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2)
“유타와 다른 주는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저희는 남쪽의 애리조나를 통과해 곧장 텍사스로 진격할 겁니다.”
지도 위의 라스베이거스를 손가락으로 찍은 대식의 손가락이 텍사스까지 시원한 직선을 그렸다.
“다른 곳을 모두 무시하고 바로 텍사스로 가겠다는 말인가?”
“유타는 인구가 상당히 적더군요. 한국과 거의 비슷한 크기인데 인구는 3백만 수준이고, 인구 밀도도 원체 낮고요.”
“흐음……. 그렇기는 하지.”
이어지는 대식의 말에, 포드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타는 네바다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주로, 인구 밀도가 낮기로는 네바다 못지않은 주였다.
유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인 솔트레이크 시티조차 광역권 인구 1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니, 다른 곳보다는 훨씬 더 상황이 좋을 터였다.
유타의 북쪽에 위치한 아이다호나 와이오밍, 몬태나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주였다.
반면 텍사스는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 중 하나였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보다도 훨씬 더 넓은 면적에 걸쳐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난민 문제 역시 몇 배는 더 심각할 터였다.
“유타와 다른 주는 볼더 시티와 비슷한 방식으로 통신망을 복구하고, 병력 파견은 최소한도로 줄이겠습니다.”
“상황이 심각한 곳은?”
“있다 해도 그곳부터 손을 대는 건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포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식은 한국에서도 손이 닿는 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곳, 가장 큰 문제에 먼저 손을 대고, 그렇게 얻은 자원과 힘을 바탕으로 나머지 지역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이 방식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줄곧 대식과 함께해 온 포드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인정에 이끌려 모든 곳에 일일이 손을 쓰려 했다가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텍사스의 베이스 캠프와 합류해서 숫자를 불리는 게 최우선입니다. 그쪽에도 쓸 만한 병력이 있을 테니, 그 병력의 일부를 북부로 돌리고, 저희는 계속 동쪽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지금 대식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병력’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상황이 달랐다.
중국은 어딜가도 수천, 수만의 사람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과장 하나 없이 어지간한 일은 전부 머릿수로 해결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에는 사람은 적고 땅은 지나치게 넓었다.
당장 캠프 펜들턴의 병력만 해도 순수 전투 병력은 일만은커녕 오천 언저리에 불과했다.
애초에 미군은 보병보다는 공군력과 우수한 첨단 병기에 의존하고 보병은 적은 군대였다.
그나마도 그 적은 보병 중 상당수가 해외 곳곳으로 파병을 가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는 보병이 너무 적은 것이다.
이 적은 병력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수준을 넘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먼저 텍사스로 가서 병력을 확보한다.
그것이 대식의 결론이었다.
* * *
“잠깐, 바로 텍사스로 간다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식과 포드의 결정은 캠프 펜들턴의 사령부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을 모두 무시하고 텍사스라니, 그럼 다른 주의 시민들은 모두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보기에 대식의 결정은 지나치게 냉정했다.
머리로는 납득이 가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혹시 킴은 미국인들의 안위 따위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대령 하나가 잔뜩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커티스는 냉정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미국인들의 안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 혼자 카르텔 점령지의 후방에 침투하고, 매번 전장에서 선두에 서나?”
“그, 그건 그렇지만…….”
이어서 커티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킴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고 들었네. 인구 밀집 지역에서 군대를 모아 탄약창으로 이동, 탄약과 무기를 확보해 서울을 수복했다고 하더군.”
한국에서 대식이 보여준 행보는 그 자체로 그 어떤 말보다 강한 설득력을 가진 근거가 되었다.
자신의 고국에서도 같은 결단을 내린 사람을 두고, 그 누가 남의 나라니 인명을 소홀히 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킴과 포드는 지금까지 충분히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한 것 같은데. 이 중에 킴만큼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
이어지는 커티스의 질문에, 자리에 있던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좋아, 그럼 우리는 킴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우선 위성 복구에 더 박차를 가하고, 킴이 원하는 곳이 어디든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커티스는 곧바로 동진에 필요한 준비를 갖출 것을 지시했다.
* * *
며칠 후…….
“킴, 킴!”
노트북을 손에 든 포드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식과 아재를 향해 달려왔다.
“위성, 위성 연결이 복구됐네!”
“이렇게 빨리요?”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소식에, 대식도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떴다.
미국 시트콤에 나올 것처럼 생긴 x글 출신의 기술자에 따르면, 데이터 센터와 위성 간의 연결을 복구하려면 먼저 스카이 박스 위성과 중계용 위성의 연결을 복구하고, 다시 지상국과 연결이 복구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몇 다리를 거쳐야 하니 당연히 며칠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아 복구를 마치다니.
“커티스가 실리콘 밸리의 기술자들을 어지간히도 들볶았던 모양이야! 모든 인력이 며칠 내내 교대로 밤을 새가며 작업을 했다고 하더군!”
신이 난 포드는 얼른 다가와 포스트 잇에 적어둔 주소를 도메인에 입력했다.
