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149화
일방적인 무시를 받는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당사자인 빅토리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애초에 말 한마디로 끊어 낼 수 있었다면 같은 영상을 수십 번 돌려 보지 않았겠지.’
옅은 한숨을 내쉰 빅토리아는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냈다.
“새로운 임무야, 방식은 여태껏 해왔던 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무슨 뜻인지 알지?”
임무에 관한 내용이 적힌 종이를 건네었지만 백무진은 여전히 바라보지 않았다.
계속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약속했던 대로 이번이 마지막 임무겠지?”
“이번 것까지 처리를 끝내면 한국 지부의 할당량은 다 채워지는 거니까, 임무를 강제하지는 않을 거야.”
“크흐흐……. 드디어, 드디어! 이성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광기마저 엿보이는 음성을 흘리고 있는 백무진의 모습에 빅토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흐른다.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보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빅토리아는 쉽사리 백무진의 의중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 백무진과 함께 일을 해온 만큼 그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여기 남는 게 어때? 너 정도 재능이라면 세계 귀환자 연합 내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단순히 백무진을 꼬드기기 위하여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내사 혹은 특별 임무를 주로 도맡는 수사심사관의 직책에 있는 만큼 제법 이름을 날린다는 귀환자들을 수없이 상대해왔다.
하지만 그 어떤 귀환자들도 백무진만큼 눈부신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백무진, 이 남자는 진짜다.’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했다.
실제로도 불과 3개월 만에 몇 번이나 벽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성과를 보였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무(武)의 은총을 받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으로도 나쁘지 않지만 아마… 향후 5년 안에 세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인물이 될 거다.’
백무진을 세계 귀환자 연합의 일원으로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란 말이었다.
“너의 직위는 내가 장담할게, 아니. 원한다면 내 수사심사관이라는 직책을 걸고 보증을 해줄 수도 있어.”
세계 귀환자 연합 소속의 수사심사관.
앞서 말했다시피 내사와 특별 임무를 도맡아서 처리하는 만큼 그에 따른 권력 또한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귀환자 연합장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고위 관료들조차도 빅토리아에게 연줄을 대기 위하여 갖가지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수사심사관, 빅토리아가 자처해서 보증을 해준다는 것은 성공 가도를 확정적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허나 흔히들 생각하는 성공, 대외적인 직위들은 백무진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보증? 직위? 그딴 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골치 아픈 업무들을 처리해야 하는 짐 덩이와 다를 바 없는 직책에는 앉으라고 해도 앉지 않을 거다.”
애초에 권력과 자리를 탐낼 것이었다면, 한국 귀환자 연합장의 자리를 태상천에게 넘겨주지도 않았을 거다.
백무진이 바라는 것은 더 강한 힘, 그리고 스스로가 나아갈 수 있는 무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이성준, 그 녀석과의 재회뿐이다.”
매일 생각해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성준과 만나야 할까?
기다려온 보람이 있을까?
기대하고 있는 것만큼의 결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허나 이제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이성준, 그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나를 즐겁게 해줄 거다.’
위용 넘쳐흐르던 눈빛과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는 오연한 시선.
가슴 한편에 숨겨놓고 있던 날카로운 비수 속에 숨겨진 싸늘한 죽음.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뛰어난 무위, 더불어 끝없는 가능성과 그를 뒷받침할 재능까지.
이성준은 말 그대로 모든 조건을 갖춰낸 인물이었다.
오랜 시간 인내해온 열매가 드디어 과실을 맺은 것이다!
‘분명… 황홀함이라는 감정을 선사해주겠지.’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낸 백무진이 머릿속으로 이성준과의 격전을 상상해보는 순간이었다.
쿵! 쿵!
심장이 제멋대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의 귀국이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군.’
자연스레 백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 * *
파격적인 기자회견으로 인해 패룡성주, 위지강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려있을 무렵.
위지강과 그를 따르는 패룡성의 간부들은 한국으로 귀화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귀화를 한 헌터들은 몇몇 존재하긴 했지만, 반대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헌터들은 손에 꼽힌다고 할 수 있었다.
패룡성주, 위지강과 같은 유명세를 가진 헌터일 경우는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손에 꼽히는 강대국으로서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중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구태여 약소국이라 불릴 한국에 소속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 유례없는 일인 만큼 중국 내에서도 상당히 격한 반응이 일어났다.
