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508화 (508/508)

후일담 (2) (完)

티비를 켜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국민 MC와 조금 어색하게 굳어있는 대식의 모습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

“자, 드디어 저희가 이분을 모시게 되는군요!”

한껏 들뜬 진행자의 목소리에서는 그 기나긴 방송경력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다.

“보통은 아무리 유명한 분이라도 모르시는 시청자 여러분을 위해 간단한 소개 멘트를 하는 편이지만······. 설마 이 분을 모르는 분들은 없겠죠.”

이어서 대식과 탐색조의 활약을 다룬 영상들의 썸네일과 얼마 전 성공리에 방영된 미국 편의 스틸컷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에이, 그래도 소개는 해야죠.”

보조 MC가 한마디를 거들자, 곧바로 핀잔 섞인 말이 돌아갔다.

“아이, 기다려요. 내가 소개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아니, 서운하게 왜 이러세요? 오랜만이라 감 떨어졌나 해서 MC가 해야 할 일을 짚어줬을 뿐인데······.”

“오랜만에 방송인데 정말 이럴 거예요? 네?”

“그러게요, 오랜만인데 여전히 저한테 잔소리를······. 어휴.”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분위기를 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개 멘트를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좀비 사태를 해결하고 곧바로 휴전선을 넘어가 평화통일을 이룩한 장본인,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미국으로······.”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동료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형님 좀 긴장하신 거 같은데요?”

“그러게요, 평소보다 미묘하게 무표정한 게······.”

“역시 다큐랑 예능은 다른가 보네요. 다큐 찍을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눈앞에서 카메라 수십 대가 자기를 비추고 있는디 긴장 안하면 그게 이상한 거겠제.”

“역시 저희는 일본 가 있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미 유명세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한 경험이 있는 민호와 형섭 등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화면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긴 하네요.”

반면 혜나는 줄곧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들이 겪은 일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퍽 낯설고, 또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게요, 저기가 저렇게 위험했었나.”

때로는 잘도 저런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다 싶기도 했고,

“다시 봐도 저때 진스이 장군님 표정은 예술이네요.”

대식에게 몇 번이나 바가지를 쓴 진스이의 표정은 다시 봐도 가관이었으며,

“우리 저렇게 잘 먹었어요?”

“흠흠, 이건 다큐가 아니라 그냥 먹방인데요?”

“으음······. 우리 저렇게 눈이 뒤집혀서 바비큐를 먹었구나······.”

“맛있긴 했죠.”

회식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은 민망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렇게 잠시 지난 일들을 되짚어보며 담소를 나누던 그들의 시선이 다시 화면으로 돌아갔다.

“어, 벌써 몇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참 좋네요.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갈수록 밝아지고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던 사람들이 결국 힘을 합쳐서 싸우는 모습이······. 저는 몇 번을 봐도 참 좋더라고요.”

조금은 감상에 젖은 MC의 멘트에, 대식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들 무서워서 그런 거죠. 상황이 나쁘다고 해도 곧바로 다른 사람을 해치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가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네, 참 공감이 갑니다.”

그 역시 아포칼립스를 겪었기 때문일까. 대석은 조금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국민 MC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원 요청을 받으면 해외에 나가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동안은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뒹굴거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건 뭐 거의 월드 스타 같은 느낌인데요. 듣기로는 이동도 전용기로 하신다고?”

“네, 미국에서 받아온 민항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근황 토크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회를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 그럼 그 비행기로 식재료도 공수하는 건가요?”

“화물기도 몇 대 가지고 있어서요. 특히 해산물은 신선도가 중요하니까요.”

신선도에 대해 논하는 대식의 눈빛은 변이체와의 사투에 대해 회고할 때보다도 몇 배는 진지했다.

“어, 지금 또 먹을 거 얘기가 나오니까 너무 진지해지시는데요.”

“이게 또 대식씨 매력이죠.”

그렇게 소소한 대화가 끝나갈 무렵, 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 이제 슬슬 끝나갈 시간이 되는군요. 그런데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게 아주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있어서라고······.”

그제야 본론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대식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방송에 나오게 된 건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된 곳에서 인력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일종의 공개적인 인재 채용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네요.”

