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혹은 조련 (4)
“그려?”
아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상대와 눈이 마주친 웨이홍은 까닭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늘 대식과 붙어다니는 이 늙다리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그 빌어먹을 놈과 닮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아니면 뭐, 당신이 해결할 건가? -
그때, 줄곧 웨이홍의 곁에 서 있던 아호가 잽싸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국인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 늙은이는 걸어다니는 거대한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투석기용 탄환부터 시작해 강화탄과 평범한 총알은 물론이고 간식에 예비 장비까지, 온갖 것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어쩌면 아직 꺼내지 않았을 뿐, 미사일이나 탱크를 넣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 늙은이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뿐, 이런 상황에서 써 먹을만한 이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고 숨은 채 총을 갈겨대는 놈들에게 무사히 다가갈 수단조차 없는 그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아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허허, 이 괘씸한 놈이······. 어디서 얄팍한 수작을 부려?’
다분히 시비조인 아호의 말투에, 아재는 단박에 상대의 속내를 꿰뚫어 봤다.
지금 이 두 놈은 뭔가 사고가 터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인들과 이 생존자 집단 사이에 마찰이 생겨 사상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일단 한국인이 중국인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다면, 저 마을의 생존자 집단은 물론이고 진스이의 군대 내에서도 다시 반한파의 우군이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물론, 아재 역시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자신도,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유치한 도발에 응하는 대신 한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대식이 직접 오지 않은 건 이곳의 생존자 집단이 군대를 두려워해 접촉을 거부하고, 그럼 반한파가 다시 시비를 걸어올 거라는 것까지 예측했기 때문일 테니까.
“허허, 그려. 나 같은 늙다리가 무슨 쓸모가 있겄어. 우리 대장이나 불러야제.”
아재의 답을 들은 두 사람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건 아재가 이 도발에 넘어와 시비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쉽게 발을 빼버린다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뭐야, 정말 당신이 나설 생각은 없는 건가? 당신이 그 진 대형인지 뭔지의 오른팔 아니었어?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웨이홍은 한 번 더 아재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아재는 이인자의 자존심을 보여주기는커녕 자신의 무능함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아이, 나 같이 쓸모없는 늙은이가 나선다고 뭐가 되겄어?”
- ······. -
찔러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덤덤한 그 반응에, 아호와 웨이홍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어이, 적당히 해라. 아저씨는 진 대형의 오른팔이다. -
그때, 웨이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반한파의 수장인 두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재의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를.
* * *
한편, 대식은 열심히 뒷정리를 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뒤로한 채 진수와 함께 전장 인근의 지형과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 대식과 진스이의 계획은 탕산 남부를 거쳐 톈진으로 진격, 해군과 힘을 합쳐 바다와 붙어있는 도시인 톈진 일대를 정리하고 베이징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 진군 루트를 직접 눈으로 살피는 건, 당연히 대식의 역할이었다.
“첫 훈련은 어땠습니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탄도 원하는 곳에 잘 떨어졌고······.”
“함대의 규모를 조금 더 키워볼 생각인데, 가능하겠습니까?”
“얼마나 원하십니까?”
“운용 가능한 전함은 전부.”
너무나도 대범한 대식의 요구에, 진수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듣기로는 상륙함이나 보급함도 있다던데. 그런 것들도 전부 동원할 수 있습니까?”
“있기야 하지만······. 군함이라는 게 원체 기름을 많이 먹어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톈진은 비교적 안전하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아쉬우니, 이번 훈련 성과를 바탕으로 상부에 상륙함이나 보급함까지 전부 요구해 보세요.”
대식의 요구는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군이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근거까지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작은 작전에 너무 큰 규모의 병력과 함선을 요구하는 건 해군으로서도 받아들이기가 힘든 요구였다.
지금처럼 기름 한 방울 포탄 하나가 아까운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해군은 귀한 실전 경험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톈진 공략에 필요한 대략적인 물자와 자원, 인력 등을 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 정말 장교나 부사관 출신이 아니십니까?”
너무나 군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한 대식의 행동에, 진수는 정말로 그가 군 출신이 아닌지 의문을 느꼈다.
“그냥 육군 병장 출신입니다.”
“혹시······.”
“재입대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비슷한 제안을 지긋지긋하게 받아봤다는 듯한 그 반응에, 진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 하긴, 다른 분들도 모두 대식 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겠군요.”
바로 그때, 대식의 허리춤에서 찬 무전기에서 아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 여기는 인벤토리. 고기 러버 들리는겨?”
“여기는 고기 러버, 잘 들립니다.”
이어서 아재가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시작했다.
“아이고오, 여기 막 사람들이 총을 쏘고 난리도 아닌디.”
“그렇습니까?”
“이거 뭐 들어가기는커녕 말도 못 섞어보고 가만히 있는 중이여. 내 능력으로는 쪼께 어려울 것 같은디. 좀 도와줄 수 있겄어?”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아재의 엄살에, 대식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마침 이쪽도 확인할 건 다 확인했으니 바로 가보겠습니다.”
대식이 교신을 마친 듯하자, 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바쁘게 움직이시는군요.”
“움직일 때마다 다 돈인데,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죠.”
말을 마친 대식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곧 전장 정리가 다 끝날 테니 함장님은 조금 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방향을 틀었던 대식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아, 혹시 낚시할 줄 아십니까?”
