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조태수 습격 당일.
그날 밤.
수자원공사에서 굉음이 일었다.
콰광―!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신형 정화기.
높은 보안을 자랑했던 금고문.
두꺼운 쇳덩이가 깔끔하게 뜯겨 나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내가 벌인 짓이었다.
두 연구원의 자부심 가득하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러게. 사람을 너무 믿지 말았어야지.”
정화된 땅에는 큼지막한 수조가 건설되었다.
나는 거기다 정화기를 설치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
물길만 끌어오면 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염된 물이야 도시밖에 차고 넘쳤으니.
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되게 악당 같았던 거 알아요?”
“너보다 더할까. 이 모든 걸 계획한 게 누구더라? 따지고 보자면, 너나 조태수나 똑같은 놈들이지.”
“크흠! 결국에 그걸 해낸 사람은 팀장님이잖아요.”
“얼씨구? 농장이 필요하다면서 바득바득 우길 때는 언제고?”
“…….”
오늘도 정인훈은 말싸움을 이기지 못했다.
괜히 덤볐다가 처발리기만 했지.
어쨌거나 이제 기반은 확고했다.
농장이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그렇다고 돈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당분간 가축은 덮어 놓고 마이너스거든.
‘저 녀석들이 커서 새끼를 낳아야만 수익이 발생할 테니까.’
그래도 농장에서 곡물을 생산하기 시작하면.
사료비가 확 낮아질 것이다.
거기다 추가 수익까지 있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이제는 정인훈에게 모든 걸 맡겨도 될 듯했다.
“이제 여긴 신경 안 쓴다?”
“예? 갑자기 손을 떼신다고요?”
“너 굿즈 팔아서 돈 좀 만졌잖아. 그걸로 운영비 충당하면 되겠네.”
“헙! 그, 그걸 어떻게?”
“사람들이 대놓고 우리 깃발 흔드는데, 그걸 모르겠냐?”
“원래 옆에서 뭔 일이 터져도 별 신경 안 쓰시잖아요. 본인한테 별 영향만 없다면 말이죠.”
“이 새끼가? 날 너무 잘 알아?”
“하하! 오랫동안 모신 덕 아니겠습니까?”
“개소린 집어치워. 이제 돈 달라고 하면, 조져 버릴 줄 알아.”
“그, 그럼 급전이 필요한 경우는 어쩌죠?”
“네가 잘하는 일을 해.”
“…….”
굿즈 수익금을 숨긴 정인훈.
나는 녀석을 박살 내지 않았다.
대신 운영비를 몽땅 넘겼지.
적합한 벌이었다.
이러면 미친 듯이 돈을 벌 테니까.
조금이라도 남겨 먹으려면 말이다.
횡령하면 어떡하냐고?
그럴 일은 없었다.
농장을 돌리기에도 빠듯할 거거든.
거기다 여긴 정인훈의 목숨 줄.
허투루 하진 않을 것이다.
‘관리도 훨씬 편하지. 이따금 와서 둘러봐도 뻔히 다 나오니까.’
나는 정인훈의 어깨를 툭 쳤다.
놈은 얼빠진 표정이었다.
아마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농장을 운영할 생각에 말이야.
이제 이곳은 정인훈에게 맡겨두고.
훨훨 날아 올라갈 차례였다.
어딜 가냐고?
“티어 올리러.”
이 바쁘신 몸이.
농장에만 힘을 쏟을 순 없잖은가.
게다가 번듯한 집도 얻어야 하는데 말이다.
얼른 이 거지 같은 빌라에서 벗어나야지.
한시라도 빨리.
* * *
영웅왕 팀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같은 A구역이긴 한데.
사냥터가 달랐거든.
“수고해.”
“예, 팀장님. 고생하십시오.”
팀원들은 터틀 베어.
나는 가제트 구울.
오늘따라 대기실이 한산했다.
“평소보다 더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마인 때문인 것 같았다.
그놈들이 한울 북부에서 아직 준동하고 있었거든.
상황이 심각한 듯했다.
상위 플레이어에게도 동원령을 내릴 만큼.
‘역시 계약하지 않길 잘했어.’
아마 시시때때로 끌려갔을 것이다.
우린 규모가 작은 팀이니까.
당연히 나는 빡쳤을 테지.
또 그런 해괴한 꼴은 못 보는 성미라.
그럼 어떻게 되겠나.
영웅왕 팀은 미운털이 박힐 것이다.
신정부로부터.
‘그렇다고 완전히 척져선 안 돼. 거리를 두면서도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야지.’
