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치렁치렁한 백금발과 뾰족한 귀.
호리호리한 체형에 가죽옷.
프린스 어쩌고 하던 그놈이었다.
“미쳤다니,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천궁은 정색했다.
하지만 곧바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내가 좀 세게 받아쳤거든.
“그냥 죽여 버릴 걸 그랬나? 나는 적을 살려 둔 적이 없거든.”
“흠흠! 안 그래도 그 일에 관해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읊어 봐.”
“……일단은 목숨을 구해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천궁.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일단은?”
“제가 위기에 처한 게 그쪽의 반격 때문 아닙니까? 갑자기 접근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오! 뻔뻔하게 나오겠다. 이건가?”
“그게 사실이긴 하니까요.”
생긴 건 멀쩡한데.
꽤 뻔뻔한 놈이었다.
그래도 내심을 숨기진 못했다.
굳게 다문 입술을 보아하니.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다이아가 C구역까지 뭣 하러 왔겠는가.
‘목적은 영웅 놀음이겠지.’
그러나 꼴사나운 모습만 보인 채 퇴장하고 말았다.
아마 이불킥을 어지간히도 했을 터였다.
“신선하긴 하네.”
사실 오늘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를 단신으로 막아냈다.
그럼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상황.
사람들은 신정부의 대응만 씹고 뜯기 바빴다.
게다가 기껏 구해 줬더니 하는 소리가 뭐?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었다.
천궁의 행색이 말이다.
조금 결이 다른 미친놈이라고나 할까?
“근데 그 귀 말이야. 쓸데없이 너무 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새겨듣는 게 좋을 거다.
진짜 엘프를 보고 온 사람의 말이니까.
나는 짤막한 조언을 남긴 채.
발길을 돌리려 했다.
결투할 것도 아니고.
괜히 아웅다웅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만 아깝지.
‘인훈이 텐트나 빨리 찾아야지.’
오늘도 길바닥에 널브러져 자야 할 판이지 않나.
그런데 천궁이 발길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왜?”
“그래도 이렇게 그냥 가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어쩌라고.”
“원하는 바를 말씀해 보시죠. 합당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아하? 목숨값을 치르겠다?”
“예,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너무 좋아하면 모양 빠지니까.
영웅왕 체면이 있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100억만 줘.”
“그 정도야 충분……. 예에?”
“집을 하나 사야 하는데 말이야. 그 정도는 든다고 하더군. 플레이어로 등록되어서 C구역 거는 아예 안 되고.”
“아니, 뭐가 그렇게 비싸요?”
“나는 신정부와 계약을 안 했으니까.”
“아!”
이제야 내 상황을 이해한 듯.
천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정부의 휘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 고달픈 게 사실이니까.
“근데 굳이 왜 그런 불편을 감수하시는 겁니까?”
“나는 꼭두각시로 살고 싶지 않거든. 너도 그래서 방벽에 나온 거 아닌가?”
“예?”
“기사 댓글을 보니까 그러던데. 다이아 팀은 사냥터로 가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말이야.”
“…….”
대뜸 대화가 뚝 끊겼다.
천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작게 진저리를 쳤다.
어떤 생각으로 잠시 멍해졌다가.
현실로 급격히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100억은 무립니다. 어지간히 잘 나가는 다이아도 그런 거금을 턱턱 내놓진 못할 거예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괴수급 수십 마리에 말살급까지 잡아도 달랑 30억.
세금을 떼지 않았는데 이 정도였다.
우린 아직 신생팀이거든.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떻겠나.
아마 더욱 금액이 적을 테지.
나보다 훨씬 많이 뜯기니까.
어차피 진짜 받을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됐어. 그냥 해 본 소리니까. 내가 그렇게 양아치로 보이냐?”
나는 천궁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하지만 녀석은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가시는 건 좀……. 여기까지 찾아온 전 뭐가 됩니까?”
“거참, 되게 끈질긴 놈이네. 뭐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적절한 보상안을 협의하시죠.”
“보통 이럴 때는 얼마나 주지?”
“딱히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그래?”
이번에 얻은 돈이 30억에 불과하다지만.
기간으로 따지자면 고작 하루였다.
몬스터 때려잡는 거야 내 전문 영역.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B구역의 드림 하우스를 가질 수 있으리라.
박종욱이 보여 줬던 바로 그 매물 말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지낼 곳만 있다면……. 오호?’
문득 천궁의 멀끔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어디든 아무 상관 없었다.
벽과 천장이 있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그럼 신세 좀 지자.”
“예?”
* * *
결국 나는 천궁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오래오래 살 수는 없었다.
시민권 없이 A구역에 체류하는 건 2주가 한계니까.
연장이 가능하긴 한데.
기한이 될 때마다 갱신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매우 매우 귀찮았다.
“제약이 꽤 많을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지.”
나는 곧장 짐을 풀었다.
그런데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호화 주택이었으니까.
‘B구역은 그냥 창고 같은 곳이었구나.’
굉장히 넓고 사치스러웠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널찍한 정원과 십수 개의 방.
여러 명의 고용인까지.
펜드리아의 귀족 저택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거기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현대적인 색채가 가미되어서 그런 듯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요청해도 됩니다. 고용인들에게 손님이라고 말해 두었으니까요.”
