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58화
앞서 보았던 네임드들과는 확연히 격이 다르다.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월등히 깊게 와 닿을 정도였다.
‘압도적이다.’
이클립스가 내뿜는 힘은 공간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못해, 지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이클립스는 그저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들을 일으켜 내고 있었다.
“으아아악-!”
“제발! 제발! 누가 이 불 좀 꺼 줘!”
고통에 찬 헌터들의 외침들이 일대에 메아리치듯이 울려 퍼진다.
머릿속으로는 헌터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쉽사리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돕는다고? 대체 무슨 수로?’
뉴로 길드의 부마스터로서 수많은 몬스터와 강자들을 만나왔기에 알 수 있었다.
‘닿지도 못할 거다.’
대적할 마음조차 품어낼 수 없을 정도로,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격차였다.
때문일까?
정령왕 또한 제임스를 비롯한 랭커들을 적으로서 분류하지 않고 있었다.
[…….]
지독할 정도로 무심한 눈빛, 마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미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경멸이라는 감정은 확실히 담겨있었다.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이클립스가 미간을 구겨 낸 채로 손바닥 위로 거대한 불꽃의 구체를 만들어낸다.
휙-!
[사라져라.]
이클립스가 가볍게 불꽃의 구체를 내던지는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아낸 제임스가 다급하게 몸을 날려낸다.
콰광-!
SSS급 스킬인 아이언 엠페러, 노우스와의 치열한 공방에도 균열조차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하던 갑옷들이 단숨에 녹아내린다.
화르륵-!
불길에 휘감긴 채, 쓰러지듯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제임스의 신형에 절망은 더욱더 빠르게 퍼져나간다.
[크하하-! 미물다운 표정이구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클립스의 입가에 진한 호선이 그려진다.
[그렇게 공포에 떨며 죽어가거라.]
흡사 마왕과도 같은 선언을 한 이클립스가 손바닥 위에 다시 불꽃의 구체를 만들어내 또 쏘아 보낸 순간이었다.
헌터들의 사이를 가로질러 낸, 2m에 달하는 거구의 덩치를 가진 사내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주먹을 내뻗어낸다.
[……?]
콰광-!
이클립스가 내던진 불꽃의 구체를 허공에서 꿰뚫어 낸 존재가 폭소를 터뜨려낸다.
“크하하! 드디어 나타났구나!”
높게 치솟는 목소리에는 희열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도 공포에 빠져있는 다른 헌터들과 얼굴과 달리 사내의 입가에는 씨익-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나, 백무진이 네놈, 이클립스에게 정정당당한 결투를 신청하마! 참고로 거절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거라.”
패기 넘치는 백무진의 모습을 이클립스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여전히 느껴지는 감정은 경멸뿐이었다.
“앞서 상대한 떨거지들이랑은 확연하게 다를 테니, 제대로 싸움에 임하는 게 좋을 거다.”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불쾌한 감정을 내비친 백무진은 말아 쥔 주먹에 푸른빛 기운을 모았다.
파앗-!
한 줄기의 광선처럼 쏘아진 그 기운은 아슬아슬하게 이클립스의 머리카락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큰 웃음을 터트린 이클립스가 양팔을 활짝 펼치고는 등 뒤로 수십 발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래, 다른 미물들과 달리 그래도 여흥거리 정도는 되겠구나, 어디 한번 발버둥 쳐 보거라.]
싸늘해진 이클립스의 표정을 확인한, 백무진은 입가에 진한 호선을 그려 낸 채로 신형을 앞으로 쏘아낸다.
“신명 나게 놀아 보자꾸나!”
백무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 기운이 폭발하듯이 치솟는다.
이후 구체들이 쏟아지고, 폭음이 일어났다.
콰르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며, 마치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 * *
쾅-! 쾅-!
쉴 새 없이 허공을 수놓고 있는 거대한 폭발들에 미즈노하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백무진이 이 정도로 강했다고?’
투마(鬪魔), 백무진.
한국 귀환자 연합의 부연합장의 직책에 앉아있던 인물로서 과거, 한국의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던 인물인 만큼 사전에 철저한 조사를 끝마쳐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즈노하라는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공식적인 랭크는 SS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이계에서 본연의 무위를 갈고닦은 귀환자들은 일반적인 각성자들과 달리 포스 시스템의 의존도가 다소 낮은 만큼 랭크 이상의 힘을 보이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백무진의 힘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SS랭크의 헌터가 상위권의 랭커인 제임스마저 일격에 쓰러뜨린 몬스터와 동수를 이룬다고?’
과해도 너무 과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을 숨겨낸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두 가지뿐이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현실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티팩트.’
빠르면서도 가장 확실한 성장세를 보일 수 있는 방식인 만큼 현재로서는 제일 현실성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애석하게도 백무진의 몸에 걸진 물건이라고는 위아래로 입고 있는 상, 하의가 전부였다.
아티팩트로 인한 성장이 아니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하나…… 백무진, 본인 스스로가 성장을 해낸 건가?’
터무니없는 가설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눈앞에 벌어진 명백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백무진 또한…… 이성준과 같은 이레귤러, 규격 외의 존재다.’
약소국이라 생각해왔던 한국에서 두 마리의 용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란 말이다.
‘한국에 대체 무슨 변동이 있던 거지?’