예언가는 섬세하고 치밀한 성격.
딱 견적이 나오지 않나.
사람 하나하나 가려가며 만나는 것만 봐도.
더럽게 까탈스러운 인간이었다.
한울은 그런 자의 소굴.
장단을 맞춰 드려야지.
어쩌겠는가.
“최태성 님?”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다과를 집어 먹으면서.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자였다.
사냥터 관리인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혼자서는 진입이 어렵겠습니다.”
“허!”
이건 또 뭔 소린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거잖아.
방금의 웃음은 뭔 개소리냐는 의미였다.
그런 기색을 알아챈 모양인지.
관리인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허가를 받으신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며 가며 자주 뵀는데, 설마 제가 모르는 척하고 이러겠습니까?”
“그럼 왜?”
“초인관리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당분간은 소규모로 출입하게 하지 말라고요.”
“이런…….”
나는 곧장 정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리인이 소용없을 거라는 말을 했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
혹시 웬 또라이가 구라를 쳤을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정의찬은 안 좋은 소식만을 전했다.
―맞습니다. 초인관리부 장관령으로 소규모 팀 입장을 전면 차단한 상태입니다.
“아니, 뭐 그딴 게 있어?”
―비상 상황이라 플레이어의 안전을 우선하겠다는 취지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에는 좀 따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
나는 탄식을 터트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 또한 곤경에 처했을 것 아닌가.
거기도 인원이 네 명밖에 안 되거든.
“우리 팀은?”
―이번 장관령에서 지정한 소규모 팀이란, 최소 인원에서 한 명을 더한 겁니다. 총 넷이죠.
“아, 그건 다행이로군. 아니, 잠깐만. 이게 좋아할 일인가?”
―어, 음…….
정의찬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뭐라고 할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런 난데없는 상황.
남은 건 뭐겠는가.
욕밖에 없지.
―죄송합니다만 이만 끊겠습니다. 워낙 바빠서 말이죠.
감찰실은 장관 직속.
가장 힘이 센 부서였다.
문의가 엄청나게 올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손해를 보는 사람이 더러 있긴 할 테니까.
뚝.
‘돌아 버리겠네.’
남은 선택지는 하나.
터틀 베어를 잡으러 돌아가는 것뿐.
A구역 상위 사냥터의 이점은 누릴 수가 없었다.
현실이 이런데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따로 사냥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두고 볼 리가 없겠지.”
그렇다고 예전처럼 혼자 휩쓸고 다니는 것도 안 될 터였다.
애초에 장관령이 내려온 이유가 뭔데.
플레이어들을 보호하려는 조치.
아마 거기까지도 제약을 둘 터였다.
왠지 모를 불쾌감.
아무래도 이건 형평성 때문인 듯했다.
높은 티어는 잘 동원되지 않으니까.
형평성 차원에서 말이지.
‘딱 나를 겨냥한 꼴이네.’
어쨌거나 한숨만 나오는 결과였다.
나는 대기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김이 팍 샜다.
기분도 꿀꿀한데.
사냥은 무슨.
이참에 농장 돌아가는 거나 구경할 생각이었다.
한데, 관리인이 다시금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최태성 님,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왜 또?”
“다름이 아니라, 다른 팀에서 합류를 권했는데요. 두 팀이 합치면 최소 인원을 넘긴다고…….”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허탕 치는 것보다야 훨씬 낫긴 하니까.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데, 대기실로 돌아가니.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거만한 자세로.
“이중흰격자?”
“……그딴 별명은 언제 지었어?”
“네놈 하는 꼴을 보니까, 딱 그렇더라고. 근데 날 초대하다니, 의외로군.”
“딱히 널 선택한 건 아니야. 관리인이 한 명 남는다고 해서 불러오라 했을 뿐.”
“부킹 당한 것 같아서 기분 되게 오묘하네.”
“뭔 소리야? 그래서 안 할 건가?”
“흠.”
나는 침음을 흘렸다.
이중희 패거리의 팀 구성.
원거리 딜러와 힐러가 한 명씩이었다.
나까지 총합 네 명.
‘포지션 구성은 나쁘지 않은데?’
영웅왕 팀에서 정중동만 빠진 느낌이었다.
근접 딜러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 역할은 내가 할 테니.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이번에는 몇 대 몇으로 나누는 거지?”
“지난번처럼 8은 누가 가져가냐고 하면, 진짜…….”
“내가 설마 몰라서 그런 소릴 했겠냐?”
“옛말에 설마가 사람을 죽여 버린다고 그랬는데.”
