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등에서 튀어나온 날개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동시에 막대한 신성력이 쏟아졌다.
천지가 온통 백광에 휩싸일 만큼.
‘마계를 호령하던 시절이 생각나네.’
그땐 모든 마족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곤 했다.
자존심 따윈 개나 줘 버리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3단 기어가 올라가는 순간.
최소 만 단위씩 죽어 나갔거든.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그저 대가리를 처박는 수밖에.
“여, 여신과의 연결이 끊긴 게 아니었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겔드라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줄 알았던 내가 되게 멀쩡해 보였으니까.
“맞아. 연락이 안 돼.”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걸?”
“그게 무슨 미친 소리…….”
더 이상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시시콜콜한 내막까지 알아서 뭐 하겠나.
어차피 뒈질 텐데.
나는 대답 대신 공격을 선사했다.
투웅―
뒤에서 묵직한 파문이 일었다.
신성 비행이 발동된 것이다.
날개에 집중된 신성력은 엄청난 추진력을 선사해 주었다.
투쾅―! 콰아앙! 콰과과광!
연속으로 터진 충격파.
내 몸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굉음이 들릴 때마다 족히 속도가 두 배씩 증가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상대와의 거리는 극단적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싸우는 중인데, 뭘 자꾸 지껄여?”
잠깐 마주친 시선.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성검을 강하게 내질렀다.
엄청난 속도가 그대로 실린 일격.
불타는 신성력과 겔드라그의 마기가 충돌했다.
츠카아아앙!
“크읏!”
짤막한 신음.
놈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엄청난 충격이 덮쳐 왔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겔드라그가 멀쩡히 서 있었거든.
“뭐냐?”
“으흐흐흐! 말했잖아. 강해졌다고.”
일반적으로 마왕은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본체는 전투 전문.
그 외에는 인간형으로 변신해서 생활한다.
몸뚱이가 워낙 커서 말이지.
드래곤을 떠올리면 간단했다.
그놈들도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는가.
‘인간형으론 받아낼 수가 없는 위력일 텐데.’
내가 놀란 포인트가 딱 이거였다.
본체도 아닌데, 3단 기어의 신성력을 극복한다?
이리도 간단하게?
지금껏 그런 마왕은 없었다.
아, 한 놈 있긴 했다.
아직 내 명성이 마계에 진동하지 않을 때.
멋모르고 덤볐던 녀석.
어찌어찌 한 방은 버텼는데, 후속타에 골로 갔지.
‘이름도 모르겠네.’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으니까.
아니,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거구나.
어쨌든 중요한 건 그놈이 아니고.
지금은 겔드라그에게 집중할 때였다.
왠지 심상치 않거든.
“많이 발전했구나. 우리 똥강아지.”
“훗! 아직 신성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곤 있는 모양인데, 오래가진 않을 터. 이곳은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자신만만한 외침이었다.
근거가 아예 없진 않았다.
방금의 일격은 최후의 보루 정도로 생각하겠지.
나쁘지 않았다.
놈이 방심할수록 나한텐 좋은 거니까.
쿠구구구구!
그때였다.
독특한 소음이 실내를 가득 울렸다.
상당한 진동 또한 느껴졌다.
생산 시설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거기다 더 놀라운 광경까지 펼쳐졌다.
‘벽이…… 움직인다?’
원래라면 별로 신기하지 않았을 터였다.
조금 전에도 봤지 않은가.
통로가 꿈틀거리면서 열리고 닫히는 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벽면에서 돋아난 가시들이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나를 향해.
“죽어라! 여신의 개!”
동시에 겔드라그도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
피할 곳 따윈 없었다.
결국 막는 방법뿐.
하나 그마저도 만만치 않았다.
팔다리를 다 합해 봐야 넷.
저걸 모두 튕겨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내 태도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한꺼번에 처리하면 되거든.”
스윽― 피이이잉!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검에서 풀려나온 수십 개의 줄기.
이내 그것들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티디디디딩!
주황색 불꽃이 마구 튀었다.
백색 회오리가 공격을 모조리 차단한 결과였다.
‘충분히 막히네.’
성능 자체는 역시였다.
철혈의 단죄처럼 여신이 사사한 검술이니까.
이 기술의 이름은 ‘참회의 돌풍’.
거센 바람에 적이 저절로 용서를 빌게 된다는 의미였다.
솔직히 나는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아닌가.
그냥 먼저 패면 그만이거든.
이미 박살 난 놈이 날 때릴 순 없으니.
하나, 지금은 막는 게 우선이었다.
공격이 워낙 촘촘했으니까.
“그나저나 또 저러네. 지긋지긋하다. 정말.”
나는 겔드라그를 노려보았다.
놈은 가시 폭풍 속에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호기롭게 달려든 건 페이크였다.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하는 스텝.
매번 같은 식이었다.
왕창 던져 놓고, 기회만 노리는 게 한두 번이던가.
저러다 수틀리면 싹 내빼 버릴 터였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아직 본체가 아니야?’
지금껏 나와 인간형으로 싸웠던 마왕은 없었다.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마주쳤다고 생각해 보라.
손에는 막대기와 총이 있다.
대체 뭘 써야겠는가.
답이 딱 나오지 않나?
그런 상황인데도 겔드라그는 막대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과한 자신감에 판단이 흐려진 건가?’
간단하게 그냥 미친 거였다.
전문용어로는 맛탱이가 갔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봐주진 않을 예정이었다.
