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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75화 (375/508)

비정 (4)

* * *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차오페이는 서늘한 비수가 목덜미에 와닿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자신이 뭔가 어마어마한 착각을 한 건 아닌가.

늑대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저우쓰를 배신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당연히 남한군과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저우쓰는 항복을 권해봐야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그 인간 백정을 설득한다 해도 그놈과 그 수하들이 그동안 워낙 패악질을 부린 덕분에 협상이 유리하게 굴러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저우쓰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기다려. 곧 우리 군대가 올 테니까. 통역관도 올 거고.”

그때, 대식이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차오페이는 상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으로 보나 뭘로 보나 가만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 차오페이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에 차오페이는 일단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후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말투나 행동만 봐서는 흑사회의 일원이나 간부가 아니라 평범한 젊은 사업가로 착각할 정도로 예의 바른 태도였다.

- 부우웅······.

곧이어 저 멀리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전차의 캐터필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울렸다.

“소총부대는 저 새끼들 무장해제 시키고 한 곳으로 모아!”

“은채 씨랑 진규 잘 지키고!”

“정찰조는 숨어있는 놈들 없나 잘 찾아봐!”

“혹시 인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북한 사람 없는지도 잘 확인해.”

적지에 도착한 연합군의 병사들은 신속하게 흩어져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소총병과 전투원, 정찰 능력자는 사방으로 흩어져 적들의 잔당이나 인질은 없는지 수색작업을 벌였고, 은채는 빠르게 중국인들의 포인트를 회수했다.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주위를 수색하는 연합군의 모습에, 차오페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군······.’

경험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완벽한 역할 분담과 톱니바퀴처럼 착착 물려 돌아가는 유기적인 움직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어서 대식이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는 30대 가량의 한국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고생은 대식 씨랑 다른 분들이 하셨죠.”

대식과 가볍게 인사말을 주고 받은 통역관은 곧바로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섰다.

“우선 무전 닿는 곳에는 다 연락 취해. 여기 상황 종료됐으니까 바로 주민 대표 몇 명 뽑아서 이쪽으로 보내라고.”

통역관을 통해 전달한 첫 번째 지시 사항에, 차오페이의 심장이 저만치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무전 안 닿거나 인편으로 연락해야 하는 곳, 저우쓰쪽 놈들이 더 많은 구역은 우리 사람을 붙여주지. 그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민 대표를 몇 뽑아서 이쪽으로 불러올 거야.”

대식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 불길한 감각은 허리를 지나 가슴으로, 가슴을 지나 목으로 올라왔다.

“이 정도는 괜찮지? 너도 자신 있으니까 날 불러들인 거 아니야?”

상대는 이미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인질을 잡을 것을 원천차단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상대의 입에서 나온 ‘불러들였다’는 표현이었다.

‘설마······. 아니야. 무슨 정보가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상대가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인 진짜 이유를 읽어냈을 리가 없다.

차오페이는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애써 침착한 척 답을 내놓았다.

- 네, 괜찮습니다. 제 부하들 중 몇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

이 정도는 그 역시 예상한 바였다.

개풍 인근을 조용히 접수한 모양새로 보나 사전에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보나, 눈앞의 이 사내는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즉, 주민들의 입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온다면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전면 항복을 택한 것은, 적어도 차오페이 본인과 그 수하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크게 악감을 살만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상대가 이 사실을 이미 읽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수를 읽혔다는 건, 상대가 이에 맞춰 내놓을 다음 수를 이미 준비했을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는 의미였다.

그때, 대식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원하는 대로 저우쓰인지 뭔지 하는 저놈은 치워줬고······. 넌 나한테 뭘 줄 거지?”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한 그 한마디에, 차오페이의 얼굴에서는 대번에 핏기가 사라졌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너무나 맥락이 없어 보이는 듯한 그 대사에, 주훈이 눈을 껌뻑이며 대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놈, 단순히 안 될 것 같아서 항복한 게 아니라 저우쓰를 치우려고 우릴 이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대가는 우리가 받아야 할 입장이라는 거죠.”

말을 마친 대식은 자신의 말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저우쓰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야?”

질문을 던지는 사내의 눈에 어린 섬뜩한 냉기에, 차오페이는 저도 모르게 바르르 몸을 떨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예감이 맞았다.

자신은 늑대가 싫다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뭐, 아니어도 상관없어. 난 여기 남은 네 동포들에게 그렇게 말할 거거든.”

상대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대식은 싱긋 웃으며 한 번 더 비수를 내리꽂았다.

“잘 생각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대장을 끌어내리고 현명한 판단으로 동포들을 구한 영웅이 될지, 본토에서부터 함께한 대장을 배신하고 한국인들에게 붙은 쥐새끼가 될지. 그건 네 대답에 달려있으니까.”