“네?”
“그, 적적하시면 해안가에서 횟감이라도 좀 잡아주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서있던 진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십시오.”
* * *
- 온다. -
- 그런데, 진 대형이라고 별수 있겠어? -
- 또 모르지. 진 대형인데. -
중국인들은 기대와 우려가 섞인 눈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군용 차량을 바라봤다.
그들은 진 대형을 믿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말 사상자 없이 문제를 끝낼 수 있을지는 다소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진짜로 올 줄이야.’
반면 반한파의 병사들은 다른 중국인들과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기대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대식이 마찰 없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뭔가 사고가 터지기를 기대했다.
“어딥니까?”
차에서 내린 대식은 곧바로 생존자들이 있다는 방향을 물었다.
“저짝 언덕이여.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디.”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아재에 이어, 줄곧 상황을 살피고 있던 윤호가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몇 명쯤 되는데?”
“처음에는 십 단위였는데, 지금은 얼핏 보기에도 백은 한참 넘어 보여요. 이대로 대치하면 저녁쯤에는 천 명까지 불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정확한 숫자를 확인한 대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재에게 대검을 넘기고 방패와 빠루로 장비를 교체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몇몇 눈치 빠른 중국인들은 연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 설마 그냥 돌진하려는 건 아니겠지? -
- 우리 쪽에서도 사상자가 나올 텐데······. -
- 아니, 우리야 무사하다고 쳐도 갑자기 떼로 몰려가면 저 사람들이 더 겁먹지 않겠어? 그럼 정말로 끝이라고. -
하지만 대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못 들은 것처럼 방패를 팔에 차며 윤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람 제일 없는 쪽이 어디야.”
“저쪽이에요. 11시 방향.”
이에 윤호는 곧장 여덟 마리로 불어난 자신의 정찰기를 활용해 사람이 적게 몰린 지점을 표시해 주었다.
“수시로 상황 확인하면서 텔레파시로 알려줘.”
“혼자 가시게요?”
윤호가 질문을 던지자, 대식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통역은 있어야지.”
이어서 대식의 눈이 룽산에게로 향했다.
- 어······. 네? 저요? -
“그래, 너. 이따 맛있는 거 줄 테니까 따라와.”
- 어, 어디를 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
“어디긴 어디야.”
대식이 빠루를 들어 언덕을 가리키자, 룽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대, 대형? 저, 그, 아니, 어쨌든 이건 아닙니다. -
“정말 안 갈 거야? 네가 안 가면 저기 있는 사람들 다 버리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룽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 인근은 이미 정리가 끝났으니 저들을 이대로 남겨둔다고 해도 변이체에게 공격을 당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 근방의 좀비가 모두 정리됐다는 건 또 다른 생존자 집단이 이곳으로 흘러들지도 모른다는 의미였고, 그럼 박힌 돌과 굴러온 돌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랐으니까.
- 대, 대형. 정말 괜찮은 거 맞죠? -
“걱정 마, 죽어도 내가 죽지 넌 무사할 테니까.”
말을 마친 대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룽산을 붙잡아 주훈에게 떠밀었다.
그렇게 불쌍한 조선족 출신의 통역병은 자의반 타의반 ‘특사’로 임명되고 말았다.
“뭐 해야 되는지 알지?”
대식의 짧은 물음에, 주훈은 간결하게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를 확인했다.
“유경이랑 용선 씨만 데리고 가까이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식 씨가 시선 끌고 분위기 잡히면 바로 용선 씨 보내고.”
“그래, 내가 먼저 갈 테니까 텔레파시 주면 나 있는 곳으로 대충 날려.”
- 아, 아니, 대형! -
룽산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대식은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 뭐, 뭐야! -
갑작스레 벌판 위에 나타난 그림자에,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생존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군대가 나타난 방향에서는 방패를 든 사내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만 봐서는 산책이라도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 그, 그냥 쏴버려! -
- 무슨 소리야, 혼자 오고 있는데! -
- 그게 무슨 상관이야! -
- 정말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면 혼자 오겠어? -
- 그건 그렇지만······. -
군을 믿지 못하는 생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혼자서 오는 것으로 보아 저 사내는 전령이 분명했다.
문제는 저 ‘전령’이 무슨 말을 할 거냐 하는 점이었다.
- 우리가 저 사람을 쏘면 정말로 전쟁이라니까! -
혼란은 가중됐고, 모두가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일단 무슨 말을 할지 정도는 들어봐야······. -
바로 그때, 그들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비추었다.
- 어? 없어졌어? -
- 뭐? -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벌판을 걸어오던 사내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 없어졌다니까! -
당황한 그들은 얼른 몸을 들어 겨울의 건조한 태양이 내리쬐는 들판을 확인했다.
- 그, 그냥 돌아갔나? -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시커먼 안개가 피어올랐다.
- 어, 어어!? -
이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틈도 없이 낯선 사내 하나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제, 젠장! 이능력자야! -
- 고, 공격해! -
당황한 생존자들은 반사적으로 그 낯선 사내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이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그만. 얘기를 좀 하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익숙한 외국어가 그들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 한국인? -
- 뭐야, 한국인이 왜 여기있어. -
- 뭐? 군인이 아니야? -
군인이 아니다.
아니, 심지어 중국인도 아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상황에, 방아쇠에 걸려있던 그들의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 대체 이게 무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