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83화
‘만약 내가 외국 길드들과 계약을 하게 되면, 그 국가의 헌터 협회로부터 비상 소집권을 받아내기로 했지.’
비상 소집권, 전쟁 혹은 이계의 침공과 같은 국가의 존속이 위협되는 비상의 상황에 국가에 소속된 헌터들을 소집해내는 권리였다.
자국의 유능한 헌터가 외국에 유출됨으로써 생기는 국가 안보의 경계를 메꿔 내겠다는 말이었다.
국가를 수호하고, 국익 상승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 헌터 협회의 입장에서는 이성준이 외국 소속으로 활동한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부협회장, 고태현. 이 정도면…… 영리한 수준이 아니라 영악하다고 볼 수 있겠군.’
외국 길드에 소속된다고 해서 해당 국가로 귀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대한민국 국민으로 남는다는 거다, 심지어 삼중 소속으로 활동을 하는 만큼 새로이 계약을 맺는 길드 쪽에서 활동을 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준이 한국을 떠나는 일은 드물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상 소집권과 이성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며 국가 안보를 한층 더 강화시켜냈다는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백호 쪽이 챙기는 실리가 따로 없긴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백호는 가장 큰 것을 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계약을 주고받은 것은 없지만 은원관계를 잊지 않는 무인의 특성상, 이성준은 오늘의 일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의 빚을 하나 지운 셈이었다.
백호와 협회 두 세력 모두 확실하게 이득을 챙겨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 영악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성준은 이런 협회와 백호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나를 따르는 세력이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그만큼 내 일거리가 줄어든다는 거지.’
때문에 이번 세 번째 계약 또한 쉽사리 맺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깐깐하게 검토를 할 것이다.
‘추려내고 추려내서 가장 좋은 곳으로 딱 한 곳만 받아낸다.’
외국이든 한국이든 국가는 상관없다.
기준은 명확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며, 위협을 가해오는 이들로부터 본인, 이성준과 가족들을 안전히 지켜낼 수 있을 만한 강대한 세력.
‘동시에 내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곳.’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기다리다 보면…… 분명 찾아올 거다.’
부협회장, 고태현이 매니저 역할을 자처해가며 자질이 부족한 곳들을 걸러 내주고 있었다.
고지식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사람이지만, 눈썰미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기에 믿고 맡길 수가 있었다.
불편하고도 귀찮은 만남들을 가지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 * *
이성준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짧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마도사라 칭송받는 산드라 블록의 파티의 기록을 홀로 경신해낸 탓일까?
세계 각국의 길드, 협회, 연합에서 안달이 난 것마냥 달려들며 계약을 바라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가 기준 미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보고드렸다시피 부협회장님이 최종적으로 선발해낸 곳은 한국의 5대 길드들인 불새, 사신 길드 그리고 일본의 아쿠아 길드, 중국의 패룡성, 미국의 뉴로까지 총 다섯 곳입니다.”
헌터 협회 본부의 회의실, 그곳에서 이어지고 있는 조강현의 보고에 이성준의 고개가 주억여진다.
“좋네요.”
숫자 자체는 적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곳이다, 모두 상당한 명성을 가진 곳들이란 말이었다.
어중이떠중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고태현이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주었다는 말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이성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흐르고 있던 때였다.
똑똑-!
“말씀하신 대로 VIP들을 모셔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전부 대화를 끝내두었던 부분인 만큼, 말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문이 열린다.
끼익-!
경첩 소리에 뒤이어, 열린 문 너머에서 5명의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의 모습에 이성준의 시선이 고정된다.
‘이예린?’
다른 세력과 달리 스카우터들이 아닌 마스터가 직접 방문을 해왔다.
‘무슨 생각인 거지?’
많은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세력의 우두머리, 길드의 마스터와 같은 직책은 기본적으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높은 자존감은 말할 필요도 없고, 대외적으로도 상당한 명성과 위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헌데 길드 마스터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FA라는 공식적인 계약에 직접 나섰다?
성공하게 된다면 본전, 실패할 경우 어렵사리 쌓아놓은 명성과 위엄에 흠집이 난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우두머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사활을 걸었다는 의지를 반영해낼 것일 수도 있었다.
현재로써는 어떤 방향성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각오 자체가 남다르다는 것은 확실했다.
