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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73화 (373/508)

비정 (2)

* * *

무사히 예성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한 연합군의 병력들은 빠른 속도로 산을 지나 연백평야로 진격했다.

“이거······. 정말 이게 가능한 일인가?”

포드는 불가사의한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두 눈을 껌뻑이며 연신 주위를 훑어보았다.

지금 그들은 문자 그대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진격하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전혀 없을 리는 없었다.

예성강의 서쪽에는 연백평야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한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넓은 평야를 놔두고 굳이 다른 곳에서 농사를 지을 리는 없으니, 이 주위에는 틀림없이 농민들과 이를 관리할 인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와 농지, 그리고 드문드문 몇 호씩 모여있는 낡아빠진 집들뿐이었다.

총을 들고 저항하는 사람은커녕 갑작스러운 군대의 등장에 놀라 달아나는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이 풍경을 바라보던 대식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저도 이 정도로 깔끔하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알았나?”

“뭘 말입니까?”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말이야.”

포드의 질문에, 대식은 덤덤하게 답을 내놓았다.

“사절단이 무사히 돌아왔으니까요.”

하지만 포드는 그게 무슨 답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군님 같으면 자기들끼리도 인간 백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이 대장인데 관리직을 준다고 사절로 가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런데 저놈들은 갔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고요.”

대식의 말대로였다.

사절단은 저우쓰에게 죽을까 두려워하면서도 흑사방의 아지트를 찾아갔다.

이는 타오를 비롯한 중국인들이 차오페이가 그만큼 이성적이며,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거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그 차오페이라는 놈이 뭔가 조치를 취한 거겠죠.”

그리고 이 적막한 평야의 풍경은 차오페이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사인이었다.

자신은 저항할 마음이 없다, 인질을 잡을 마음도 없고, 군대를 모아 대항할 의사도 없다는 명백한 항복 사인.

인질을 잡거나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하기 위한 행동이라면 이곳의 민간인들을 시간 벌이에 써먹거나, 최소한 자신들의 아지트로 불러들여야 했으니까.

이 정도로 명확하게 투항 의사를 보이면서도 직접 백기를 들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그 저우쓰라는 놈은 항복을 원하지 않는 건가.’

저우쓰는 주먹, 차오페이는 두뇌.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저우쓰.

그것이 중국인들이 대식에게 준 정보였다.

그 정보를 기반으로 지금 상황을 분석하면 저우쓰가 항전을 주장하고 차오페이가 그 의견에 동의하는 척 항복 절차를 취하고 있는 거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 와중에도 이 정도 조치를 취했다라······.’

말없이 멀리 떨어진 민가를 둘러보던 대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중국에서 서해를 넘어 한국으로 오자는 발상부터 시작해 당 간부와 손을 잡는 수완, 그리고 1인자와 의견이 충돌하자 상대를 속여 이쪽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는 순발력과 머리 회전까지.

차오페이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는 인물이 분명했다.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는데.’

* * *

“뭐?”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병력을 모으라는 겁니다. -

한편, 옹진 반도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신천 인근의 북한군 기지에서는 차오페이의 부하가 그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었다.

“······.”

황해도의 책임 비서 대행인 진광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분오열되어 내란을 벌이는 당의 늙은이들에게 맞서기 위해 중국인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였다.

옹진반도와 연백평야 일대의 관리를 사실상 중국인들에게 맡긴 것 역시 진광 본인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중국인들이 상전인 양 굴며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내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이 얼마 안 되는 기름이나 포탄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결국 진광은 참지 못하고 따지듯 질문을 던졌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지 뭐라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에 차오페이의 전령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답을 내놓았다.

- 지금 남한 놈들이 밀고 올라오고 있소. -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차오페이가 저우쓰 앞에서 한 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는 시원하게 진상을 밝혀버렸고, 이에 진광의 눈에는 벌겋게 핏대가 섰다.

“뭐, 뭐가 어째?”

- 남한 놈들이 개성을 지나서 황해도로 밀고 오고 있다고 했소. -

랴오쯔밍은 무거운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 당신도 알다시피, 저우쓰는 미친놈이요. 이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당신들에게 탱크와 군대를 몰고 내려오라고 하더군. -

랴오쯔밍은 자타가 공인하는 차오페이의 오른팔이었다.

당연히 차오페이 본인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저우쓰 앞에서 자신의 형님이 한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대로 뒀다면 저우쓰의 전령이 달려와 병력을 불렀을 테고, 이놈들은 단칼에 그 요청을 거절했을 테니까.

그다음 전개는 불을 보듯 뻔했다.

눈이 돌아간 저우쓰는 사방으로 병력을 뿌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며 양쪽 모두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뭔가 상상도 못 할 패악질을 부리며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테고.

형님은 그걸 막기 위해 자신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 알아, 당신들이 그렇게 해줄 리가 없지. -

진광이 입을 떼기도 전에, 랴오쯔밍이 먼저 답을 냈다.

- 그래서 형님이 시간을 번 거요. 저우쓰의 부하가 아니라 나를 보내서 당신들이 병력을 모으는 시늉이라도 하게 하려고. 그래야 저우쓰가 형님의 생각도, 당신들의 배신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

“······.”

진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랴오쯔밍의 말대로였다.

저우쓰의 부하가 와서 병력을 보내라고 얘기했다면, 자신은 단칼에 거절을 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들에게는 탱크도 있고 소총도 있었다.

하지만 남한의 군대와 맞설만큼의 양은 아니었다.