일반적인 시민들의 입에서도 불쾌감 어린 말들이 흘러나왔고,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는 몇몇 이들은 패룡성의 간부들을 배신자로 낙인찍고서 모조리 다 숙청해야 한다며 과격함을 보이기도 했다.
허나 현재 북부의 관리자라 할 수 있는 류우녕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사천리로 패룡성의 간부들의 귀화들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위지강을 비롯한 패룡성의 간부들은 아무런 큰 문제 없이 한국인으로 귀화를 해냈다.
깔끔하면서도 신속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낸 만큼 이성준은 바로 앞의 소파에 앉아 있는 부협회장, 고태현을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낼 수 있었다.
“제가 중국 쪽은 문제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정말 말씀하신 대로 됐군요.”
정부 기관, 그리고 헌터들과 관련된 일인 만큼 그 누구보다도 위지강을 비롯한 패룡성의 간부들의 귀화에 관련된 소식을 접해냈을 때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북부의 주요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위지강과 패룡성의 간부들을 중국에서 아무런 연유 없이 귀화를 허락해줬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성준 헌터가 직접 주도한 일이었기에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하필 상대가 근방의 국가들을 상대로 수많은 갑질을 부려온 중국인만큼 마냥 안심을 할 수는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꿔내는 놈들인 만큼 분명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패룡성의 귀화를 빌미로 그간 잃었던 이권들을 다시 되찾아내려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어렵사리 쟁취해낸 대한민국의 권리들이 다시 한번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인 만큼 다소 머리가 아파올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서 충돌을 하게 된다면… 상대가 상대인 만큼 모든 것을 지켜낼 수는 없었겠지.’
분명 국가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을 거란 말이다.
물론, 이성준 헌터님이 나타나기 전처럼 허무하게 권리들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대국과 대립하는 것인 만큼 아주 지독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싸움이 되었을 거다.
때문에 자신, 고태현은 말 그대로 사활(死活)을 걸어낼 생각이기도 했다.
헌데 이런 굳은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의 태도는 너무나도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중국이 보여 왔던 행실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허무맹랑한 일인 만큼, 자연스레 고태현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의문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가벼운 술법들을 몇 가지 사용했을 뿐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를 내뱉는 이성준의 모습에 고태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맙소사…….”
부협회장으로서 수많은 헌터들에 대한 정보들을 접해왔기에 술법이란 것이 얼마나 난해하고 어려운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 조작 계열을 다뤄낼 수 있는 술법사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굉장히 위험하고,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술법사가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것인데, 심지어 이성준은 무공을 다뤄내는 무인(武人)이다.
“…술법까지 익히고 계신 거였습니까?”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고태현의 모습에 오해가 쌓였음을 인지한, 이성준은 덧붙여서 설명을 해주었다.
“제가 직접 사용한 게 아니라 유능한 수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간결했지만 확실한 이야기에 상황 자체는 이해가 갔지만 놀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항시 이성준 헌터님을 주시하고 있는 나와 헌터 협회조차도 파악해내지 못한 수하가 있단 말인가?’
한국 헌터 협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고 은밀하면서도, 정신 조작의 술법을 다뤄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까지 갖추고 있다는 거다.
세간에 드러난 것 이상의 전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었다.
‘……정말 그 끝을 알 수 없는 분이군.’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고태현의 모습에 이성준이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막 엄청난 건 아닙니다.”
메타모르포제라는 스킬과 비형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본래의 방문 목적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성준은 연이어 입술을 달싹여내는 것으로 대화의 주제를 옮겨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이번에 한국으로 귀화를 한 패룡성의 일원들도 인피니티 길드원으로서 파주의 수비 병력으로 배치할 생각인데 서류 처리들을 조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이라니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곧장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려낸 고태현은 책상 밑에 손을 내뻗어내며, 묵직한 서류 봉투를 꺼내어낸다.
“일전에 요청하신 대로 인피니티 길드의 본사 이전에 관련된 문제들은 모두 처리해뒀습니다.”
짧은 순간, 봉투 안에 든 서류들을 꺼내어 확인을 끝마친 이성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났다.
“매번 감사합니다, 부협회장님 덕분에 길드 일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겠네요.”
“직접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아서 기다렸던 것뿐이죠.”
이성준의 말에 고태현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현재 세계의 가장 큰 화두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이성준 헌터. 그가 직접 창설한 인피니티 길드가 만들어 낼 파급력은 대한민국을 한층 더 성장시켜 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성장, 밝은 미래를 바라고 있는 고태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달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능력이 닿는 데까지 서포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이성준과 고태현,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두 사람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