* * *

“현재 각국의 기술자와 군인들, 독특한 이능력을 가진 분들이 합심해서 사회를 재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자와 전문인력은 턱없이 모자라고, 특히 낙후된 지역의 경우에는 기반 시설까지 부족해 복구 작업이 아주 어려운 실정입니다.”

녹화된 영상을 바라보는 위안하이의 얼굴이 벌레를 씹은 듯 일그러졌다.

“아마 며칠 내로 한국과 미국, 중국의 기술자들이 협력해 만든 구호팀 모집 사이트가 오픈할 겁니다. 그곳에 각 지역에 필요한 인력에 대한 자세한 공고가 뜰 테니, 그 정보를 보고 조금만 손을 보태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보수는 업무에 따라 다르지만 당연히 적절한 보상이 제공될 예정이며······.”

그것은 사실상 최후 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저 빌어먹을 한국인은 자신들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갈 예정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 중국의 나머지 반쪽을 중심으로 결성된 그 연합체는 머지 않은 미래에 자연스럽게 국제 질서를 주도해나갈 조직으로 거듭날 터였다.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저들이 제시하는 조건과 질서를 받아들여야 할 테고, 그것을 거부하면 그 뒤는 불을 보듯 뻔했다.

“후우······.”

위안하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진스이와 한미 연합군만으로도 벅찬데 자치구와 내전을 치른 상태로 저런 국제기구의 압박까지 받는다면······. 자신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몸을 숨기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하하, 킴! 정말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남미와 미국 각지에서 기술자와 전직 군인들의 지원이 쇄도하고 있어! 조만간 이 인력들에게 남미 일대의 복구를 맡기고 대서양 함대가 유럽으로 진출할 예정이네!”

텐스의 연락을 받은 대식은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1세기는 글로벌 시대였다. 조금 오래된 표현으로는, 지구촌 시대였다.

그만큼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남의 나라 일이 단순히 남의 나라 일이 아닌 시대라는 의미였다.

“가만보면 잔정이 많으시다니까. 남의 나라 일도 다 도와주시고.”

대식이 통화를 마치자, 지혁이 피식 웃으며 식탁 위에 간식거리를 올려두었다.

대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무심한 듯 하지만 주변 사람을 챙길 줄 알고, 지극히 냉정하고 합리적이면서도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 것을 불편해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그럼 그럼, 원래 그런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법이제. 잘혔어, 아주 잘혔어.”

아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식의 결정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대식은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더하지 않고 묵묵히 지혁이 만들어 준 튀김을 입안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냥꾼 같은 표정으로.

그리고 며칠 후······.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진 형, 나일세. 위안하이가 암살을 당했다는군.”

“그렇습니까?”

너무나도 평이한 대식의 목소리에, 진스이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의도한 건가?”

“뭘 말입니까?”

“음, 아닐세. 어쨌든 그쪽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평화 협정을 요구해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조건에 따라 다르겠죠. 일단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또 하나, 커다란 골칫덩어리가 해결됐다.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후 몇 달 동안 대식은 몇 번이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한 여름에 태국이라니.”

“아니 좀 일찍 시작하지.”

“이 날씨에 태국이 말이 됩니까. 아주 쪄 죽겠네.”

중국의 문제를 대강 해결한 뒤에는 동남아로.

동남아의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에는 인도로.

“으아아, 온몸에서 향신료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네요.”

“당분간 카레는 거들떠도 안 볼 것 같구먼.”

때로는 탐색조 사람들과 함께.

“진 대형, 돌아가는 길에 중국에 들러서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장군님께서 진 대형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또 때로는 중국인들과 함께.

그렇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수없이 많은 요리를 맛봤다.

“싫다. 가면 또 이상한 일 맡길 거잖아.”

“만한전석인데요?”

“기장님, 중국으로 갑시다.”

“푸하하! 그럴까요?”

“형님, 지난 번에도 그랬다가 사막 갔다오지 않았습니까!”

“어허, 만한전석이라잖여. 황제나 먹던 건디?”

“······. 그것만 먹고 가는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먹을 것만 집어먹고 냅다 도망치자고!”

* * *

다시 6개월 후.

“뭐? 아프간? 이 영감들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사막으로 보내네? 유럽 놈들은 뭐하는데!”

“아직 동유럽도 정리가 안 된 상황이라······. 알다시피 그쪽에 작은 나라들이 좀 많나.”

