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원 (6)
“푸하하하하!”
대식의 말을 들은 포드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걸물.
이 남자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단어가 있을까.
대식이 핵을 수중에 넣으려 할 것이라는 건 그 역시 예상한 바였다. 지금껏 이 남자가 보여준 행보로 미루어보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타이밍에, 이런 방식으로 말을 꺼낸 건 정말이지 감탄을 불러내는 처신이었다.
“좋아, 관리만 맡지. 관리만.”
상대의 의중을 알아차린 포드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도 일개 개인이 핵을 손에 넣는다는 건 문자 그대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미 연합군이 공동 관리를 한다면, 한국 측도 미국 측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핵을 수중에 넣은 후 미군의 마음이 변해 배신을 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자신과 미군은 어떻게든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 입장이었으니까.
그리고 본국에 지원을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든 하늘을 날아가든 반드시 한국인들의 전폭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기름도 뭣도 없이 통통배를 타고 노를 저어 태평양을 건널 게 아니라면 대식과 한국 정부의 뒤통수를 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시 국회를 먼저 장악해 반대 여론을 억누르고, 배신하지 못할 상황을 만든 뒤 머지않은 미래에 있을지 모를 반발마저 미리 싹을 자른다.
이렇게 모든 기반을 완벽하게 다져놓고 ‘나는 핵의 관리를 맡길 만큼 당신을 믿는다’는 사인을 보낸다.
실로 완벽한 일 처리였다.
“이거 거래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구만.”
“거래라뇨, 그냥 믿으니까 맡기는 겁니다.”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포드의 입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래. 어느 쪽이든 좋네.”
미군의 극동 방위라인을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 끌어 올리고 20년 이상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던 북핵 문제를 해결한 장군.
그리고 미증유의 대재앙에 맞서 최단기간에 상황을 수습하고 본토로 날아온 영웅.
언젠가 역사책에 새겨질 자신에 대한 설명을 상상한 늙은 장군의 심장이 어린애처럼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서, 핵을 손에 넣을 계획은? 당연히 있겠지?”
포드가 던진 질문에, 대식은 고구마를 우물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내일부터 바로 움직여보죠.”
* * *
다음 날 아침.
- 빠빠, 빠빠빠, 빠빠라빠빠 빠빠빠······. 빠빠빠······.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섬뜩한 나팔 소리가 곤히 잠든 사람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이, 이병 김······!”
“이 x발! 누가 아침부터 이런 거 틀었냐!”
꿈에 나올까 두려운 기상나팔 소리에, 군필자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 자! 여러분,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어서 지혁의 해맑은 목소리가 사리원의 거주 지역에 울려 퍼졌다.
“저거 지혁이가 튼 거야?”
“아니 어떻게 얼마 전에 전역한 놈이 저걸 틀 생각을 할 수 있지?”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도 잠은 확실히 깼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린 사람들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 남조선 동무는 붙임성이 좋구만 기래.”
“그러게 말이야, 사람도 좋고, 눈도 초롱초롱한 것이 꼭 강아지 같지 않네?”
이제는 자신들의 것이 된 새집에서 첫 번째 밤을 보낸 황해도의 주민들도 환히 웃으며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침부터 드시고, 그다음부터 바로 마을 복구 작업과 농지 개간 작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혁의 안내 방송을 들은 북한 사람들은 피곤함은커녕 온몸에서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굶주림과 추위, 가혹한 노동에 지쳐있던 몸 어디에 이런 기운이 남아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이 개운한 몸 상태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어이구야, 벌써 열 시다.”
“뭐?”
“시간이 벌써 그리 됐네?”
기상나팔이 울리길래 이른 시간부터 깨우나 싶었는데, 시간은 어느새 10시가 지나 있었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대목에서 그들은 남조선 동무들의 작은 배려를 느꼈다.
몇 달 동안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어제 막 이주를 마친 그들을 위해 지친 몸이 회복될 충분한 시간을 준 것이다.
“뭣들 하네, 빨리 빨리 일어나서 밥값 해야지.”
좋은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 인간적인 대우와 충분한 휴식.
언제 쓰러질지 걱정되는 오래된 집이 아니라 넓고 깨끗한 고급 아빠트.
그들은 그렇게 기분 좋게 사리원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 * *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시체를 치우고 거주지를 정리하는 건 몸을 뉘일 곳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필요한 작업들을 해나갈 차례였다.
“대식 씨, 거기 끊어진 부분 복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에서 온 전기 기술자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식은 끊어진 전선을 붙잡은 채 날렵하게 전신주를 타고 기어올랐다.
“여기요?”
“네, 그쪽부터.”
이어서 반대편의 전선을 붙잡고 ‘복원’ 스킬을 사용하자, 포만감이 줄어들며 전선이 새것처럼 달라붙었다.
“됐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뭘요.”
전신주에서 풀쩍 뛰어내린 대식은 가볍게 다음 작업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옮겨, 조심히!”
“발밑, 발밑에 땅 꺼진 데 있다!”
