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2)
“읍, 으읍!”
공포에 질린 병사는 온몸을 바둥거리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보다 먼저 적을 발견한 중급 병사는 이미 게거품을 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료가 쓰러질 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죽기 싫으면.”
대식이 싸늘한 표정으로 병사에게 경고했다.
공포에 압도당한 병사는 사지를 덜덜 떨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정말로 혼자서 산을 오른 걸까?
대체 왜?
아니,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기는 한 걸까.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았다.
“여기 몇 명이나 있어?”
질문을 던진 대식은 천천히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저쪽 능선에 이, 이삼백 명 정도 있습네다.”
병사는 덜덜 떨며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아군의 위치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그런 류의 결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태도였다.
“가서 전해. 곧 남조선하고 중국의 군대가 들이닥칠 테니까 튈 놈은 튀고 항복할 놈은 항복하라고.”
대식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손을 들어 아래쪽을 가리켰다.
“자세히 봐. 한 오천 정도 되니까.”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병사는 멍한 표정으로 산 아래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추는 것이라고는 어둠에 잠긴 시커먼 산의 능선뿐이었다.
“똑바로 보라고.”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의 지시에 따라 아래쪽을 바라보기를 수 초······. 그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 이건······.’
희미한 달빛이 내리는 숲속에서는 시커먼 덩어리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 사내의 말대로, 그 숫자가 정말로 오천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 그것도 이렇게 멀리서 내려다 보는 것만으로 적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행렬의 길이로 보나 뭘로 보나 고작 이삼백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만큼 목숨을 걸고 저항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고 적의 머릿수 정도는 줄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다가 총알이 떨어지면 그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문제는······.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이곳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냐 하는 것이었다.
“······.”
상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대식은 웃으며 다음 쐐기를 박아넣었다.
“참고로 북쪽에서는 최영길 소장의 병력이 남하하고 있어. 그리고 원산으로 보낸 병력은 이미 우리에게 전멸당했고.”
“뭐, 뭐?”
별동대와 영길의 이야기가 나오자, 병사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최영길 소장은 이미 우리 편에 붙었어. 너희들이 내분을 일으켰다는 걸 알려준 것도 그 인간이고. 덕분에 한 발 앞서 원산으로 달려간 우리 병력이 이미 리대웅 소좌의 신병을 확보하고 원산을 접수하러 간 별동대와 추격대를 전멸시켰지.”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병사의 마음 속에 박힌 쐐기는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원산으로 별동대가 떠난 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추격대가 쫓아간 게 누구인지까지 입에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듣기로 원산으로 떠난 별동대는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했다.
이 모든 정보를 하나로 엮으면, 답은 너무나 자명했다.
이 남자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그······. 이 이야기를 왜······.”
병사는 더듬거리며 대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남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면,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와서 미주알 고주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단 말인가.
“너희들은 죄가 없잖아. 시키니까 나와 있는 거지. 그래서 한 번은 기회를 주는 거야. 물론 마지막까지 저항한다면 살려둘 생각은 없어.”
병사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이, 대식이 덤덤하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잘 생각해봐. 한 시간 줄 테니까.”
* * *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두 병사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산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곧 온다던 증원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며칠 뒤에나 모습을 드러낼 거라던 남조선의 군대는 이미 산을 넘어 방어선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쪽에서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별동대와 원산의 주민들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적병의 숫자는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과 맞붙는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승산도 명분도 없는 전쟁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자신들은 이런 전쟁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전우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헉, 헉헉······.”
간신히 본대의 숙영지 근처에 도착한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우리끼리 얘기하는 게 낫겠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중급 병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현재 이곳의 지휘관인 심 대위는 태섭의 심복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에게 대식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들이 본 것을 털어놔 봐야 목숨을 걸고 사수하라는 명령밖에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아니, 재수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이마에 총구멍이 날지도 몰랐다.
그러니 병사들끼리 먼저 의견 일치를 보고, 그 다음 탈영을 하든 심 대위를 없애버리고 대식에게 투항하든 결정을 내리자.
그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뭐야?”
능선 끄트머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어야 할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온 것을 발견한 장교 하나가 두 눈을 부릅뜨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장교와 눈이 마주친 두 병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봤다.
‘제기랄······. 재수없게······.’
그들의 눈앞에 서있는 것은, 태섭의 심복인 심 대위였다.
왜 하필 이 시기에, 하필이면 숙영지 외곽에 이놈이 서있단 말인가.
이 어처구니없는 불운에, 두 사람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조금 더 상황을 살핀 뒤에 몰래 숙영지 안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뒤늦은 후회가 그들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뭐냐고 물었잖아. 지금 너희들은 소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심 대위는 그렇게 물으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머리가 새하얘진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결의를 다졌다.
