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3)
* * *
그날 밤, 마을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이야, 진짜로 여기까지 밥이 오는구나야.”
“남조선은 기름도 많은가 보지?”
“저 차들 깨끗한 거 봐라, 때깔이 다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배달차의 행렬에, 굶주린 북한의 주민들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사실 연합군의 병사들에게 오늘의 저녁 식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벌써 몇 달째 흰쌀밥 같은 건 구경도 못 해 본 황해도 사람들 입장에서 오늘의 저녁 식사는 몇 달 만에 열리는 성대한 축제나 마찬가지였다.
“음······. 여기도 저기도 대식 씨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혜나는 사방에 대식이 깔린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남한도 남한이었지만, 북한의 상황은 정말이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좀비가 많이 정리된 곳이 이 정도라는 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남한은 물자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 하나만 잘 털어도 상당한 양의 보존식과 농사를 짓는 데 쓸 비료, 모종 등을 구할 수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다른 물건들도 주위에 좀비만 없다면 어렵지 않게 주워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기름도, 전기도, 식량도, 다른 생활용품도, 모든 게 부족했다.
대식이 북으로 올라오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가만히 둬도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사람이 최소한 수백은 넘었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야.’
혜나의 입에서 짜증과 안타까움, 분노가 뒤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싸움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대식이 위쪽으로 올라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군벌들을 정리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혁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저희도 형님을 만나서 빨리 상황이 좋아지고 사람들하고 잘 지낸 거잖아요. 반대로 말하자면, 형님이 있다면 이곳도 곧 그렇게 될 거라는 거죠.”
“그럼, 걱정 말어. 우리 대장한테는 다 계획이 있으니께.”
뒤이어 북한의 주민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대식 빌리지의 외교관이 웃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반응은 좀 어떻습니까?”
아재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대식이 자연스럽게 대열의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이, 뭘 물어. 실패혔으면 내가 이렇게 어깨 딱 펴고 돌아왔겄어? 바로 내일부터 작업 시작하기로 혔어.”
외교관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낸 아재는 호시탐탐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를 견제하듯 훑어보며 답을 내놓았다.
“쳇······.”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지혁은 장난스레 혀를 찼다.
“응, 으응?”
한편, 자연스럽게 뒷줄로 빠지는 대식을 발견한 혜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식이 ‘스스로’ 밥 먹는 순서를 늦추다니, 그녀에게 있어 이는 바실리스크나 데몬을 처음 봤을 때 이상으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대식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묵묵히 뒤쪽에 자리를 잡은 채 아재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말로 굶어 죽는 걸 걱정해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고 하던가.
대식의 눈에 이 사람들은 마냥 남이 아니었다.
그는 수십 년간 문자 그대로 흙을 파먹으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덕분에 지금 이곳의 주민들이 느끼고 있을 고통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배식 순서를 뒤로 미룬다.
그것이 대식의 결정이었다.
“······.”
“?”
“뭐야?”
“뭔데, 뭔데?”
그리고 대식의 이런 행동은,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시선을 끌었다.
“대식 씨가 방금 뒤로 갔어.”
“뭐?”
“뒤로 갔다니까?”
“무슨 헛소······ 어? 진짜네?”
“뭐야, 무슨 일이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당황한 병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천하의 대식이 식사를 미루다니, 몇 번이나 눈을 비벼가며 확인해 봐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대식이 자리를 옮긴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그들의 뒤쪽에는 앙상하게 마른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반짝이고 있는 황해도 사람들이 서 있었다.
자신들과 달리 그들에게 이 식사는 몇 달 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음식일 터였다.
“아······.”
“흠흠······.”
이어서 몇몇 병사들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래 봐야 고작 몇 분 늦게 먹는 것 아니던가.
오늘만큼은 그들에게 먼저 밥을 먹여도 좋으리라.
“야, 야, 천천히 먹자. 천천히.”
그렇게 하나둘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뒤로 자리를 옮기고, 앞줄은 자연스럽게 북한 사람들의 몫이 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반 박자 늦게 그 배려를 알아차린 황해도의 주민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주민 대표가 배달차 앞에 섰다.
“이, 이거 고기 아니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끈한 국물에 담긴 소담한 백숙.
별다른 양념도 무엇도 없이 먹기 좋게 송송 썬 파와 따로 덜어둔 후추와 소금. 그리고 김치까지.
얼핏 소담해 보이지만 지금 남한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훌륭한 메뉴 구성에, 북한의 주민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고기다, 고기다.”
“기, 기름 봐라야. 나는 저 국물만 한 번 마셔봐도 소원이 없겠다.”
“그것 보시오, 내 거짓말 안 했지?”
그때, 북한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있던 학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우리도 개성에서 다 고기 먹었지.”
“개풍에서도 먹었고.”
“나는 요 며칠 사이에 갑자기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죙일 뒷간을 들락거렸대두.”
뒤이어 현철을 비롯한 개성 인근의 주민들이 나서서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자, 자, 얼른들 앉아서 맛 좀 보시오.”