같은 사건이라도 선후 관계와 이유가 달라지면 그 사건의 의미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고집을 부리는 저우쓰를 제거하고 항복해 좋은 조건을 끌어낸 것처럼 ‘보인다면’ 차오페이는 단숨에 남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인들이 밀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저우쓰를 죽이기 위해 그 상황을 이용했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진다면, 그 뒤는 불을 보듯 뻔했다.

스스로를 지킬만한 무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결국 차오페이의 입에서 자백이나 다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더 발뺌을 해봐야 달라질 게 없었다.

자신과 저우쓰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본토에서부터 존재했던 알력다툼과 균열은 이제 모두가 알아차릴 만큼 커진 지 오래였고, 흑룡방의 조직원들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중국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남자는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었다.

“원래 머리 좋고 주먹 못 쓰는 놈하고 주먹 잘 쓰고 머리 나쁜 놈을 붙여놓으면 둘 중 하나거든. 아주 친하거나, 아주 사이가 안 좋거나.”

대식은 피식 웃으며 차오페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하는 짓으로 보나 다른 놈들 얘기를 들어보나, 저우쓰라는 놈이 북한으로 오자고 했을 리가 없어 보였고, 군부와 손을 잡는다는 선택을 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뒤이어 대식은 차오페이가 저우쓰를 증오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렇게 보면 신대륙으로 와서 새 터전을 잡은 건 전부 네 덕이지. 저우쓰 성질대로면 북한군과 한판 붙었을 거고, 그럼 너희도 무사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중국인 그룹의 대장 자리는 저우쓰에게 돌아갔지. 심지어 그놈은 널 얍삽하게 잔대가리나 굴리는 겁쟁이 취급했을 테고.”

대식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차오페이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모든 게 그의 말대로였다.

저우쓰는 매번 자신을 뒤에서 일이나 꾸미는 겁쟁이라고 매도했고, 자신 덕분에 이곳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북한 주민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둘의 입장은 극명하게 달랐다.

차오페이는 그들을 지배하더라도 너무 원한을 사지는 않기를 원했지만, 저우쓰는 그것을 겁쟁이의 방식이라며 원색적으로 조롱했다.

- ······. 그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

차오페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본래 그가 원하던 것은 이 무혈 항복의 대가로 자치구 비슷한 것을 얻어내 그곳의 관리자로 앉혀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듣던 대로 머리는 잘 굴러가네.”

사냥감의 목에 올가미를 거는 데 성공한 대식은 가볍게 상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위아래를 분명히 하고 선을 그어줬다.

상대는 이제 자신의 요구조건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이놈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칠만한 ‘당근’을 제공하는 일뿐이었다.

배신을 막는 데에는 공포가 필요했지만, 두려움만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주민들 여론에 따라서 벌을 줄 만한 놈들은 벌을 받겠지만, 나머지까지 다 죽일 생각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놈들의 관리는 전부 너한테 맡기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차오페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 네? -

“단,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다 네가 져야 할 거야. 원래 관리직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대식의 말은 차오페이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지금 상대는 일방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도 될 판에 굳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쥐여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계산이 빠른 사내였고, 상대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를 빠르게 이해했다.

- 믿어 주십시오. 무슨 일을 맡기시든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

지금 이 대식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포탄과 총알 세례에 넝마가 될 뻔한 중국인들을 구한 영웅.

그리고 이는 남아있는 중국인들을 아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지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

‘분명히 더 큰 그림이 있는 거야.’

이 깨달음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단순한 인력 관리와 감시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사내는 뭔가 더 큰 계획을 위해, 중국인들을 하나로 모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 뭐.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됐네.”

의미심장한 눈으로 차오페이를 한 번 훑어본 대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너랑 손잡았다는 그 북한놈, 그놈도 바로 불러와.”

- 네. -

그리고 차오페이는 군말 없이 그 명령에 복종했다.

* * *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뭐이가 어드러케 된 거네?”

“진짜로 남한 군인들이 그 인간 백정을 죽여버린거네?”

한편, 황해도 곳곳에서는 연합군에서 보낸 차량이 각지의 주민 대표들을 태운 채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점심 무렵에 갑자기 중국놈들이 몰려와 사람들을 모으더니 이제는 그놈들이 모두 죽었다니.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떼놈들이 뭔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네?”

“그래, 총을 맞아도 멀쩡한 그 종간나 새끼가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지.”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이게 뭐이야?”

“저, 저 떼놈들이 왜 저러고 있는 거네?”

황해도를 호령하던 횡포한 중국놈들은 모두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무기 하나 들려있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남한의 병사들이 그 극악무도한 중국놈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놀란 입을 다물 새도 없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저, 저거 류진광 책임 비서 동무 아니네?”

그들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 황해도의 당과 군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거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차에서 내린 진광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에 각지에서 도착한 주민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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