“어……. 그래.”
“그럼 편히 쉬세요.”
“아,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여긴 얼마쯤 하지?”
천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계산하기가 좀 복잡한 모양이었다.
“태성 님은 상당히 드문 경우라서 말이죠. 일단 저는 신정부와 계약한 상태기에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받습니다. 대신 세금이 굉장히 세지만요.”
“그런 거로군.”
“이런 매물이 얼만지는 따로 알아봐 드릴게요. 인맥을 통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고마워.”
“네, 그럼.”
천궁이 나가자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솔직히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푹신한 잠자리가 말이다.
“좋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애완견과 만난 들개가 된 느낌이랄까?
‘신정부의 휘하에 들어가면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묘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사냥개 노릇만 10년.
“하라는 대로 해서 제대로 된 적이 없지.”
마왕도 다 퇴치하지 못했다.
거기다 쫓겨나기까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구속만 낳을 뿐.’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으론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
그래서 영웅 행세를 했던 거 아니겠나.
거처에 관해서도 똑같은 기준이 필요할 듯했다.
“차근차근 올라가자. 티어든 명성이든 다 얻으면 그만 아니냐.”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정신 승리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더럽게 좋네.’
이곳은 A구역.
선명한 햇빛이 쏟아지는 지역이었다.
C구역과는 차원이 다른 환경.
공기마저도 다르게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알고 나니,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가.”
몰랐을 때는 그냥저냥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래를 그려보면서.
* * *
내 일상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A구역 사냥터는 여전히 출입이 금지된 상태.
사냥은 정화된 땅으로 가야만 했다.
팀 사무실로 들어서려는데.
문득 일단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요!”
나는 기자들이 또 찾아온 줄 알았다.
하나같이 흰 종이와 펜을 손에 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상과 다른 발언을 했다.
“영웅왕 님! 사인 좀 해 주세요.”
“사진 한 번만 부탁드려요!”
“조, 존경합니다.”
나는 얼떨결에 종이를 받았다.
솔직히 이건 예상 못 했다.
이토록 격렬한 반응이 나올 줄은 말이다.
온라인에서는 나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으니까.
지나가다가 도와준 플레이어 중 하나였지.
하지만 C구역 주민들은 다르게 느꼈나 보다.
괴발개발 사인을 해 주는 동안.
이러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집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같은 빈민들에겐 판잣집이 전 재산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쫄쫄이 입고 킹콩을 때려잡으실 때부터 팬이었어요!”
꼭 저렇더라니까.
거슬리는 발언을 섞는 놈들이 있어요.
‘확 조져버릴라.’
어쨌거나 고맙다는 말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린아이도 인사하러 올 정도였으니까.
웃는 얼굴로 사인지를 받아 가는 사람들.
감회가 참 남달랐다.
“그래. 다들 수고하게.”
그렇게 조촐한 사인회가 끝났다.
이윽고 나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끝없이 사인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잠시 시달린 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만큼.
“아주 그냥 스타 플레이어가 되셨네요?”
그런데 문득 위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정인훈이 방긋 웃고 있었다.
“어우! 못생겨서 한 대 칠 뻔했네.”
“뭐라고요! 저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거든요.”
“누가 그래?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봤으면서.”
“으억! 갑자기 왜 말로 때리십니까? 그러는 태성 님은요.”
“어…….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빌어먹을 여신.
나의 파릇파릇한 20대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날 모솔로 만들다니, 다시 만나면 넌 진짜 뒈졌다.’
나는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이윽고 나는 건설 현장을 돌아보았다.
일을 맡긴 지 벌써 2주.
한데, 상황은 영 지지부진했다.
“아직 기초 공사도 제대로 못 한 거 같네. 이게 맞아?”
“중장비를 운용하기 어려워서 그래요. 진짜 큰 거 할 때만 부르고, 나머진 인력으로 해결하는 중이죠.”
“그게 돼?”
“네, 근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C구역 사람들은 금전에 약했다.
악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워낙 없이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부가 매우 적었다.
은신처를 만드는 일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하지만 너무 느렸다.
이대로는 공사가 년 단위로 걸릴지도 몰랐다.
“밝혀져도 상관없으니까, 아무나 들여서 써.”
“저는 상관있어요. 최소한의 검증 절차는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우호적이고, 입 무거운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렇죠.”
“금방 구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에헤이! 저도 못 한 일을 태성 님이 어떻게 하시게요.”
“어쭈? 무시하네.”
“무시가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거죠.”
“좋아. 그럼 내기 하나 하지. 적절한 인력을 제공하면, 내 밑에서 계속 일하는 거다.”
“얼마든지요. 그럼 제가 이겼을 땐 무보수로 지켜 주는 겁니다. 일도 시키지 않고요.”
“좋아.”
정인훈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몇 분 뒤.
녀석은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사정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곧바로 수십 명의 장정이 도착했거든.
“아니, 이 많은 사람을 어디서 구했어요?”
어이없어하는 정인훈.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뭐 하게. 결과가 중요한 거 아냐?”
“그래도 알아두긴 해야죠. 아무나 막 쓸 수는 없잖아요.”
정인훈은 끝까지 트집을 잡아보려 했다.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팬클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