게 덤벼들었던 침략자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명도, 단말마도, 그 무엇도 없었다.

장쉬안은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자리에 있던 중국인들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바닥에 있는 돌을 치우듯 가벼운 발길질 한 번.

고작 그것으로 사람이 죽었다.

더욱 무서운 건 대식이 발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가 발길질로 장쉬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행동에 담긴 메시지는, 아주 확실하게 전해졌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지금 너희는 이번 선발에서 배제한다는 소리를 하려고 했으니까.”

순간 자리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선발? -

- 무슨 선발? -

- 뭔가 좋은 건가? -

공포와 기대가 범벅이 된 기묘한 감정이 그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장쉬안이 죽은 건 안 된 일이지만, 그를 위해 나서줄 만큼 의리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목숨을 바쳐 이런 괴물과 맞설 만큼 그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 무, 무슨 선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두려움에 떨며 시체가 된 장쉬안을 바라보던 중국인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관리자 선발.”

대식이 내뱉은 짤막한 한마디에, 중국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오룬에게로 향했다.

이 ‘마름’은 대식에게 빨리 줄을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로들 사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밉보이면 밥은 적게 나올 것이고, 일은 고될 것이며,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보내질 터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기회를 잘만 잡으면 자신들도 자오룬과 같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였다.

- 호, 혹시 조건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도 그에 뒤질세라 이 기회를 잡으려 했다.

관리자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자신이 관리자가 되는 것이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이치였다.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 하기 위해, 하루라도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름’ 자리를 원하는 그들의 눈빛을 확인한 대식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할 일을 설명해주지. 이 임무를 잘 완수하면 너희들은 농장이나 탄광으로 가지 않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 * *

몇 시간 후.

예성강 인근에 스물 남짓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에 붉은 천을 두른 스물 하나의 중국인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 건너의 산 위에서는 또다른 중국인들이 쌍안경을 든 채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흑룡방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땅 곳곳에 일종의 ‘연락소’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땅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온갖 자질구레한 사안에 대해 보고를 해야 했다.

- 뭐야, 조금 이른데? -

산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중국인 하나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기 연락 시간인 18시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몇 분 정도 늦고 빠른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한 시간이나 이르게 찾아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 뭔가 일이 생긴 거 아니야? -

- 그럼 비상 연락망을 통해서 연락을 했겠지. -

- 그럼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찾아온 건데? -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보초병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수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늘 오던 놈들이고, 늘 보던 얼굴이다.

- 대체 뭐야. -

보초겸 연락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비탈을 걸어 내려갔다.

-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 저, 그······. 꼭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

개풍역 인근의 농장을 관리하던 타오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뭔데. -

- 남한······. 남한놈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

- 뭐? -

연락병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 남한의 군인과 미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개풍군까지 쳐들어왔습니다······. -

이어지는 타오의 말에,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이라니, 그것도 남한과 미국의 군인이라니.

- 자, 자세히 설명해 봐! -

- 그럼 너희는 왜 살아있는 거야! -

- 이런 머저리 같은 새끼들이, 그럼 바로 연락을 했어야지! -

- 군인이라니, 정규군이라고? -

- 규모는, 무장은? -

욕설과 질문, 힐책의 말들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 잠깐,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얼른 본부에 연락을······. -

너무나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그들의 머리는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켜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 이런 병신 새끼들이, 그럼 너희는 왜 살아서 여기가지 온 거냐고 묻잖아! -

당혹감은 욕설과 의미없는 비난으로 변해 입밖으로 튀어나갔다.

이에 타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손을 들어 강 건너편을 가리켰다.

겨울 놀에 물든 예성강 너머의 들판에는 어느새 소총으로 무장한 수백의 병력과 전차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저 군대를 이끄는 대장이······. 저를 사자로 보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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