이러나 저러나 죽을 목숨이라면 한번 개겨보기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바로 그때였다.
-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심 대위의 몸이 썩은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어, 어어?”
“응?”
그리고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심 대위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을 덮쳤다.
“누······ 억!”
“뭐야!”
삽시간에 넷을 때려눕힌 검은 그림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
“혹시나 해서 따라와 봤더니······. 조심 좀 하지 그래.”
“어, 어어?”
대식이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병사들 설득하려고 하던 거 아니었어? 이놈은 장교고. 너희랑 생각이 다를 테고. 원래 병사의 주적은 간부잖아. 북한은 다른가?”
이어지는 대식의 질문에, 두 병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 뒤 숙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 * *
한편, 천의산 중턱에서는 중공군과 연합군의 병력들이 추위에 몸서리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정말로 이게 맞는 건가? -
진스이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의구심이 가득 묻어났다.
이 전쟁의 열쇠는 바로 속도였다.
함경도의 주민들이 고지에 자리를 잡기 전에 북쪽에 대기시켜놓은 영길의 병력과 서쪽의 한중 연합군이 단숨에 함흥으로 치고 들어간다.
그것이 최소한의 출혈로 뒤끝 없이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달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지금 대식은 곧바로 기습을 하는 대신 이곳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투항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스이의 눈에, 이는 공연히 위험을 키우는 행동이었다.
“우린 함경도를 손에 넣으러 온 거지, 주민들을 학살하러 온 게 아니지 않은가.”
포드의 대답에, 진스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식의 전술에 다시 한번 의문을 표했다.
-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은 죽는 법이야.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너무 무르군. -
하지만 포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무른 게 아니라 바른 거지. 결과는 봐야 아는 거고.”
지나치리만큼 확신에 가득 찬 포드의 말에, 진스이가 한쪽 입꼬리를 뒤틀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순진하군.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린다면······. -
그때, 포드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풀린 것 같은데?”
진스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능선을 바라봤다.
- ······. -
칠흙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비탈 위에는 어느새 횃불 대신 불타는 빠루를 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본래 총을 들고 이 능선을 지키고 있어야 할 적병들이 서 있었다.
- 어, 어떻게······. -
“자, 그럼 길잡이도 생겼겠다, 이대로 함흥으로 진격하면 되겠군.”
* * *
한편, 함흥의 회의실에는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태, 태섭 동지! 최영길 소장의 병력으로 추정되는 부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보고에, 태섭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네! 최영길이 그 간나 새끼가 왜!”
영길이 대식을 만난 건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전일 터였다.
그리고 협상이 아무리 빨리 진행된다 한들 이렇게 빨리 손을 잡고 북쪽에서 병력이 내려올 리는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진군 속도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 이 간나 새끼······. 설마 처음부터 손을 잡자마자 날 치려고 한 거네?’
그와 영길은 북한의 네 파벌 중 가장 충돌이 잦았다.
함경도와 자강도 사이에는 개마고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고지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의 유불리가 결정됐으니까.
덕분에 개마고원과 장진호, 부안호 일대는 언제나 양측의 병력이 오가고 있었고, 그리 길지 않은 간격으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쩐지 요새 잠잠하다 했더니······!’
대식과 거래를 하기 전에 이미 개마고원 일대에 병력을 대기시켜놓고,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태섭의 추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진군 속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방위선은?”
태섭이 이를 악물고 질문을 던졌다.
“그놈들이 우리 방위선을 동쪽으로 우회해서 부전호 인근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쪽은?”
“서쪽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태섭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함흥 인민들을 그쪽으로 합류시켜.”
“네?”
“서쪽은 아직 적군이 나타나지도 않았잖네! 함흥 주민들을 북쪽으로 보내서 그쪽을 막고, 원산에서 돌아올 놈들을 서쪽으로 보내라 이 말이야!”
분을 참지 못한 태섭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함흥 일대는 비교적 산이 적고 평지가 많았다.
일단 적이 이곳까지 들어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물자도 병력의 숫자도 부족하고 무기의 질도 떨어지는 자신들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멸을 당하고 말 터였다.
서쪽이든 북쪽이든, 어떻게든 산이 많은 곳에서 고지를 선점하고 그곳에 방어선을 형성해야 했다.
“아, 알겠습니다!”
태섭의 명을 받은 보좌관은 황급히 회의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런 무능한 간나 새끼들!”
분노한 태섭은 애꿎은 책상을 발로 걷어차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비보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태, 태섭 동지!”
보좌관이 밖으로 나간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