정말로 싸움이 벌어진다면,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진광은 질 게 뻔한 싸움에 발을 들일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진광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일단 병력을 모아서 내려가는 시늉이라도 하고, 나머지 인력을 총동원해 전령으로 보내시오. 무전이나 전화가 닿는 곳에는 전부 연락을 넣어 헛짓거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저쪽은 최대한 북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광이 파르르 떨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 그건 나도 모르지. -

“뭐?”

- 그럼 남한군과 한 판 해볼 거요? 장갑차에 탱크만 수십 대에, 미군들까지 있다는데? -

“······.”

- 그냥 형님이 하자는 대로 하시오. 그래도 저우쓰보다는 좋은 조건을 끌어내 줄 테니까. 우리가 살길도 그것뿐이고. -

말을 마친 랴오쯔밍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폐가 아니라 배 밑바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은, 깊은 탄식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우리’에 이 계획을 떠올린 차오페이 본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형님은 저우쓰에게 칼을 맞을 각오로 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 * *

같은 시각.

- 이 개새끼들이······.-

- 형님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

북한의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기지를 떠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 끄, 끄륵······. -

저우쓰의 부하 중 하나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 후우우우······. -

진룽은 긴 한숨을 내쉬며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의 몸에는 이미 크고 작은 칼자국이 몇 개나 나 있었다.

흉측하게 쩍 벌어진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흡······! -

가볍게 숨을 내쉬며 불끈 힘을 주자, 팔뚝에 난 커다란 자상이 거짓말처럼 아물었다.

포인트를 활용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 아포칼립스가 열린 이후에 그가 손에 넣은 이능이었다.

- 이 개새끼야! -

또 한놈이 손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가볍게 몸을 돌려 그 공격을 피한 진룽은 잽싸게 상대의 목을 찌르고 손목을 그었다.

- 끄아아악! -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는 놈의 손목을 꺾어 손도끼를 빼앗았다.

- 몇 놈이나 죽었어? -

마지막 남은 적을 해치운 진룽이 자신과 함께 사지로 온 동생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 셋이 당했습니다······. -

보고를 들은 진룽은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잠시 눈을 감고 동생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는 차오페이 휘하의 몇 안 되는 무투파 중 하나였다.

이는 차오페이의 부하 중 저우쓰의 부하들을 해치우고 명령을 수행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주민들을 한곳에 모으고, 안전한 지점에 이르면 저우쓰의 부하들을 모두 죽여라. 그 후에 그 타오라는 놈을 보낸 한국인을 찾아가라. 그리고······. >

그것이 차오페이가 은밀히 건넨 쪽지의 내용이었다.

저우쓰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와중에 모두에게 그런 쪽지를 돌릴 수는 없었을 테니, 아마도 잘해야 둘, 기껏해야 셋 정도나 그 쪽지를 받을 수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무사히 그 쪽지를 건네받고 저우쓰의 부하들을 처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자신 하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저우쓰파와 차오페이파의 무력에는 그 정도로 격차가 있었으니까.

- 가자, 시간이 없다. -

이능으로 배에 난 상처를 치료한 진룽은 손도끼와 비수를 손에 쥔 채 기름도 얼마 남지 않은 고물 자동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연백평야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하는 차량에 몸을 싣고 있던 윤호가 돌연 두 눈을 치켜뜨며 대식을 불렸다.

“어? 형! 차가 오고 있어요.”

“차?”

“네, 서쪽에서 오고 있어요.”

윤호의 보고를 받은 대식은 곧바로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어?”

“꽤 멀어요, 그런데 엄청 밟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 급해 보이는데······.”

“속도 올리겠습니다.”

대식이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운전병이 엑셀을 밟았다.

대식이 탄 차량과 정체불명의 고물 자동차가 마주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끼익······!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군용 험비를 발견한 진룽은 잽싸게 브레이크를 밟은 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얼른 손을 들고 저항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이어서 그의 시야에 시커먼 방패와 빠루를 든 멀끔한 사내가 비추었다.

진룽은 한눈에 상대가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임을 알아봤다.

모든 게 차오페이의 예상대로였다.

상대는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형님이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건넨 전언을 저 사내에게 전하는 것뿐이었다.

- 당신이 대장이요? -

진룽의 목소리가 흥분과 긴장으로 가늘게 떨렸다.

과연 이 사내가 정말 차오페이가 말한 대로의 인물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사내가 이끌고 온 군대를, 자신들은 당해낼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대식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그는 확신했다.

“어디야?”

이 사내라면 형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내해, 시간 없잖아. 거래를 하려면 일단 숨은 붙어있어야지.”

* * *

- 부우우웅!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군용 트럭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하지만 침략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탱크와 장갑차 부대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 이거 맞습니까?”

텅 빈 허공에서 겁에 질린 형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요? 무섭습니까?”

대식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안 무서운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지금 형섭은 보기 드물게 겁에 질려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자신은 보이지 않는 자동차에 올라타 밤길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입니다.”

운전수 역할을 맡은 성찬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훈의 능력은 이미 사람 열을 끌고 다니며 감출 수 있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덕분에 위치만 잘 잡는다면 군용 트럭 한 대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감출 수 있었다.

자동차가 움직이며 일어나는 소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 역시 어렵지 않게 감출 수 있었다.

- 여기, 이 근처입니다! -

진룽이 신호를 보내자, 대식의 손이 무전기로 향했다.

“여기는 고기 러버, 연막 쳐주세요.”

다음 순간, 어두운 평야에서 묵직한 포성이 울려 퍼졌다.

- 쾅!

선명한 불빛과 함께 터져 나온 굉음이 엔진 소리를 뒤덮었다.

- 쾅,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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