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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377화 (377/508)

명분 (2)

“내년 봄에 황해도 지역에서 생산될 곡물의 일정량과 재령 광산을 비롯한 황해 남도 금속 광산 11개의 채굴권, 그리고 황해 북도 9개 광산의 채굴권 정도면 되겠습니까?”

원석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자, 종철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

대식이 북한 땅에 들어온 중국인들을 몰아내고 그곳의 주민들을 해방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무산 광산을 비롯한 북한의 지하자원과 광산을 손에 넣겠다는 계획도 분명히 임시 국회의 회의 안건에 오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단기간에······.’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그 모든 일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그때라도 숙이고 들어갔어야 했나.’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대식에게 줄을 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줄서기를 왜 줄서기라고 하겠는가.

결국 먼저 줄을 서는 놈이 떡을, 하다못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기 때문이었다.

정치판에서 반평생을 구른 종철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선착순 경쟁에서 그는 이미 한참이나 후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선두는 원석과 승덕이었고, 다음은 잽싸게 대식에게 줄을 선 문기와 그를 따르는 일파였다.

이제 와서 노선을 바꾼다고 해봐야 콩고물은커녕 고물 부스러기조차 얻어먹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노선을 변경하는 순간 문기와 그 일파는 자신을 비난하며 남은 음식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거지나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일 게 뻔했다.

‘그럼 정말 끝이야.’

일단 일이 거기까지 흘러가면 계파는 와해되고, 한때는 자신이 거느리던 의원들과 함께 문기 앞에 줄을 서는 입장이 될 터였다.

결국 남은 건 이를 악물고 반대하는 것뿐이었다.

어떤 사안이든 만장일치는 없었고, 반대파에도 수장은 필요한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의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라도 말을 해봐라, 당신이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종철에게는······. 이런 상황을 위해 준비해둔 패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나 강요는 없었습니까?”

가볍게 호흡을 고른 종철이 짐짓 점잖게 질문을 던졌다.

“김대식 씨는 분명 이북 땅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북 사람들의 자원을 수탈한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래서야 어디 더 올라갈 명분이 서겠습니까?”

이는 대식이 북한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그가 준비해온 카드 중 하나였다.

첨단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북한에게는 지하자원이야말로 목숨줄이었다.

그 생명과도 같은 자원과 광산을 그리 호락호락하게 내줄 리는 없으니 당연히 마찰이 생길 테고, 자신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잡음을 문제 삼겠다. 그것이 종철의 계산이었다.

“흠흠, 듣고 보니 그렇군요. 잘못하면 우리가 제국주의 시대에 후진국의 자원을 약탈하던 선진국처럼 보일 수도 있겠어요.”

일단 종철이 포문을 열자, 또 다른 반대파 의원이 지원사격을 개시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어느 쪽에게 뜯기나 똑같으니······.”

바로 그때, 원석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동의합니다.”

“네?”

“지금 뭐라고······.”

“저도 의원님들과 생각이 같다고 했습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발언에, 반대파의 의원들은 눈만 껌뻑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석은 대식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발언은 대식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차원석 씨, 그럼 차원석 씨도 김대식 씨의 행보에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당황한 반대파 의원 중 하나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나 원석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마찰이 있었다면 저 역시도 문제를 삼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자리에 다시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깐, 그럼······.”

“모든 절차는 아무런 마찰 없이 진행됐습니다. 이미 황해북도의 책임자인 류진광 도당 책임 비서가 이 사안에 동의했고······.”

“채, 책임 비서? 도당 책임 비서가 무슨 그런 권한이 있어!”

당황한 종철은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원석은 가볍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마치 판이 이렇게 굴러갈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시다시피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운은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북한은 각 지역의 책임 비서나 당의 주요 인사들이 나누어 지배하고 있는 상태죠.”

이어서 그는 약을 올리듯 여유롭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덧붙여서 황해도에서 소집한 주민 대표들도 모두 이 사안에 동의했습니다. 물론 광산 수익의 일부를 그들과 나누기는 해야겠지만요.”

“자, 잠깐. 채산성은.”

수세에 몰린 것을 직감한 반대파 의원 중 하나가 얼른 손을 들어 반박했다.

“결국 광산이라는 게 채산성이 높아야 의미가 있는 거 아니요. 채굴 비용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고······.”

조급한 마음에 꺼낸 말이지만, 그의 말은 일견 타당성이 있었다.

광물을 캐내어 제련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크다면 차라리 캐지 않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결국 광물이라는 것도 상품이고, 생산비용이 판매가보다 낮은 상품이라는 건 팔 때마다 손해가 나는 애물단지에 불과했으니까.

“글쎄요, 지금 전 세계에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광산이 몇 개나 될까요? 어지간해서는 채산성이 맞지 않을 리는 없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원석은 그 반박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즉답을 내놓았다.

“일단 채산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검토해 보고, 비료는 각지의 공장에 연락을 돌려볼 생각입니다. 가격이 맞는다면 판매를 한다는 사람이 나올 테고, 어차피 판매하는 법인이나 사업자의 재산일 테니 가격만 맞는다면 아무 문제도 없겠죠.”