“아, 농담이었다고 등신아.”
“후! 좋아. 그때와는 조건이 다르니까, 통상적으로 가자고. 탱커와 힐러가 30%, 딜러는 20%.”
“그럼 계산이 안 맞지 않나?”
“잉?”
이중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인 분배 비율은 4:3:3이었다.
귀족 포지션인 힐러가 많이 가져가는 건 기본.
하지만 소수 정예 팀에서 국룰을 따르기는 좀 어려웠다.
계산이 복잡해지는 데다가.
딜러 쪽이 불리해지거든.
‘이런 데서 손해를 볼 수는 없지.’
내가 왜 30%만 받는단 말인가.
누구 좋으라고?
“나도 힐러거든. 그렇게 계산하면 110%가 된단다. 이 천민 클래스들아.”
“…….”
* * *
나는 힐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신성력을 보여주고 나서야 말이다.
그냥 신분증 꺼내면 끝나는 거 아니냐고?
“이 자식들이 도통 믿어야 말이지.”
“젠장, 무슨 힐러가 가제트 구울을 양학하고 다니냐? 그게 말이 돼?”
“그냥 되던데? 왜 못 함?”
“와……. 천재들은 교육을 잘 못한다더니, 네놈이 딱 그 짝이네.”
“난 뭘 가르친 적 없는데.”
“비유가 그렇다고. 비유가!”
이중희는 벌컥 화를 냈다.
어이없는 상황에 좀 당황한 모양이었다.
힐러 클래스를 인정받은 결과.
분배 비율이 변했다.
다소 어정쩡하게 말이다.
네 명뿐인 팀에 힐러가 절반.
그럼 탱커가 양보해야 했다.
“놀란 게 아니라, 돈을 덜 받게 돼서 빡친 건가?”
“내가 그런 소인배로 보이냐? 지난번에 제안한 것도 네놈이 전체 수익의 50%를 가져가는 거였거든?”
“아, 그랬지.”
나는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뒤통수에 손깍지를 낀 채.
그러자 이중희는 볼살을 파들거렸다.
어지간히도 빡친 모양이었다.
역시 이놈은 놀려먹기 좋단 말이야.
말로 패는 맛이 있어요.
“자, 이제 시작하자고.”
우리는 캠프를 설치한 뒤.
포인트 주변을 정찰했다.
그런데 문득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쿠웅!
지존 길드원들은 즉각 자세를 낮췄다.
그러더니 움직임을 극도로 줄였다.
“왜 이래? 뻘쭘하게.”
느낌이 이상했다.
나만 멀뚱멀뚱 서 있었으니까.
이중희는 인상을 쓰며 황급히 손짓했다.
“뭔가 이상해. 가제트 구울은 저렇게 육중하지 않단 말이다.”
“아?”
“멍청한 표정 짓지 말고, 얼른 엎어지기나 해!”
“쳇! 되게 뭐라 그러네.”
나는 대충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면서 굉음에 집중했다.
확실히 가제트 구울과는 발소리 패턴이 달랐다.
“이거 그럼 한 단계 높은 놈이 나타난 거 아닌가?”
“가끔 다른 종의 말살급이 등장하기도 해. 100% 가제트 구울만 나오는 건 아니거든.”
“그럼 굳이 이럴 필요 없잖아?”
“그 이상도 등장하니까 문제지.”
“호오?”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수익을 나눠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럼 높은 등급일수록 좋지.
지존 길드 놈들을 좀 더 잘 활용할 수도 있을 테고.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악!
안개를 뚫고 나타난 형상.
상대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에이.”
하지만 나는 맥 빠진 소리를 냈다.
예전에 본 적 있는 몬스터였거든.
그래도 희귀한 녀석이라.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뭐야. 트리 세이지잖아.”
나무로 된 거인.
말살급 특수 몬스터.
어떤 상황에만 등장하는 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냥터가 빈 것도 아닌데 이놈이 왜 나왔지?’
여유롭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지존 길드원들은 이미 줄행랑을 놓은 상태였다.
“아니, 왜 도망가?”
“그거 아니야! 눈이 빨갛잖아. 이 미친놈아. 튀어!”
이중희의 날카로운 외침.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눈이 왜?”
그냥 트리 세이지처럼 생겼는데.
아니라고?
뭐가 어찌 됐든.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상대가 꽤 강하다는 것.
이중희가 냅다 도주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 당연히 보상도 쏠쏠할 터.
잡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너흰 튀었으니까, 그럼 이건 전부 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