‘기개는 나쁘지 않군.’
이런 이성준의 감정을 읽어냈는지, 묘한 웃음을 흘린 이예린이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당당한 걸음으로 회의실 내부로 들어선다.
“반갑습니다, 이성준이라 합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이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스카우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과거라면 몇몇 이들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통역이 따라붙어야 했겠지만 대마도사인 산드라 블록이 제작한 통역기로 인해 번거로움이 줄어들었다.
모두들 단박에 이성준의 말들을 알아듣고 인사를 건네 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뉴로 길드의 인사팀장, 제넷 맥커디라고 합니다.”
“귀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쿠아 길드의 총괄 인사 책임자, 호시노 마유키입니다.”
“패룡성의 풍룡대주, 진자운이라 하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신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정성백입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불새의 마스터 이예린이라고 해요.”
한국 내에서 이성준의 일화들을 직접 보고, 겪은 사신의 정성백과 불새의 이예린을 제외한 외국계의 스카우터들은 이성준을 바라보며 눈을 흘긴다.
‘이 남자가 이성준…….’
‘한국의 희망이라는 게 진실일지 궁금하군.’
‘……확실히 무골 자체는 훌륭하군.’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의 눈동자를 읽어 냈음에도 이성준은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는 이성준에게 중요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선 다들 앉으시죠.”
이성준의 말에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 스카우터들이 구비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들 사전에 저에 관한 자료들은 충분히 확인하셨을 테니까, 따로 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성준의 말에 스카우터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애초에 계약을 맺으러 와서 이성준이란 인물에 대하여 조사를 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생각하시고 있는 계약 조건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진 이성준의 말에 스카우터들의 표정이 변화한다.
미간을 구기는 이도 있고,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는 이들도 존재했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안에 담긴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당황.
이성준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다 모여서요?”
당혹 섞인 의문을 던져오는 사람은 불새의 이예린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스카우터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계약 내용을 발설하는 것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계약 내용은 비밀 엄수를 기본으로 해서 노출이 불가능한지라…… 이성준 헌터님께서 따로 번호를 배정해주시면 그에 맞춰서 순서대로 대화를 나누고 싶네요.”
이예린이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이성준에게 계약에 관한 설명과 해결법에 대해 제시를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두 번이나 계약을 한 이성준이 비밀 유지 조항을 모를 리가 만무했다.
‘……이렇게 해야 가장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다.’
애초에 다섯 명이나 되는 스카우터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가 이를 위함이었다.
‘시장의 원리상, 상호 간의 경쟁이 붙을수록 몸값과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헌터들은 갑(甲)이자 권력자라 할 수 있는 길드들의 영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그마저도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공개적으로 발설을 할 수가 없었다.
이는 곧, 기존에 유지되고 있는 비밀 유지 조항 자체가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헌터를 영입하기 위한 길드들의 꼼수라고 볼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성준은 길드들의 의도대로 휘둘려 줄 생각이 없었다.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약 내용을 공개할 마음이 없는 곳과는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으니 조용히 자리에서 떠나 주시면 됩니다.”
“…….”
단호한 이성준의 태도에 회의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스카우터들의 표정에서 분노나 불쾌감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길드들은 모두 고태현이 직접 선발해낸 자들이었다.
한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기존에 보였던 태도들까지, 까다로운 고태현의 심사를 통과해낸 길드에서 파견된 스카우터들이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성준의 태도를 마냥 좋게 봐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군. 나는 이런 조건에서는 계약을 진행하기가 힘들 것 같네.”
차가운 어조로 제 할 말을 끝낸 진자운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 당돌한 진자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성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흐른다.
‘패룡성의 진자운이라 했나…… 저쪽은 익숙하군.’
과거, 천 대륙에서도 몇 번씩 마주했었던 적이 있었다.
‘호인(好人).’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깊고 정순한 내공, 무게감이 느껴지는 언행, 정중한 태도, 본인들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해내는 절도 있는 모습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은 각양각색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내면은 모두 비슷했다.
‘자존심이 강하긴 하지만, 괜한 시비를 걸거나 협잡질을 할 인물은 아니다.’
실제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진자운은 별다른 말없이, 짧은 목례를 건네는 것으로 곧장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 직후, 고개를 돌린 이성준은 눈앞에 있는 스카우터들을 향하여 질문을 던졌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