“아, 못 가! 아니, 안 갑니다!”

뉴욕 전을 끝마친 후 1년 이상이 지났건만, 대식은 여전히 평온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제가 인력도 모아주고, 중국에서 지원군도 왕창 끌어다주고! 할 거 다했는데 왜 맨날 저한테 이러는 겁니까!”

“그거야 자네가 워낙 유능하니까 그렇지. 과장하나 없이 자네 한 명 보내면 포탄에 총알에 인력까지 수백억을 아낄 수 있는데······. 돈이 아까운 건 아니지만, 그 자원을 조금이라도 아끼면 사람들 생활 여건도 그만큼 빨리 좋아지지 않겠나, 응?”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도 제법 발언권을 가진 승덕이건만, 대식 앞에서는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쥐나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쥐가 아주 교활하고 영악한 쥐라는 점이었다.

“딱, 딱 한 번만 더 부탁하겠네. 대신 중동의 유전 채굴권 하나와······.”

“제가 돈이 아쉬워서 이럽니까? 솔직히 이제 죽을 때까지 다 써도 못 쓸만큼 벌었는데.”

“참치.”

“······.”

“매달 큰놈으로 하나씩 보내 주겠네. 북방 참다랑어, 잡힌 것 중에 가장 좋은 걸로.”

사실 대식의 입장에서는, 그쯤이야 돈으로 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아······. 두 마리.”

“오케이, 두 마리!”

늘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못 이긴 척 져주고, 먹을 것을 받았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니께.’

그리고 아재는 늘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식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볐다.

“아이고오, 그럼 또 짐 싸야겄네?”

말을 마친 오른팔은 피식 웃으며 짐을 싸는 척 했다.

하지만 그의 인벤토리 한구석에는 원정을 갈 때마다 필요한 물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아재는 그것을 ‘온정’이라고 불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따스한 것.

때로는 무겁고 귀찮게 느껴지지만, 결코 풀어헤쳐 던져버려서는 안 될 짐.

200년을 지옥에서 살며 잠시 먼지가 쌓였지만, 결코 내다 버리지는 않았던 짐.

“그럼 가보자고.”

대식과 함께 가게문을 나서는 아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정 (情) 카츠. 이름 참 잘 지었다.

대식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딱 어울리는, 좋은 이름이었다.

- 외전 完 . 그 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 말

드디어 완결이 났군요.

500편이 넘는 긴 글을 사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P.S. 어제 내용은 독자분들의 지적을 받아들여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습니다.

완결 후기

안녕하세요, 글 쓰는 편몽입니다.

이렇게 또 한편의 글이 끝났네요.

평소에도 잡생각이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칠 때가 되면 유난히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을 충분히 다 했는지, 잘못 전달하지는 않았는지, 이 부분은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내용은 조금 더 줄였어도 좋았을 텐데······. 아, 그 부분은 조금 더 써도 괜찮았을 텐데 등등······.

하지만 결국 지나간 건 지나간 것이고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됐다’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겠지요.

사실 ‘귀환 첫날 아포칼립스가 열렸다’는 해외편 포함 250화 정도로 기획했던 작품입니다. (네······. 어림없었죠.)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걸 250화 내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지······. 결국 그 두 배에 달하는 분량을 쓰고 나서야 이야기가 마무리 됐네요.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신 분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겠지요.

이제 두 번째 유료 작품이지만, 쓰면 쓸수록 웹소설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독자분들의 일침에 내상을 입고 빌빌거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분들의 응원으로 힘을 얻어 글을 쓰고, 가끔은 독자분들이 던진 농담이나 아이디어 덕분에 글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기도 하죠.

(가끔 너무 천재적인 드립을 치시는 분들이 있어 당혹스럽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결국 웹소설이라는 건 독자분들과 함께 완성해나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말이 많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후기나 작가의 말을 쓸 때면 늘 말이 많아지네요. (심지어 두서도 없고요.)

독자분들과 소통할 창구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건지, 본래 작가라는 게 떠들기를 좋아하는 인종이라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제가 그런 사람이라 그런지, 뭐 하여간 그렇습니다.

(이대로 계속 쓰다 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잡설은 줄이고.)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에서 배우고 느낀 점들을 바탕으로 더 좋은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늘 건강하고, 행복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