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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영웅왕이 살아가는 법-76화 (76/128)

76화

겔드라그.

도주하는 능력을 극한까지 단련한 마왕.

처음에는 온갖 손가락질을 받았다.

같은 마족들로부터 말이다.

마계의 위신을 떨어트린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놈은 더 큰 명성을 얻었다.

‘나와 몇 번이나 마주치고도 살아남았다. 마계에서는 대단한 거였지.’

마왕들이 죄다 골로 가는 상황이었다.

한데, 막강한 적을 골탕 먹이는 존재가 있다?

비열하든 뭐든 일단 환호부터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과를 보인 놈이 대체 누가 있나.

하나같이 발리기만 하는데.

그런 배경이 겔드라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나한텐 지독한 골칫거리였고.

―크크크! 천하의 최태성이 한낱 마왕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거슬렸나 보군.

키득거리는 검은 형상.

펀치를 꽂아 넣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저게 본체는 아닐 테니까.

저놈은 분신을 자유자재로 다루거든.

그래.

허공에 주먹질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대신 나는 말로써 조지기로 했다.

“마족이 그리 쉽게 긍지를 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기억에 남지. 강자존 어쩌고 하면서 힘을 숭상한다는 게 네놈들 아니었나?”

―…….

겔드라그는 침묵했다.

현실이 그랬거든.

마족들은 ‘강함이 곧 정의’라고 외쳐왔다.

그런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냅다 튀던 겔드라그를 떠받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신 승리 차원에서 비겁자를 옹호하는 거지.

“누누이 말했지. 결투는 물론이고, 말로도 날 이길 수 없다고.”

―그 빌어먹을 입담은 여전하군.

“근데 고작 도망쳐 왔다는 게 여기냐? 그렇게 뻔하니 금방 따라잡히지.”

―넌 정말이지 개 같은 놈이야. 어찌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경멸스러울 수가 있지?

겔드라그는 치를 떨었다.

연달아 쏟아진 팩트 폭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근데 사실 반은 구라지롱.’

평행 지구에 온 건 내 의지가 아니거든.

여신 엘리아가 강제로 보냈지.

물론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나.

아마 저놈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이곳을 더 이상 안전지대로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뭐 아무래도 좋다. 지구에 온 이후로 나는 달라졌으니까.

“뭘 주워 먹고 강해지기라도 했나?”

―무, 무슨 소리! 표현이 천박하기 그지없군.

“호오? 그렇게까지 부인한다고? 진짜인가 보네?”

―아니라고!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지. 암!”

―이 새끼, 애초부터 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군.

“그걸 이제 알았냐?”

대화는 불필요했다.

나는 이미 충분한 소득을 올렸으니까.

겔드라그의 존재를 확인했고.

은신처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남은 건 뭐겠는가.

“조지는 것뿐이지.”

―후후! 과연 그게 가능할까? 여긴 펜드리아나 마계가 아니다. 여신의 사냥개여.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놈도 느끼고 있을 텐데? 암만 엘리아 그년의 신성이 막강하다 해도 지구까지 전달이 될 줄 아느냐?

“…….”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엘리아와의 연결이 끊긴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놈은 신나게 낄낄거렸다.

검은 액체를 파들거리며 말이다.

―크히히히! 신성력이 보충되지 않는 용사라니, 가소롭기 그지없군. 드디어 네놈을 끝장낼 기회가 오는구나.

뭔가 되게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오해해 주는 게 훨씬 이득이니까.

‘방심하고 있다. 아주 좋은 징조야.’

이참에 최대한 정보를 뽑아 먹을 작정이었다.

지금이 딱 좋은 기회였다.

겔드라그의 경계가 상당히 풀렸으니까.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툭 던져 보았다.

“마인을 생산하는 게 네놈이겠군.”

―호오? 벌써 거기까지 파악했나?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 하수인들이 너무 허접해서 말이야.”

―고작 시제품이다. 판단이 섣부르군. 기다리라고. 조만간 네놈은 지옥을 맛보게 될 테니.

“달랑 시설 하나로? 암만 찍어내 봤자 어림도 없지.”

―크하하! 내가 공장을 고작 거기에만 심어뒀을까?

“하긴 토끼처럼 굴을 수도 없이 뚫어 놓는 네놈이라면, 분산해 뒀겠지.”

―토끼라니! 비유가 영 마음에 안 드는군. 어쨌거나 안다고 해서 날 막을 순 없을 거다.

살살 긁으면서 도발하자, 놈은 몇 가지 사실을 뱉어냈다.

생산 시설은 여럿이고 더욱 강한 마인이 존재한다는 것.

상당한 수확이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내용들이 한꺼번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기회는 없었다.

―너무 많이 지껄였군. 뭐 상관있나. 끈 떨어진 용사가 발악해 봤자지.

이제 겔드라그는 정보를 풀어 놓지 않았으니까.

이죽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뭔가를 얻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장단을 맞춰줄 필요도 없는 거지.

“꺼져라.”

스핏― 쩌어어엉!

나는 겔드라그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신성력이 듬뿍 담긴 펀치였다.

그러자 시커먼 오물이 엄청난 속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말이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겔드라그는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크키키키키! 그래 봐야 본체에 타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나? 어지간히도 빡친 모양…….

츠츠츠츠!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곧장 분신을 소멸시켰다.

아마 놈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으니까.

