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발판 (2)
* * *
“자, 잠깐······.”
“이게 무슨······.”
커티스의 뒤를 따라 상황실로 들어선 대식 일행은 마법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법이 없는 대식마저 두 눈을 껌뻑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미군의 상황실이 거의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커다란 스크린, 수십 대의 컴퓨터, 그리고 온갖 전자기기까지.
이곳의 풍경만 놓고 보면 미국은 이미 좀비 사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는 2040년대까지 모든 전력 공급을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할 계획이었지. 뭐, 그 계획이 이런 방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대식 일행의 반응을 확인한 커티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캘리포니아는 2040년대까지 모든 전력을 태양광, 풍력, 태양열 같은 친환경 발전으로 충당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쳐 대형 태양광 발전소와 풍력 발전소가 존재했다.
애초에 주 전체의 전기 공급을 오로지 친환경 발전에 의지하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사업이다.
전력 소비량이 대폭 줄어든 아포칼립스 속에서 이런 상황실을 운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건······. 기대 이상이군요.”
대식이 나지막하게 읊조린 말에, 커티스는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이 정도면 손을 잡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이어서 그는 상황실에 있던 너저분한 인상의 사내를 바라보며 간단하게 지시를 내렸다.
“실리콘 밸리 화면 좀 띄워주게.”
공돌이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외모의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고는 모니터 분배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 위에는 한때는 세계 첨단 산업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응?”
그때, 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아직 생존자가 있는데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사진 속에서는 총을 든 그림자가 공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설마 군이랑 합류를 안하고 저곳에 남은 생존자들이 있는 건가요?”
그러나 화면이 넘어가고 다음 사진이 스크린 위에 떠오르자, 자리에 있던 모두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형님,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지혁에 이어 민호가 입을 열었다.
“왜 고블린이 총 같은 걸 들고 다니는 겁니까.”
“배웠겠죠.”
대식이 인상을 찌푸리며 짤막하게 답했다.
고블린은 머리가 좋은 변이체였다.
시체나 쓰레기로 바리케이트를 쌓기도 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무기를 뺏어서 사용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권총을 가지고 자신과 씨름을 한 경험이 있었으니, 개나 소나 총을 들고 다니는 미국에서는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장은 실리콘 밸리에 상대는 총을 든 변이체.
커티스가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알다시피, 실리콘 밸리에는 세계적인 기업들의 본사나 공장, 데이터 센터가 많네.”
잠시 후, 커티스가 묵직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확실히 폭격을 퍼붓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군요.”
대식이 자신의 말을 이어받자, 커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기반 시설과 생산 시설을 포기하더라도 일단 좀비들을 없애버린다.
그것 역시 불가능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다.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득보다 실이 컸다.
특히 다른 것은 몰라도 IT 기업들의 데이터 센터와 서버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는 게 그의 마음이었다.
그곳에 저장된 정보들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은 최소한 몇 배, 아니 그 이상 수월해질 테니까.
“사실 이전에도 한번 공략을 시도했었네만······. 저놈들에게 발이 묶인 사이에 샌디에이고에서 문제가 터져서 포기하고 말았지.”
이어서 커티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그때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저 역겨운 괴물 놈들은 머리만 안 맞으면 되니 아주 당당하게 총질을 해대더군. 거기에 우리가 총을 쏠 때마다 주위에서 변이체가 몰려오니······.”
“전사자가 꽤 나왔겠군요.”
“뭐, 이쪽이야 스치기만 해도 전투에 지장이 생기고 감염자가 나오는 순간 죽는 것 이상으로 상황이 나빠지니 말이야.”
머리가 박살 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괴물이 총을 들고 엄호 사격을 한다, 그리고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다란 변이체들이 고블린 무리를 지킨다.
반대로 이쪽은 약간의 부상만으로도 감염이 되거나 전투 불능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화기와 첨단 병기 위주로 싸움을 풀어나가던 병력에게 갑자기 백병전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군이 이곳에서 발을 묶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때? 가능하겠나?”
커티스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묻어났다.
“······.”
하지만 대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오해한 커티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식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실리콘 밸리에 있는 회사들은 전부 사기업 아닙니까?”
“응?”
“생각해보니 사기업의 재산을 지켜주는 건데, 그건 계산을 따로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
순간 자리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일단 달아두는 걸로 하죠. 자세한 보수는 그쪽 분들이랑 협의하고. 혹시 빌 게이트랑 댈런 머스크도 살아 있습니까? 그분들이 살아 있으면 계산이 빠를 것 같은데.”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커티스의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색이 돌았다.
“그건 걱정 말게, 군, 아니, 안되면 의회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좋은 협의를 끌어내 보지! 대신······.”
“네, 좋은 조건을 끌어내 주시면 군에서 받기로 한 보수를 조금 깎아드리죠.”
“정말인가?”
“네. 최소 10퍼센트, 조건에 따라 30퍼센트까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에, 커티스는 환히 웃으며 대식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네, 킴!”
원하던 답을 얻어낸 대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바로 시작하죠.”