“혹시 모르니 새로 얻은 위성 사진은 이 주소에만 업데이트를 했다고 하더군. 이 자료를 기반으로 진로를 정하면 될 것 같네!”
포드가 엔터키를 치자, 조금 전 대식이 보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화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머리를 잘 썼군요.”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대식은 조금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정보는 그 어떤 힘보다 큰 무기였다.
특히 각지의 베이스 캠프와 종말의 씨앗이 자리 잡은 구역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약탈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군침 도는 정보가 될 터였다.
아무리 손톱만 한 가능성이라도 그런 정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흘러가게 둔다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 보게.”
이어서 포드가 새롭게 업데이트 된 지도를 대식에게 들이밀었다.
아포칼립스가 열린 이후의 상황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은, 그에게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약간의 흥분과 걱정, 기대가 어지럽게 그의 가슴속을 헤집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애리조나의 한 도시 위에 멈춰섰다.
피닉스.
애리조나의 주도(州都)이자 미국에서도 손에 꼽는 인구수를 자랑하는 대도시 주위는 온통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보았을 때 이렇게 대지 전체가 검게 물들었을 정도라면, 그곳의 상황이 어떨지는 굳이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끄응……. 상황이 나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먹물을 엎지른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버린 대지를 바라보던 포드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도를 동쪽으로 이동시킬 뿐이었다.
마치 피닉스가 어떤 상황인지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대식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피닉스는 그냥 지나치죠.”
“뭐? 그럼 유타 쪽으로 진로를 변경하겠다는 건가?”
이어지는 포드의 물음에, 대식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뇨, 육로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 * *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텍사스로 가는 비행기 안.
좌석에 앉은 미군 병사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어댔다.
다른 주를 모두 무시하고 텍사스로 직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그 후 대식의 발언은 더욱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로 텍사스로 갑니다.」
「네?」
「위성 지도로 보니 텍사스 인근에 커다란 베이스 캠프가 있더군요. 저희는 그곳으로 직행할 겁니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요?」
「저쪽이 지레 겁을 먹고 대공포라도 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대공포까지 쏘지는 않겠지만……. 저쪽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차라리 지난 번처럼 스타링크 트레블 케이스를 보내는 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은 아포칼립스였다.
낯선 사람만 하나 나타나도 바짝 날이 서서 총질을 해대는 세상인데, 갑자기 비행기가 뜨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뇨,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불필요하게 기름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인구 수가 적은 다른 주에도 비행기를 띄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기갑 부대가 소모할 연료에, 보급에 필요한 연료까지 생각하면 기름 한 방울이 아까운 마당에, 이런 일에까지 아까운 기름을 펑펑 써가며 움직일 수는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요.」
* * *
텍사스, 포트 후드(Ford hood)
포트 후드는 남부는 물론이고 미국 전역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규모를 자랑하는 육군 기지였다.
뿐만 아니라 텍사스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총기를 보유한 주였다. 한 국가도 아니고, 한 주에서만 무려 1,600만 정이 넘는 미친 총기량을 자랑하는 지역이 바로 텍사스였다.
이는 대식이 서부를 안정시키자마자 텍사스를 목적지로 정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후우…….”
서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카우보이 모자를 쓴 사내는 담배를 꼬나문 채 가만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포칼립스의 하루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날은 차라리 좀비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끔찍한 일이겠지만.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담배 한 대가 모두 타 들어갈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던 빌리는 사령부가 있는 쪽을 향해 탁, 하고 침을 뱉었다.
포트 후드의 사령관 대리 역할을 맡고 있는 깁슨은 최악의 얼간이였다. 적어도 빌리는 그렇게 믿었다.
국경 지대가 불안하다느니 텍사스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느니 하는 말은 모조리 변명이었다.
‘그 겁쟁이는 그냥 위험한 게 싫은 거야.’
상황은 제법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깁슨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먹을 게 풍족하고 석유에 가스까지 펑펑 나오니, 그저 가만히 앉아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그사이에 다른 주의 상황이 얼마나 나빠지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든,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제기랄, 진작에 그 새끼를 쏴 죽였어야 하는데.’
그때, 그의 눈에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비추었다.
아포칼립스에 어울리지 않는 새파란 하늘 위에, 몇 개의 검은 점이 나타났다.
“비행기……?”
한 대도 아니고 무려 세 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빌리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선두로 날아가던 비행기의 꼬리에서 돌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어, 어어?”
화들짝 놀란 빌리는 얼른 주위에 묶어놓은 자신의 말 위로 몸을 날렸다.
* * *
“뭐?”
“서, 서쪽에서 나타난 비행기가 불시착을 시도 중입니다!”
깁슨의 머릿속에서 방금 들은 단어들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비행기? 불시착?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불시착이라니.
바로 그때, 더욱 믿을 수 없는 보고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부, 불시착을 시도한 비행기는 샌디에이고 해군 기지 소속의 군용기입니다! 안에는 한미 연합군과 주한 미군 사령관인 포드 슈워츠 대장이 탑승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