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2)
* * *
해진의 보고를 받은 순간, 철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켜있던 실타래가 일시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중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질서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던 황해도에서 어떻게 이런 대규모 이주가 가능했는지, 어떻게 전기를 복구하고 재령 평야에서 농사를 재개했는지.
남한이 개입했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어떻게……?’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 인구로 보나 인구 밀도로 보나, 남한이 벌써 이 혼란을 수습하는데 성공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넘어온 놈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남한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고 했었다.
서해에서 봤을 때 서울 인근에는 해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먹구름이 끼어있다고 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어찌어찌 서울을 수복했다 해도 다른 지역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을 테고, 자국내의 상황을 수습하기도 바쁜 마당에 황해도까지 올라와 이 정도 자원을 쏟아부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국장님……?”
철희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을 서있자, 해진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남조선이 벌써 이 사태를 수습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철희의 질문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질문을 던진 당사자의 생각 역시 그랬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진광이 남조선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의 상황을 수습했다는 것 뿐이었다.
“…….”
세 사람 사이에 잠시 묵직한 정적이 깔렸다.
“일단 평양으로 돌아가지.”
철희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남조선 사회를 재건하기도 바쁠 남조선의 군대가 왜 여기까지 와 있는지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 * *
한편, 재령 평야 인근에서는 수백의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밭농사를 짓고 있었다.
“잡초 잘 솎으라, 호미로 살살 긁어서.”
“거기는 비닐 잘 덮고.”
겨울철에 파종해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의 가짓수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일단 수확만 할 수 있다면 좋다는 게 황해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뭐라도 할 수 있다고 보여줘야 하지 않갔네?”
“길티,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는 놈들을 누가 도와주고 싶갔어.”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은 아직 완전히 남조선 사람들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딱히 상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었던 곳의 사람들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상대가 마냥 호인이고 자비로운 사람이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간들의 입에 밥을 떠넣어 주리라 믿을만큼 그들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농사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남조선 사람들만큼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농사만큼은 우리도 제법 지을 줄 아니, 이번 기회에 우리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학수와 현철을 비롯해 남조선 사람들을 끌어들인 동무들의 말이었다.
“으음……. 여기저기 춘수 할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북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혜나가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남한 사람들, 특히 도시 사람들에게 농사는 딴나라 이야기였다.
대식 빌리지만 해도 초기에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춘수 할아버지 하나였고, 한동안은 비료 뿌리는 것 흙 고르는 것 하나하나 꾸중을 들어가며 농사 일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황해도 사람들은 달랐다.
일단 농기구와 비료 등이 주어지니 곧바로 능숙하게 농사일을 해냈다.
“아이고, 북한 사람들이라고 다 농사 잘 짓는 건 아니여.”
그때, 아재가 씨익 웃으며 혜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요?”
“그럼, 여기도 다 도시도 있고 공장도 있는디. 북한도 도시랑 농촌은 차이가 커. 하필 우리가 거쳐온 지역이 이북에서 제일 큰 곡창지대라 농사지을 줄 아는 사람이 많은겨.”
“아…….”
아재의 설명을 들은 혜나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대식씨가 그것도 알고 이렇게 한 걸까요?”
이어지는 혜나의 질문에, 아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랐을겨.”
“그런데 어떻게…….”
“그냥 도시면 도시대로, 농촌이면 농촌대로, 상황에 맞춰서 가장 적합한 대처를 할 줄 아는 거제. 지금은 농사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보란 듯이 농사를 재개해서 저짝 시선을 끄는 거고.”
언제나 그렇지만, 아재는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대식의 속내를 읽고 있었다.
지금처럼 날이 바짝 서서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일,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은 직접적인 접촉없이도 상대에게 사인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식의 선택은 농토를 일구고 전기를 복구시키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농사를 지으면 멀리서도 뭔가 눈치를 채긴 하겠네요.”
“그렇제. 밤에 불도 켜고.”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식이 인기척도 없이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다.
“아재.”
“어, 무슨 일이여?”
“간만에 사냥 좀 가시죠. 혜나 씨도 같이.”
“사냥요?”
너무나 뜬금없는 제안에, 혜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식을 바라봤다.
“네, 새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대식은 얼른 몸을 돌려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오세요. 시간 없으니까.”
* * *
같은 시각.
