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84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고민을 이어가던 사신 길드의 정성백이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다.
직후, 등으로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 사신도 이런 조건으로는 계약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좋은 계약을 이뤄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정성백 또한 회의실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셋.
‘불새, 아쿠아, 뉴로.’
이성준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로 스카우터들을 바라봤다.
“여러분들은 조건을 공개하실 의향이 있으신 건가요?”
“…….”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두 눈동자에 담긴 결의만으로도 그 의중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선 가볍게 계약금부터 시작하죠, 얼마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번에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불새 길드의 이예린이었다.
“2,500억을 제시할게요.”
“저희 아쿠아 길드는 290억 엔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90억 엔, 한화로 치자면 2,800억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허나 앞서 제시한 금액들은 일종의 탐색전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아쿠아 길드, 호시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예린이 다시 한번 입을 열어냈다.
“3,000억으로 상향하도록 할게요.”
“330억 엔, 길드 마스터님과 협의를 해봐야 하겠지만 이성준 헌터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허락해주실 겁니다.”
예상했던 대로다.
경쟁이 시작되자 금세 계약금이 치솟기 시작한다.
역시 스카우터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계약 조건을 듣기로 한 것은 실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성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흐르는 순간마저도, 계속해서 계약금이 치솟고 있었다.
“3,500억.”
산드라 블록 파티의 기록을 경신해내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세부 조항들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계약금만 보자면 SSS랭크의 기준에 달하고 있었다.
‘……이건 좀 놀랍군.’
가능성은 충분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어떤 변수가 개입하여 일을 망칠지 모른다.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마신, 이성준이란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스카우터들의 입장은 이런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최악의 경우, 투자금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카우터들은 계속해서 가격을 높이고 있었다.
“370억 엔, 한화로 치자면 3,550억가량 될 겁니다, 더불어 환전 시 발생하는 수수료 또한 저희 아쿠아 길드에서 모두 부담토록 하겠습니다.”
슬슬 한계치에 다다른 것인지 액수의 단위가 낮아지며, 추가적인 조건을 붙이기 시작한다.
초조해 보이는 호시노의 모습을 확인한, 이예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난다.
“3,600억! 추가로 제가 가진 불새 길드의 지분, 400억치를 양도해드리겠습니다.”
일순간 호시노의 시선이 휘둥그레진다.
“진심이십니까? 계약금만 4,000억을 지불하시겠다고요?”
앞서 말했다시피 SSS랭크의 헌터들조차도 계약금으로 받는 금액은 3,500억 가량이었다.
비록 이성준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은 상태라고는 하지만 현재 추정 랭크는 높게 쳐줘야 SS+랭크에 불과했다.
헌데 지금 불새가 제시한 금액은 자그마치 4,000억, 일반적인 SSS랭크의 헌터가 아닌 웬만한 하위권 랭커에 달하는 금액을 제시하고 있었다.
“네, 얼마든지요. 저희 불새는 이성준 헌터에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찬 이예린의 대답에 호시노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동시에 시선을 옮긴 호시노는 이성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다른 제안을 제시해냈다.
“비록 지금 제시할 수 있는 계약금은 370억 엔이 한계지만, 저희 아쿠아 길드는 추가적인 조건들로 이성준 헌터님이 최대한 많은 수익을 챙기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어지는 호시노의 말에도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이성준의 얼굴에, 이예린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흐른다.
승리를 예감한 것이다.
허나 그건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상황을 방관하기만 하던 뉴로 길드의 제넷 맥커디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4억 달러, 한화로 지급을 원하신다면 5,000억으로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제넷의 금액에 호시노와 이예린의 두 눈동자가 보름달마냥 휘둥그레졌다.
자연스레 이성준의 시선 또한 제넷에게로 향한다.
‘과연…… 명성 값을 한다는 건가.’
세계 10대 길드, 비록 말석이라고는 하지만 뉴로 길드는 당당히 그곳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에 달하는 길드라는 것이었다.
권력과 재력, 이 자리에 있는 길드들 중 그 어떤 곳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외 기본급, 인센티브, 부산물 처리 수수료 또한 모두 업계 최고 조건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이성준 헌터님께서 머무실 저택과 전용 차량, 전용 비행기까지 구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000억이 넘는 막대한 금액과 더불어 훌륭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부가 옵션들까지 따라붙는다.
랭커, 그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실력자들이 제시받는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제넷의 조건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인지, 호시노와 이예린의 얼굴에는 진한 그늘이 드리워져가고 있었다.