너무나 놀라웠고,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입안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닿을 수 있는 목표라 생각했거늘 허황된 꿈이었던 건가.”
이성준과 백무진이 존재하는 한 미즈노하라 그리고 일본이 꿈꿔왔던 목표, 아시아의 최강이란 자리에 도달할 수 없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마냥 달가운 상황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너무나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백무진이라면……!’
감히 맞설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이클립스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자연스레 두 눈에 희망을 품어낸 미즈노하라의 시선이 격전을 치르고 있는 백무진과 이클립스에게로 향했다.
* * *
노우스, 나이아르, 실라이스, 글레어르. 랭커급에 달하는 네임드 몬스터들이 나타났을 당시, 백무진은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려 하는 본능을 억눌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는지 손바닥에서는 핏물마저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강자와의 전투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백무진에게는 고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생을 하늘이 알아준 것일까?
망령의 정령들을 포함한 모든 네임드 몬스터들이 쓰러진 직후.
마침내 망령의 정령들의 황제, 이클립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인내할 필요가 없었다.
곧장 강기를 휘감은 주먹을 말아 내뻗어내며 전장을 향해 뛰어들었다.
인고의 시간에 보상을 받을 차례가 왔다.
온몸을 전율케 하는 이클립스의 힘은 가히 훌륭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투쟁과 싸움, 스스로의 성장을 바라는 백무진에게 있어 이클립스는 그야말로 최고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실제로도 날아오는 불꽃들을 갈라내고, 이클립스를 향해 파고들고 있는 백무진의 두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반짝 빛나고 있었다.
“과연 블랙 게이트! 훌륭하구나! 너무나 훌륭해!”
전신에 호신강기를 둘러 낸 채 동작을 이어가고 있는 백무진의 손에서부터 막대한 양의 기운이 치솟기 시작한다.
쾅-!
차분한 표정으로 불꽃의 방어막을 만들며 거리를 넓게 벌린 이클립스의 눈에 으스스한 빛이 흘렀다.
그 뒤를 따라 거대한 빛이 하늘 위에 모여든다.
쿠구궁-!
요란한 굉음을 토해내는 하늘 위에 모여든 빛들을 향하여 검지를 세워 낸, 이클립스가 명령하듯이 읊조리는 순간이었다.
[내려쳐라.]
모여 있던 빛줄기들이 한 줄기의 벼락이 되어서 백무진의 머리 위로 내려친다.
허나 빛줄기는 백무진의 육신을 해하지 못했다.
[제법이구나.]
푸른빛 기운과 함께 일어난 거대한 거북이의 형상이 백무진의 육신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일반적인 거북이가 아니었다.
거북이의 등껍질, 용의 형상을 한 머리와 꼬리가 꼬여져 있는 모습은 사신수 중 하나인 현무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단단한 현무의 등껍질은 연이어 쏟아지는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클립스의 얼굴에는 아직도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허나 결국 미물의 힘에 불과하구나.]
비웃음을 흘려낸 이클립스가 손바닥을 내뻗어내는 순간이었다.
콰광-!
갑작스레 대지가 높게 치솟아 오르며 거대한 현무, 그 중심에 있는 백무진을 가둬낸다.
동시에 뚫려 있는 허공 위로 불, 물, 대지, 바람 원소의 힘이라 불리는 것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완전히 하나로 뒤섞여버린 원소의 힘들은 거대한 빛이 되어 백무진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이만 사라지거라.]
쿠구궁-!
내려치는 원소의 힘이 현무의 등껍질을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부숴내어 버린다.
그 안에 있던 백무진의 신형 또한 폭발에 삼켜진다.
[그래도…… 나름 색다른 여흥이었구나.]
승리를 예견한 듯한 이클립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내고 있던 때였다.
“내가 분명 방심하지 말라 했을 텐데.”
씨익.
입가에 미소를 피워낸 백무진의 얼굴이 이클립스의 시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네놈…… 설마?!]
두 눈을 가늘게 뜬 이클립스가 다급히 손을 내뻗어내려 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삽시간에 전신을 휘감은 현무의 머리와 꼬리가 이클립스의 육신을 강제로 묶어냈기 때문이었다.
“너무 늦었다.”
눈앞의 이클립스는 이성준과 필적할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허나 이성준만큼 예리하거나 날카롭지는 않았다.
그저 막대한 힘을 마구잡이로 다뤄내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시 나를 진정으로 즐겁게 해주는 건 이성준 하나뿐이구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를 피워낸 백무진이 주먹을 말아 쥔다.
“이만 죽어라.”
선고를 내린 백무진이 주먹을 앞으로 내뻗는 순간이었다.
전신을 휘감고 있던 현무의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이클립스의 상체를 집어삼켜낸다.
콰직-!
하체밖에 남지 않은 이클립스의 육신을 확인한, 헌터들의 입에서 자연스레 희망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치웠나?!”
“백, 백무진이 이긴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하체밖에 남지 않은 이클립스의 모습은 도저히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으아아!”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블랙 게이트를 막아냈다!”
함성 소리와 함께 기쁨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몇몇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허나 정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백무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승리를 확정 짓는 알림이라 할 수 있는 포스 시스템이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클립스는 살아 있다……!’
다급히 고개를 돌린 백무진은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체에서 솟아나고 있는 진정한 이클립스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