* * *

“네. 잘됐네요.”

원석의 연락을 받은 대식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철이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자신과 연합군의 독주를 막고 싶어 할 터였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정치는 곧 끝없는 견제와 감시의 동의어였으니까.

이 정도 난관도 예상하지 못했다면 이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 문제는 됐고, 일단 최대한 빨리 발전소를 재가동시켜서 전기부터 공급해 주십시오. 뭘 하려든 전기는 필요하니까요.”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전문가들을 모아 수력 발전소부터 가동을 재개할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석탄도 꽤 나온다고 하니 그것도 안건에 올려주세요. 대부분 무연탄이라 화력 발전에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북한 사람들 난방에는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원석은 피식 웃으며 대식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식사는 잘하고 계십니까?”

“덕분에요.”

“아닙니다, 먹을 거야 당연히 제때제때 보내드려야죠.”

먹을 것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이 좋아진 대식은 얼른 필요한 식재료를 입에 올렸다.

“아, 혹시 오리 좀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오리요?”

“여기 잡아 놓은 중국 놈들 중에 요리하던 놈들이 몇 있더라고요. 베이징 덕을 할 줄 안다고.”

오리를 원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식의 입안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새로운 메뉴는 그가 차오페이에게 제시한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본토’에서 온 중국인들이 수백이나 있었다.

그중에 요리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저도 가도 됩니까?”

정통 북경 오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원석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는 대식 빌리지 초창기부터 먹방에 동참했던 원로 멤버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음식에 진심이 되어 있었다. 신메뉴가 나온다니 일단 맛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먹어보셨습니까?”

“아뇨, 그래서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럼 배달 보내겠습니다.”

배달이라는 마법의 단어에, 원석은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정말입니까?”

“네. 제가 먹는 걸로 농담하는 거 보셨습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연합 지역 내에 있는 오리 농장에서 바로 공수해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먹을 것에 대한 대화로 통화를 마친 대식은 곧바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북경 오리 먹습니까?”

“그 귀한 걸 여기서요?”

“허허허허, 북한 오길 잘했구먼.”

“얼마나 걸린대요? 얼마나?”

대식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마저 잊은 듯 신이 나서 질문을 던져댔다.

평화로운 시대에도 먹기 어렵던 것을 맛볼 수 있다는 희소식에, 그들의 위장은 벌써부터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 진광과 차오페이는 조금 전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마저 잊은 듯 눈치를 살피며 나한테도 고기 한 점쯤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었다.

“뭐야? 고기를 준다고?”

“그거 참말이네?”

북한의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옥수수죽이나 제때 나오면 다행인 그들의 입장에서 고기는 꿈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식재료였고, 북경 오리 따위는 감히 꿈속에서도 기대할 수 없는 고오급 요리였으니까.

아니, 애초에 말만 들어봤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리가 오려면 하루는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네?”

“기야 기렇겠지.”

“하긴, 오리 잡아서 보내려면 또 몇 시간이나 걸릴 텐데 말이야.”

하지만 막상 오리를 잡아서 이곳으로 보내는 시간 등을 따져보면 오늘 밤 내로 고기를 먹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아이구, 괜히 생각했구나. 배만 더 고프다야.”

“그런데 우리도 나눠주겠어?”

그때,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얼핏 별 것 아닌 그 대사에, 자리에 모여있던 주민대표들의 얼굴에는 곧장 짙은 그늘이 깔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남한 사정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세상에 공짜 음식을, 그것도 고기를 마구 뿌려댈 리가 없지 않은가.

“에휴······.”

“누가 가서 물어보면 안 되네?”

하지만 결국 자리에 있던 누구도 선뜻 손을 들고 나서지는 못했다.

“······.”

“그래도 개풍에서 온 동무들은 남한 사람들이 준 음식 많이 먹었다던데.”

대놓고 밥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에, 그들의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모두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 남조선의 대장 곁에 늘 붙어있던 나이든 아재 하나가 환히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우리 동무들은 식사들 했는겨? 갑자기 이리저리 불려 다닌 통에 암것도 못 먹었을 텐디.”

“서, 설마 우리도 주는 겁니까?”

주민대표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자, 아재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 오리는 좀 시간이 걸리니께, 일단 우리랑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고 오리는 내일 먹자고.”

아재의 시원스러운 한마디에, 주민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진짜로 우리도 주는 거요?”

“참말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먹을 게 풍족한 사람들 입장에서야 ‘일단은 요기나 하고 제대로 먹는 건 내일하자’였지만, 굶주린 이들 입장에서 그 말은 ‘두 끼나 밥을 준다고?’로 받아들여졌다.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도 주기만 하면 춤을 출 마당에 두 끼나 해결이 됐으니 기쁨은 두 배, 아니 그 이상이 되는 게 당연했다.

“흠, 흠······.”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식 빌리지의 공식 외교관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디 말이여, 우리가 여기 사람들한테 좀 도움을 구하고 싶은 게 있는디.”

그리고,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만 하시오, 말만.”

“그럼, 떼놈들 몰아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뭐라도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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