허나 이성준은 곧장 제넷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건 과해도 너무 과하군.’
세상에 일방적인 거래는 없다.
특히 뉴로 길드처럼 월드 클래스라 칭해지는 높은 곳에 위치해있는 기업이 손해를 보려 할 리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제넷까지는 그리 욕심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하지만 제넷은 어디까지나 스카우터에 불과했다.
너머의 존재들, 뉴로 길드의 핵심 간부들 또한 욕심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니, 비단 뉴로 길드의 간부들뿐만이 아니지.’
외국 길드와 계약을 맺을 시 해당 국가는 한국 헌터 협회에 비상 소집권한을 내어줘야 한다.
이는 곧, 미국 정부 그리고 헌터 협회 또한 본인들이 입은 손해를 메꿔내려 할 것이란 말이었다.
‘아마…… 나를 미국 소속으로 만들려 하거나, 계약에 위배되지 않는 교묘한 방법들을 사용해가며 지급한 금액에 걸맞은 업무를 맡기려 하겠지.’
뉴로 길드와 미국이라는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옭아매고 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기려 할 것이란 말이었다.
지금 뉴로 길드와 미국이 바라는 관계의 방향은 자신, 이성준이 생각하는 것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계약을 맺게 되면, 훗날 골치 아픈 문제들이 일어날 게 뻔하다는 거다.
‘굳이 분쟁을 만들 필요는 없지.’
분명, 뉴로 길드와 미국의 도움이 있다면 빠르게 편하게 황도의 길을 걸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머지않아서 걷게 될 길이다.
‘당장 조금 편하자고, 훗날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멍청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되지.’
더불어 눈앞의 스카우터들에게 머릿속 생각을 밝히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생각도 없었다.
한차례 고개를 주억이는 것으로 머릿속으로 생각의 정리를 끝마친 이성준은 웃으며 입을 열어냈다.
“모두 좋은 제안을 주셔서 곧장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네요, 진중하게 고민을 해본 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스카우터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이성준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자취를 감추었다.
* * *
그날 밤.
5성급 호텔의 숙소에서 통화를 이어가고 있는 제넷의 얼굴에는 진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통화 상대이자 직장 상사라 할 수 있는 마일로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보니까, 어때?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성준이 직접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펑크를 낸 거야?
“그건 아닙니다, 이성준 헌터는 분명 참석했습니다, 그저 제가 파악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
계속해서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며, 정적이 흐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스카우터로서 제넷이 파견된 것이 아니었다.
관찰 대상의 성장 한계점을 어느 정도 유추해낼 수 있는 S+랭크의 스킬, 리미트리스 비전(limitless vision)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읽어낼 수가 없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들이 두꺼운 벽을 이뤄낸 채로 리미트리스 비전의 능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마스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빅터 와이즈만, 뉴로 길드의 마스터이자 가디언즈의 멤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기세가 이성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보통 귀환자들은 이계에서 보낸 세월만큼 힘과 지식을 얻어오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귀환자들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에 달하는 세월을 이계에서 보낸 후에야 지구로 되돌아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조사했던 자료들에 적혀있기를, 이성준 헌터는 분명 이계에 다녀온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귀환자였다.
‘심지어 이성준은 지구로 돌아온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귀환자다.’
말 그대로 유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체 이계에서 어떤 생활을 한 거지? 정확한 성장 한계점은 어디인 걸까?’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제넷과 달리 수화기 너머, 마일로의 입에서는 기쁨 어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 좋네! 좋아! 정말로 우리가 찾던 마스터키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값은 얼마를 치르든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계약 성사시켜서 뉴로 길드로 데려와줘.
아까 전, 점심때 이성준 헌터가 계약을 보류했다는 보고를 올렸기 때문인지 마일로의 목소리에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허나 제안을 건넸을 당시, 차가워졌던 이성준의 눈매를 확인한 제넷은 차마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보긴 하겠지만…… 저희 뉴로 길드와 계약을 맺지는 않을 확률이 9할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혹시 돈 말고 따로 바라는 게 있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리미트리스 비전이 발동하지 않은 탓에 이성준의 능력과 한계점에 대해서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인사 팀장이란 직책은 오롯이 리미트리스 비전의 능력만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파악해 낸, 날카로운 눈썰미 또한 제넷을 인사 팀장이라는 자리에 올려 준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특정 길드의 소속이 되는 게 아닌, 리더가 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바라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일로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