* * *
다음 날 아침.
캠프 펜들턴 인근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자, 자, 난민들은 저쪽으로.”
“줄 서, 줄 좀 서라고!”
연병장 인근에서는 샌디에이고에서 데리고 온 난민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정해주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지금은 사람 하나, 일손 하나가 아쉬운 세상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샌디에이고 해군 기지 인근의 시설을 정상화하고 중부와 동부로 진출해야 할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해군 기지 인근에서 구출한 인질과 난민들의 노동력을 활용해 해군 기지를 복구하고, 그 인근에 자리 잡은 군수 기업들의 공장을 정상화한다.
그것이 포드와 커티스의 계획이었다.
한편, 기지의 북쪽에서는 대식과 미군이 실리콘 밸리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도 뭘 좀 해보자고.”
그랜트가 장구류를 점검하고 있는 네이비 씰의 병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샌디에이고 수복전은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전투였다.
어차피 한국인들이 문제를 해결해줄 테니 우리는 가만히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자. 그따위 마음가짐을 가진 병사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한 명도 없었다.
“옛썰!”
“옛썰!”
자리에 있던 병사들은 힘찬 목소리로 그랜트의 말에 답했다.
오늘 전투는 그들에게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공장들과 데이터 센터, 서버를 살리는 데 성공한다면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어느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알래야 알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당장 같은 캘리포니아라고 해도 작은 타운이나 빌리지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판이니, 무엇보다도 정보가 절실한 것이다.
이는 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발판 삼아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정보’였다.
어디를 먼저 공략하고 어디를 먼저 돕고, 또 어디를 먼저 수복하는지에 따라 문명 재건은 최소한 몇 년 이상 앞당겨질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기업들에게 따로 보수를 챙겨 받는다.
바주카를 쏘는 드래곤이나 미사일을 토하는 바실리스크도 아니고 총을 든 고블린인데, 변이체 몇 쓸어주는 것 치고는 쏠쏠하다 못해 주머니가 터질 것 같은 수준의 보상이 아니던가.
“자, 그럼 출발하죠.”
차량 위에 올라타는 대식의 몸놀림이 오늘따라 유독 가벼웠다.
* * *
네이비 씰과 미 해병대, 그리고 탐색조의 최정예들을 실은 차량은 빠른 속도로 도심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들은 커티스가 했던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산과 들, 농장과 목장뿐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도 목적지인 산호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넓긴 더럽게 넓네요, 진짜.”
지루한 것을 넘어 막막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수준의 광활함에, 지혁은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전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리는 건 아닌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 끼익.
타이어 소리와 함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자동차의 행렬이 멈춰섰다.
차에서 내리자, 365일 맑은 날씨를 자랑한다는 캘리포니아에 어울리지 않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길······.”
그 먹구름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미군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응은 이번에도 사뭇 달랐다.
“오,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은디?”
“그러게요.”
“이야, 뭐 이 정도면 오늘 내로도 끝나겠는데요?”
“미국이 좋긴 좋네요.”
“거봐, 내가 샌디에이고 갔을 때 알아봤다니까. 죄다 개인 주택에 총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좀비들이 안 늘어나잖아.”
이미 서울과 베이징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다 본 그들에게, 미국은 어딜 가도 맑음이었다.
마치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고인물용 던전들만 돌다가 초보 존에 돌아왔을 때의 느낌이랄까.
“출발이 좋네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푼 대식이 도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커티스가 중간까지 손을 대다 만 덕인지, 산호세의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괜찮았다.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데이터 센터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변이체야, 애초부터 걱정도 하지 않았고.
“자, 그럼 가보죠.”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옮기는 한국인들의 뒷모습에, 그랜트의 머릿속에는 또 한 번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아, 안 돼. 오늘만큼은 활약을······.’
* * *
산호세의 북서부인 프리몬트로 진입한 탐색조의 정예병들은 엄청난 기세로 주위의 변이체를 쓸어버리며 목적지인 마운틴 뷰(Mountain view) 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운틴 뷰와 그 주위인 서니베일, 산타클라라, 팔로 알토까지. 고작해야 반경 수십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에는 x글, x플, 마이크로 x프트, x텔, x슬라를 비롯한 온갖 글로벌 기업들의 본사와 사무실, 그리고 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들의 이름만 봐도 왜 이곳에 폭격을 퍼붓지 못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목록들.
하지만 대식과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그 기나긴 글로벌 기업들의 리스트는, 그저 산처럼 수북하게 쌓인 채권에 불과했다.
“킴, 이곳부터는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총을 든 고블린 무리가 활보하는 지역 근처에 다다르자, 그랜트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대식에게 주의를 주었다.
- 탕!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젠장!”
당황한 미군들은 빠르게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분명히 아직 안전지대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고블린들이 이곳까지 영역을 확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식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문자 그대로 상상을 초월했다.
“자, 가자! 댈런 머스크가 우리를 기다린다!”
커다란 방패를 든 지혁을 필두로,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는 고인물 군단이 전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