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투기장 선수로 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겸업하는 사람의 비율이 훨씬 높았으니까.
하지만 페널티가 있었다.
대전료 상승에 제한이 있다는 것.
거기다 경기 선택권도 없었다.
즉, 누가 걸어 줘야만 뛸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싸울 상대가 없진 않을 거예요.”
나수연은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인지도가 확 올랐으니까.
다들 몸이 달아 있을 터.
조만간 신청이 들어올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흥미가 확 떨어졌다.
대전료 때문이었다.
“아무리 올려 봐야 30억이라니, 너무 수지에 안 맞아.”
“아직 최대 금액에 도달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위쪽은 항상 엎치락뒤치락하거든요.”
“그럼 바뀌기도 한단 말인가?”
“네, 원래는 10억이었어요.”
“그건 마음에 드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쨌거나 아예 안 올려주진 않는다는 말 아닌가.
30억이라는 마의 벽을 넘기만 한다면.
‘별로 어렵지도 않을 것 같네.’
솔직히 자신 있었다.
그냥 계속 이기면 되니까.
물론 경기가 잡혀야 할 수 있는 거겠지만.
“아무튼 난 간다.”
“고생 많으셨어요. 입구까지 배웅해 드리죠. 이쪽 길이 좀 복잡하거든요.”
“저리로 가도 되는데.”
나는 부서진 경기장을 가리켰다.
뒤편이 뻥 뚫려 있으니, 날아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자잖아요.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야죠. 시간 되시면 짧게 인터뷰를 해도 되고요.”
“그건 됐어.”
“그럼 프런트에 그리 일러둘게요.”
나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문득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갔다.
누가 봐도 취재 목적은 아닌 듯했다.
순간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어?”
“왜요?”
“아는 얼굴을 본 거 같아서.”
“저기서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나수연은 곧장 직원 한 명을 붙잡았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혼란을 틈타서 침투하려는 인원을 붙잡았습니다.”
“예? 투기장에 그럴 만한 곳이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수상하게 이곳저곳을 들쑤시더군요.”
“흐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포박된 자들을 훑었다.
입까지 봉인된 채로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인물들.
영웅왕 팀이었다.
‘야, 이 멍청이들아.’
아무래도 작전이 실패한 모양이었다.
화려한 퍼포먼스로 시선을 확 끌어 줬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저대로 끌려가게 둘 수는 없었다.
어디 벌써 수족을 잃는단 말인가.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나수연의 팔을 툭 건드렸다.
“왜요?”
“쟤들 얼굴 좀 자세히 봐봐.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
“어? 그러고 보니…….”
“우리 팀 애들이야. 아마 길을 좀 헛갈린 모양이군.”
“아! 경기장이 무너질 때 빠져나가면서 그렇게 된 거겠네요?”
“그렇지. 그렇지.”
그녀는 금방 이해한 듯했다.
풀어 주라는 말이 곧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자기가 보증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직원의 반박에 나수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하지만 저들이 잡힌 건 그 전입니다만.”
“확실해요?”
“예, 그렇습니다.”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염탐을 시작하자마자 잡혔다는 소리잖아?’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뭐라도 건졌으면 억울하진 않을 텐데.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여신마저도 탄복한 설득 장인이라고 들어는 봤나?
“잠깐.”
“네, 말씀하세요.”
“얼굴이 좀 범죄자같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야. 이래 봬도 선량한 애들이거든? 전과 하나 없이 깨끗하다고. 아! 한 새끼는 문제가 있긴 한데, 지금은 손 털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생긴 거로 사람 의심하고 그러면 안 된단 말이지. 자, 그럼 내가 어딜 돌아다니다가 붙잡혔다고 생각해 보라고. 별로 안 이상하지?”
나수연과 직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변명이 어느 정도 먹힌 모양이었다.
한데, 누군가가 팔을 붙드는 게 아닌가.
슬쩍 돌아보니, 어느새 풀려난 팀원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세를 몰아쳤다.
“험상궂은 친구들이 원래 더 순진한 법이거든. 봐봐! 얘네 눈빛이 얼마나 멍청…… 아니, 순수해?”
“그, 그만하세요.”
“아, 놔 봐. 지금 열심히 쉴드 치고 있잖아.”
“그…… 쉴드로 저희 뚝배기를 치고 계신 거 같은데요.”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투기장 직원들은 팀원들을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팀장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며 등을 두드려 주는 이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당당한 태도로 나수연을 응시했다.
“그럼 가도 되지?”
“후우! 네, 보니까 별문제 없을 것 같네요.”
한숨과 함께 나온 대답.
역시 내 설득 기술은 최고라니까.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보내주고 배겨?
* * *
이벤트 매치가 끝난 다음 날.
영웅왕 팀은 투기장 근처에 다시 모였다.
블루문 연합의 뒤를 밟기 위함이었다.
“확실한 거지?”
“쳇! 물론입니다.”
“가자마자 바로 붙잡혔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염탐을 해보긴 한 거냐?”
“쳇! 그럼 직접 살펴보시든지요.”
“뭐 인마?”
“쳇!”
이승제는 연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어제 사건이 아직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말로 몰매를 때리긴 했지.
그래도 그건 위기 탈출을 위함이었다고.
“앞으로 쳇의 치읓이라도 나오면, 팔다리를 바꿔서 붙여버릴 거야.”
“커흡!”
효과는 확실했다.
이승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으니까.
협박이 꽤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제 좀 조용하군.
“그럼 시작하자고.”