“급하게 먹다가 체하면 뒈지는 수가 있으니 천천히들 먹고.”
자리에 앉은 주민들은 이걸 정말 먹어도 되나 눈치를 살피며 기름이 떠다니는 뜨끈한 닭국물을 한술 떠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키, 키야······.”
적절히 간이 배어 있는 기름진 닭 국물이 몸 안으로 들어가자, 겨울바람에 식은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이어서 그들은 흥분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닭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
자리에 있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고기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맛볼까 말까 한 게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뜨끈한 고깃국을 대접하니, 문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야.”
누군가가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글게 말이야. 올겨울에는 피죽이나 끓여 먹다 죽을 줄 알았는데.”
고난이 길었던 만큼, 굶주림이 길었던 만큼, 고깃국의 온기는 더욱 그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또 밥을 주는 거네?”
그렇게 어느 정도 주린 배가 채워지자,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 말아라, 우리 대식 수령은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이야.”
이에 학수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안심시켰다.
심지어 그가 대식을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남조선 대장’에서 ‘수령’으로 변해 있었다.
“남조선에서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헛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동무들이 약속만 잘 지키면 절대로 섭섭하게 안 할 거다.”
“그럼, 개성에서도 그랬고, 개풍에서도 그랬지.”
“그리고 지금 개성이랑 개풍 사람들은 맨날 흰쌀밥 먹고 있다.”
이어서 현철을 비롯한 이북 출신의 길잡이들이 앞다투어 대식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야, 싸움이 나도 항상 자기가 앞장선다. 이번에 떼놈들 때려잡을 때도 죄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았네.”
닭고기 맛에 빠져있던 북한의 주민들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학수 일행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남한 사람이 봤다면 충분히 기분이 나쁠 만한, 그런 눈빛이었다.
하지만 학수와 현철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들에게 의심은 생존을 위해 몸에 밴 일종의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걸핏하면 사상검증에 거짓 선동이 가득한 사회에 살다 보니, 너무 달콤한 이야기를 들으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이거 참말인 거 같은데······.’
그리고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의심은 옅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주민 대표는 모두 선동꾼과 그들이 하는 거짓말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말하는 놈들의 말투나 표정, 대답을 하는 모양새를 보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의 태도에서는 먹을 것을 받고 거짓말을 일삼는 선동꾼 특유의 과장되고 공허한 느낌을 읽어낼 수 없었다.
* * *
“네? 정말요? 그게 다라고요?”
한편, 대식이 북한 사람들에게 내건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혜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식은 이 제대로 된 저녁 식사와 베이징 덕을 대가로 북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노역’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노역의 내용이 문제였다.
“이삿짐은 내가 좀 날라주면 되겄제? 어차피 생활 도구도 그리 많지 않을 테니께.”
그러거나 말거나, 아재는 대식과 착착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네, 농기구는 어차피 오리랑 같이 올라올 테니까요.”
황해도의 주민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바로 ‘이사’였다.
지금 황해도의 주민들 중 대다수는 진광의 근거지인 신천과 흑룡방의 근거지인 옹진 반도, 해주 등을 비롯한 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식은 이 잘게 쪼개진 주민들을 한곳으로 모으려 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흩어져 있으면 결국 자기들 먹을 거나 간신히 생산하는 수준밖에 못 됩니다. 머릿수가 좀 돼야 뭐라도 하죠.”
일단 사람을 한곳으로 모으고, 농사의 규모를 키운다.
동시에 남한에서 가져온 설비들과 장비를 동원해 주민들이 모여있는 곳에 전기 설비를 비롯한 각종 기반 시설을 만든다.
그것이 대식이 제안한 거래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사실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밥 좀 주고 물자 좀 제공해준다고 살던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당장 올겨울을 어떻게 나야 할지 눈앞이 캄캄한 사람들에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식량과 난로, 연료와 앞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건 거주지를 옮길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애초에 지금 그들의 거주지가 그저 좀비와 전쟁을 피해 자리를 잡은 곳이라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고.
하지만 혜나가 느끼기에 이것은 뭔가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조치였다.
물론 이런 방식은 그들이 당장 겨울을 나고 내년에 먹을 식량을 생산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황해도 이북 땅을 수복하는 것과는 통 무관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대식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매몰찬 싸이코패스는 아니지만, 인정에 끌려 가던 길을 돌아가거나 멈춰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저희 위로 더 올라갈 거 아니었어요?”
이에 혜나는 대식이 잠시 목표를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네, 올라갈 겁니다.”
하지만 대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서 계속 도시 만들고 있으면······.”
“그게 올라가는 겁니다.”
뒤이어 대식은 아무렇지 않게 마지막 남은 닭 국물을 들이켜며 말을 맺었다.
“일단은 여기서 확실한 거점을 만든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게 가장 리스크가 적고 빠른 방법이에요. 저쪽이 이판사판으로 나오면 저희도 골치가 아파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