평양에서는 스물 너댓의 병력이 굳은 표정으로 철희의 앞에 서 있었다.
“지금부터 동무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리원으로 간다.”
이어서 철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이지만 감정이 드러나는 그 행동에, 정찰총국의 정예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철희는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한숨을 내쉰다는 건, 이번 임무가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아주 중차대하다는 뜻이었다.
“현재 사리원 인근에는 남조선의 군인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짤막한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사리원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왜 류진광도 중국인도 아니고 남조선 군대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여기서 왜 남조선 놈들 이야기가 나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의문을 입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철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면 뛰어들고, 지뢰밭을 달리라면 달리고, 자폭을 하라면 망설임없이 폭탄을 두르고 기폭 스위치를 누를 수도 있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명령에 따를 것이라면 질문을 던지는 건 불필요한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이어서 철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동무들의 임무는 사리원 인근으로 잠입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오는 것이다. 정말 그곳에 남조선의 병사들이 있는지, 땅크나 병력은 얼마나 끌고 왔는지, 전기는 어떻게 복구했는지, 우리 인민들의 상태는 어떤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져와.”
철희가 말을 마치자, 정찰총국의 정예들은 군말없이 답을 내놓았다.
“네!”
“네!”
그리고 그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순간, 철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꼭 살아돌아와라.”
* * *
평양을 벗어난 정예병들은 크게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그 중 하나는 해진과 무열이 침투했던 루트를 따라 대동강을 도하해 서쪽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하나는 평양에서 사리원을 지나 개성까지 이어지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2조보다 조금 더 동쪽으로 넘어가 얼음산과 대덕산 능선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2조의 일원인 일춘은 손을 들어 자신의 동료들을 멈춰세웠다.
이어서 그는 입을 여는 대신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서있는 기괴한 생명체의 모습을 확인한 그의 동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면 충분하다.”
이어지는 일춘의 말에, 그의 동료들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주위에 있던 좀비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들에게는 총도, 이능도 필요하지 않았다.
날붙이든 둔기든, 일단 손에 들기만 하면 무기가 됐다.
- 붕!
묵직한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 카각!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난 변이체는 흉측한 혈관이 불거진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냈다.
그 순간, 변이체의 팔을 내리친 쇠막대가 가볍게 방향을 틀어 놈의 옆통수를 가격했다.
“크, 크륵!”
일격에 머리가 부서진 변이체는 그대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쇠막대를 든 병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음, 또 다음 변이체를 처리했다.
“됐다.”
그때, 일춘이 그들에게 테이밍이 완료됐음을 알렸다.
그의 발 앞에는 어느새 사냥개와 닮은 형태로 모습을 바꾼 변이체 셋이 앉아있었다.
“그만 가자.”
일춘이 명령을 내리자, 시커먼 세 마리의 개가 코를 킁킁거리며 앞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뒤에는 서른에 가까운 변이체가 쓰러져 있었다.
고작 넷에 불과한 일춘 일행이 그 변이체들을 처리하는데 걸린 시작은 2분 남짓에 불과했다.
* * *
“여기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한편, 해진과 무열을 중심으로 한 1조는 이미 어제 이용했던 루트를 이용해 재령 평야가 보이는 곳 인근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정찰총국의 최정예라 해도 버젓이 해가 떠있는데 거의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평야를 가로질러 이동할 수는 없었으니까.
“해진 동무.”
그때, 무열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 위를 가리켰다.
“저거, 신경쓰이지 않아?”
노을이 지는 하늘 위에는 커다란 독수리 몇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독수리들이 상당히 일정한 간격으로, 비슷한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 아무래도 날짐승을 길들일 수 있는 능력자가 있나본데?”
무열의 추론에, 해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그럼 어떻게 하지?”
“괜찮아, 밤이 되면 내 능력으로 저놈들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좋아,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고.”
말을 마친 무열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얌전히 나무 아래에 엎드려 주위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 * *
해가 떨어지자, 흩어져 있던 정찰총국의 병력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세 방향에서 진군을 시작했다.
1조는 무사히 독수리들의 감시를 피해 평야를 가로질렀고, 3조 역시 산을 돌파해 빠르게 사리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냥개를 앞세운 2조 역시 순조롭게 사리원 인근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보란 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독수리들이, 그저 미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