“예.”
우리는 노란 안전모를 쓰고 형광 조끼를 입었다.
아마 어지간한 곳은 다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무너진 경기장 때문에 인부가 많이 투입되었거든.
철근까지 어깨에 메자, 변장은 완벽했다.
덕분에 공사 현장에 잠입하는 것까진 손쉬웠다.
“이제 남은 건 저자들입니다. 어제도 저쪽으로 들어가려다 붙잡혔거든요.”
투기장 건물의 지하.
수상한 느낌의 하부 통로.
그 앞에는 여러 명의 직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운영팀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느낌이 강했다.
마치 방벽의 군인처럼.
“고작 저걸 못 뚫어서 잡혔단 말이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 실망인데?
고작 일반인에게 붙잡히다니 말이다.
“쟤들도 플레이어면요?”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근데 그런 고급 인력을 고작 경비병으로 써?”
“그만큼 중요한가 보죠. 저기가.”
“오호?”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승제의 대답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게 숨겨져 있을 듯한 느낌.
뭔가 쓸 만한 걸 건질 수 있으리라.
비밀 통로가 없더라도 말이지.
복면을 쓴 나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팀원들이 복도 이곳저곳에 배치되었다.
누군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 역할은 경비병 처리였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목표는 여섯.
주먹은 하나.
그럼에도 작전에 차질은 없었다.
여섯 번의 펀치가 정확한 위치에 작렬했거든.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퍼버버벅!
그자들은 모조리 쓰러져 버렸다.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에 게거품이 물려 있었다.
“어이쿠! 미안하다. 내가 곱게 기절시키는 방법을 몰라서 말이지.”
나는 널브러진 경비병들을 무심하게 넘어갔다.
북 터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팀원들이 뒤를 따라왔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말이다.
“같은 편이라서 다행이다. 진짜.”
“내 말이.”
팀원들이 뭐라고 떠들든 나는 길을 따라 전진했다.
뭔가 정제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는 현대적인 색채가 강했다.
근데 여긴 자연 동굴 같았다.
물론 실제론 사람이 뚫은 거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중.
정중동이 말을 붙였다.
“이거 왠지 점점 올라가는 느낌인데요?”
“그렇지? 아무래도 정인훈의 예상이 맞는 것 같아. 분명 어딘가에 외부와 연결된…….”
스윽.
꽤 넓은 공간으로 진입한 순간.
나는 말을 하다 갑자기 멈추었다.
기이한 감각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
다들 얼추 알아챈 모양이었다.
서로를 돌아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팀장님?”
“어.”
“지금 끈적한 게 다리를 마구 휘감고 있거든요?”
“응. 나도 그래.”
“조진 것 같은데, 왜 그리 침착하세요?”
“그야 난 뭘 해도 안 뒈지니까.”
“그럼 저희는요?”
“뭘 물어?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덜컥!
이승제와의 대화가 끝난 순간.
나는 온몸이 위로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다리를 붙잡은 뭔가가 엄청난 힘을 가한 것이다.
팀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으아아!”
“김로니 살려!”
“젠장! 이거 안 끊어집니다!”
정중동이 악다구니를 썼다.
무기를 휘둘러 본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팔짱을 끼웠다.
지금은 저 녀석들의 잡소리를 들을 시간이 아니었거든.
‘예전보다 더 명확하다.’
언제였더라?
물소 괴인과 처음 마주쳤을 때 느낀 바로 그것.
겔드라그의 마기.
그때보다 훨씬 짙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다리를 휘감은 촉수에서 말이다.
한데, 의문이 있었다.
‘무슨 규칙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무작위로 막 나오나?’
지금껏 강력한 마기를 뿜어내는 적은 많았다.
마동왕과 지하왕처럼 말이지.
하지만 겔드라그의 마기는 물소 괴인 이후 처음이었다.
그놈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꾸아악! 티, 팀장님!”
“아이고! 우리 다 죽어요!”
한창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비명이 들려왔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팀원들의 목소리였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야 저흰 모르죠! 왜 팀장님만 멀쩡하신 건데요?”
“그야……. 더럽게 무거우니까?”
나는 신성력으로 몸무게를 대폭 늘린 상태였다.
무협에 나오는 천근추의 수법처럼 말이다.
그러니 마음껏 휘두르지 못한 것이겠지.
푸확!
손날로 가격하자, 촉수가 대번에 끊어졌다.
그저 가볍게 툭 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시 신성력이었다.
마기와는 워낙 상극이라 말이지.
“잠깐만 좀 놀고 있어라. 이놈부터 조사해야겠으니까.”
팀원들이 날아다니든 말든 나는 투명한 촉수를 살펴보았다.
아마 마기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놈이 어디로 연결되는지만 알면 말이지.
겔드라근지 그냥 비슷한 놈인지 금방 알게 될 터.
치직! 치지직!
신성력을 뿜자 스파크가 튀었다.
마기와의 반발력 덕분에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동의 한쪽 구석.
그곳에 해답이 존재했다.
투명한 촉수로 우릴 농락하던 원흉이 말이다.
놈은 꽤 작은 체구의 청년이었다.
“이봐.”
나는 어깨에 손을 올려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놀라 나자빠졌을 터였다.
얼굴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거든.
뻥 뚫린 안구에는 공허만 남았고.
온 피부에 바늘이 박혀 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반응은 담담했다.
“왜 안 놀라?”
되레 청년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한 걸 묻고 있네.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돈 보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얼른 줍기부터 해야지.”
뻐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