아직 곳곳에 꺼지고 부서진 흔적이 남은 도로 위에서는 탐색조 사람들이 열심히 태양광 판넬과 배터리 등을 운반하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사리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오늘 판넬을 설치하면 약간은 전기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산되는 전력의 양이 그리 대단할 리 없었고, 전신주가 필요할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신주를 먼저 수리한 것은 인근의 발전소를 재가동하게 됐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수력 발전소는 언제쯤 돌아갈 것 같습니까?”
대식의 질문에, 기술자는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오늘 오후에 다른 기술자분들이 더 올 겁니다. 먼저 그분들하고 직접 수력 발전소를 방문해서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민호 씨랑 탐색조분들을 호위로 붙여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대식의 시선이 옆에서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진광에게로 향했다.
“안내 가능해?”
“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북한은 극심한 전력난에 시달리는 나라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많은 수의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해왔다.
그 결과 황해도에는 예성강의 청년 1, 2, 3호를 비롯해 몇 개의 중소형 수력 발전소가 있었고, 사리원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은파호 발전소가, 다시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천곡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발전 용량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정도 정비해야 발전을 재개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발전기가 돌아간다 해도 전기 설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중소 도시나 농가 인근에 소량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건 너무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해서 대식은 사리원을 선택한 것이다.
재령평야와 가깝고, 비교적 전기 설비와 거주 시설이 충분히 갖춰진 곳.
동시에 발전소를 돌려 전기가 공급된다면 그 전기를 가장 효율적이고 집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사리원이었으니까.
다른 곳을 선택했다면 부족한 전력 시설은 물론이고 모든 인프라를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야 했을 터였다.
“차오페이.”
뒤이어 대식은 손짓으로 차오페이를 불렀다.
“지금부터 중국인들 데리고 철로 복원 작업 시작해. 기술자 몇 붙여줄 테니까. 말 잘 듣고. 혹시 모르니까 호위 병력도 데리고 가.”
새로운 형님이 내려준 임무에, 차오페이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혹시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차오페이는 한 번 더 깍듯하게 예를 갖춘 뒤 중국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기와 기차는 대식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문제 중 하나였다.
진광과 학수의 말에 따르면 북한의 운수에서 기차가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 운수하면 기차가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어느 정도 식량 생산이 정상화되기 전까지 식량과 물자들을 계속 운반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시점에서 반드시 운송 수단을 정비해두어야 했다.
그렇게 때로는 직접 작업에 참여하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생각보다 바쁜데······. 인력을 좀 더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
잠시 고민하던 대식은 의회에 인력 파견을 요구한 뒤 다음 작업을 위해 재령평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후로 며칠간, 사리원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부터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농사를 짓고, 철로와 도로를 복구하고, 열심히 집과 거주 시설을 손봤다.
“이야, 그래도 이제 전기가 들어오는구나야.”
“남조선제 랭동고(냉장고) 써봤네? 그거이 아주 기가 막히더라.”
북한 사람들이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지금은 냉장고와 통신 설비를 유지하는데 대부분의 전력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듣기로는 곧 발전소가 돌아가고 조금 더 여유롭게 전기를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대식은 한 가지 이상한 지시를 내렸다.
* * *
대동강 이북, 남포의 항구 구역 동남쪽 끄트머리.
“어후······.”
하릴없이 대동강 인근을 순찰하던 병사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남포의 항구 구역은 그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나타나고 정찰총국장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여전히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포는 서쪽으로는 서한만과 광량만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든 떼놈들이 출몰하고, 남쪽으로는 남포를 동에서 남으로 휘감아 흐르는 대동강을 경계로 류진광 책임 비서와 대치하는 지역이었다.
덕분에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그 빌어먹을 경계 근무를 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군 생활 더럽게 꼬였구나야.’
손발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동철은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었다. 이제 마지막 순찰이 끝났으니 초소로 돌아가 내일까지 몸을 녹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 번 더 몸을 떤 그가 막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동철 동무, 죄송합니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그때, 때맞춰 오줌을 누러 갔던 그의 후임이 돌아왔다.
하지만 동철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대동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
이에 그의 후임 역시 동철의 시선을 따라 강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도 저거 보이니?”
“······. 저, 저거 뭐입니까?”
뻥 뚫린 평야의 남동쪽.
희미한 불빛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점처럼 보이던 그 빛들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 이제는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야, 야!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동철은 얼른 몸을 돌려 초소로 달려갔다.
* * *
“그러니까, 사리원 인근에 불빛이 나타났다고?”
급보를 받은 정찰총국장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틀림없습니다.”
“평양에서 봤던 괴물 같은 게 아니고?”
“아닙니다, 녹색이 아니라 흰색이었다고 합니다.”
“······.”
철희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진광이 사리원까지 북상한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전임자가 죽으며 운 좋게 책임비서 자리를 꿰찬 그 얼간이는 이제 와서 북상을 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경비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지금, 남쪽에서 그놈이 밀고 올라온다면 골치가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일단 땅크랑 미싸일들 다 대기시켜.”
말을 마친 리철희 정찰총국장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툼한 외투를 걸쳤다.
“내가 직접 상황을 확인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