근데 너무 연기를 잘한 모양이었다.

팀원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거든.

“알아듣진 못했지만, 우리 팀장이 발린 거 같은데?”

“말발로 팀장님을 넘어서는 존재가 있다니! 얼른 가서 비결을 물어봐야겠군.”

“역시 누구에게나 천적은 존재하는 건가.”

이 자식들 은근히 기뻐한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선을 더 넘으면 처맞는단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근데 이걸 어쩌지? 이미 한도를 한참 지나 버렸는걸.”

어느새 내 입가에는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으아아! 튀어!”

* * *

죽음의 레이스 끝에 우리는 지하 통로를 벗어날 수 있었다.

겔드라그의 분신을 처리함으로써 저주가 풀렸거든.

꼬리를 잡히거나 하진 않았다.

이게 다 내가 팀원들을 독려한 덕분이었다.

빵댕이 걷어차기가 동반된 응원 말이다.

“으으으! 이러다가 돈 벌러 나가지도 못하겠습니다.”

“집만 으리으리하면 뭐 합니까?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데.”

팀원들은 앓아누운 채로 불만을 토로했다.

얻어맞은 곳이 어지간히도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러게. 누가 헛소리 지껄이래?”

“끄응…….”

솔직히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깐족거리다가 처맞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팀원들이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괜찮아. 어차피 당분간은 사냥을 못 할 테니까.”

“왜요?”

“벌집을 들쑤셔 놨으니, 기어 나오는 놈들을 때려잡아야지.”

“아, 블루문 연합 말씀입니까?”

“그래. 슬슬 움직임이 있을 건데.”

띠디디딕!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단말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정인훈에게서 온 전화였다.

―움직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지가 있어?”

―대충 두 가지 정도요?

“읊어 봐.”

―합법적으로 길드전을 걸거나, 그냥 때려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차이는?”

―전자는 돈이 남고, 후자는 일망타진이 가능합니다.

“고민되는데.”

요즘 자금이 좀 부족하긴 했다.

1천억짜리 A구역 아파트를 샀으니까.

그래도 당장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블루문 연합을 박살 내는 게 훨씬 타격이 클 터.

아무래도 후자가 더 끌렸다.

그러나 정인훈의 한마디가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가 언제 합법적으로 살았냐? 다 쓸어버리자.”

―파장이 클 텐데요. 재정평의회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길드전을 걸면 달랑 몇 놈밖에 못 조지잖아. 우리가 아는 거라고 해 봐야 라트로 길드뿐 아닌가?”

―몇 놈 족쳐서 내부 정보를 빼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지?”

―메시지로 위치 쏴드리겠습니다. 그간 제가 파악한 게 있거든요.

“좋아. 진행해.”

정인훈과의 통화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정명 그룹 다음은 겔드라그다.’

이번 일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라트로 길드의 의도적인 사냥 방해 말이다.

이후로 블루문이 마인들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저놈들을 조지면 아마 생산 시설의 위치도 튀어나올 터였다.

그야말로 줄줄이 소시지.

매우 흡족한 한탕이었다.

띠딕!

이윽고 정인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내용을 확인한 순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위치가 집 바로 앞이었거든.

“근데 이게 뭐야? 어린이집?”

“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승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보육 기관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틀림없다고 하니까, 일단 가 보자고.”

우려를 예상한 듯, 정인훈은 추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작전을 짜주는 참모가 그렇다는데 따라야지.

뭐 어쩌겠나.

나는 팀원들을 이끌고 A구역 어린이집을 급습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경악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게 뭔…….”

겉보기만 어린이집이었을 뿐.

이곳은 블루문 연합의 비밀 거점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때마침 몰려나오던 플레이어들과 딱 마주쳤거든.

“당신들 뭐야?”

애들을 앞세운 위장은 완벽했다.

보육 기관 지하에 이런 시설이 있으리라고 대체 누가 생각하겠는가.

아마 집결 명령이 아니었다면, 결단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으에에엥!”

험악한 분위기에 놀란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하나 블루문 플레이어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불청객만 경계할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뭔가 이상한 점이 딱 포착되었다.

“애들 행색이 너무 허름하지 않아?”

“그러게요. 부모들이 이 꼴을 보면, 적잖이 빡치겠는데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들어 간판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잘못 본 건 없었다.

나름 부유한 동네였다.

근데 때 묻은 잠옷 바람이 가당키나 한가.

C구역 보육원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래도 저 애들까지 연막인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위하듯 서 있는 보육 교사들을 향해서 말이다.

이들은 마치 바리케이드 같았다.

약자를 앞세운 인(人)의 장벽 말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인성은 마계의 오염된 땅속에 묻은 지 오래.

악질적인 별명으로 점철된 용사였다.

고작 도덕적 방어막 따위로 날 막을 순 없었다.

“비켜.”

“안 됩니다. 여기는 보육 기관이에요. 관계없는 분들은 나가주세요.”

교사 한 명이 결연하게 외쳤다.

그러나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이 앞잡이들을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애들은 무슨 죄냐? 에휴!’

속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저 블루문 새끼들의 의도대로 될 터.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손을 뻗었다.

싹 밀어 버릴 요량으로 말이다.

한데, 바로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엄습해 왔다.

나는 문득 시선을 내렸다.

교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이 기묘한 느낌은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고나리 그 녀석의 냄새가 왜 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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