내 거리에 들어왔으면, 일단 한 방 먹여야지.
생각은 그 뒤에 하고.
취리릿―!
회오리바람을 뚫고 백광이 쏘아졌다.
3단 기어의 신성력이 깃든 일격.
막힌 전력이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 번으로 안 된다?
될 때까지 때려 박으면 그만이었다.
“헙!”
겔드라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금 당황한 듯했다.
아까와 같은 수준의 공격이 펼쳐졌으니까.
저놈은 내가 점점 약해지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카아아앙!
겔드라그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격돌의 충격에서도 금방 벗어났는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한 방까진 어떻게 버텨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까처럼은 안 될 거다.’
이번엔 후속 공격이 이어졌으니까.
물 샐 틈 없는 검격의 향연.
색다른 검술이었다.
정교함의 극치라고나 할까?
철혈의 단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오늘따라 안 하던 짓이 잦네.’
좀 불편하긴 했다.
일격필살로 조지는 게 내 스타일인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여지가 생기면, 저놈이 냅다 튀어버릴 거거든.
쏴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휘몰아치던 백광이 동시에 쇄도했다.
겔드라그의 전방위를 압박하며.
무수히 쏟아지던 상대의 가시 공격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위력은 훨씬 강했지만.
“상황 역전이다. 이 자식아.”
어느새 겔드라그의 입은 쩍 벌어져 있었다.
자신 있게 냈던 회심의 한 수.
그게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물론 지레 겁먹고 포기하진 않았다.
암만 도주 전문이라고 해도 마왕 아닌가.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존심을 버릴 순 없었겠지.
이윽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중간 지점에서 만난 성검과 손도끼.
콰칭―!
“그아아아!”
겔드라그는 괴성을 내질렀다.
마치 힘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그러자 놈의 육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뚜둑! 뚜두둑!
멀건 얼굴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드러난 악마의 형상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변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세 배는 커진 듯한 팔뚝.
몸속에서 튀어나온 뼈 갑옷.
‘이거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겔드라그의 본체가 드러났으니까.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긴 한데, 이 정도면 틀림없었다.
치지지지직!
백색과 흑색 기운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위력은 비등비등했다.
겉으로 봤을 땐, 상대가 약간 우세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 태도는 여유로웠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다 했냐?”
“뭐?”
“이게 전부냐고.”
“그럴 리가 있나. 흐아아압!”
고막을 찢을 듯한 기합.
순간적으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놈의 숨결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뭐가 썩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저 짙은 마기가 느껴졌을 뿐.
한데, 문득 기이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뒤편을 힐끔거렸다.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던 살덩이.
변수는 거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츄웅!
쭉 뻗어 나온 검은 선이 겔드라그와 연결되었다.
그러자 막대한 마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압도적 강함이었다.
겔드라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마계엔 나보다 강한 놈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다 뒈졌지.”
“어, 그거 내가 그런 건데.”
“아니까 닥쳐!”
“응.”
“내가 네놈만 피해 다녔겠나? 마왕이 되고도 수없는 결투 신청을 거부해 왔다. 나는 주제를 아는 놈이거든.”
이놈은 마족들에게도 도망자로 불렸다.
마왕치곤 굉장히 비루한 별명이었다.
유리한 싸움이 아니면, 무조건 내뺐으니까.
“하지만 모든 건 결과가 말해 준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최고다. 왜냐고?”
“지껄여 봐.”
“드디어 완성되었으니까. 몸과 마음 모두가!”
츠츠츠츠츠! 뚝.
살덩이에서 쏘아지던 마기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겔드라그의 몸이 부풀었다.
어느새 도끼 또한 커진 상태였다.
상당한 위용이었다.
뭐든 일격에 쪼개 버릴 만큼.
놈은 광소를 터트리며 무기를 내리쳤다.
“크하하하! 지긋지긋한 쫄보 짓도 이제 끝이다!”
쿠콰콰콰콰콰!
지면을 가르며 쏘아진 마기.
길이만 100미터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거대하기까지 했다.
저런 것에 직격당했다간 골로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나는 여유롭게 성검을 들어 올렸다.
철혈의 단죄가 드디어 그 위용을 뽐낼 때였다.
“뭐래. 병신이.”
심드렁한 한마디.
상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 순간.
어디선가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쩌저저적!
“으음?”
뭔가가 스치고 지나간 느낌.
이윽고 겔드라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후폭풍이 뒤늦게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쑤화아앙―!
살을 베어 버릴 듯한 칼바람이 불어왔다.
하나 녀석의 시선은 복부에 고정되었다.
주변 환경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몸통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는데, 그깟 바람이 문제겠나.
투두둑.
덩어리진 검은 점액이 떨어져 내렸다.
한데, 경악한 표정은 금방 지워졌다.
어느새 겔드라그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설마 내가 아무런 안배도 안 해뒀을까?”
“그럴 리가. 그까짓 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어.”
“그럼 이어질 말도 눈치챘겠군. 넌 나를 잡지 못할 거다. 영. 원. 히.”
“닥치고 꺼지기나 해. 그게 진짜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사 존나 구려.”
“뭐 이 새ㄲ…….”
콰직! 슈가각!
나는 성검을 연달아 그었다.
그러자 겔드라그의 육신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이윽고 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바닥에는 검은 오물만 남았을 뿐.
겔드라그의 영혼은 없었다.
“결국에 저것도 가짜였군.”
예전과는 상당한 차이가 났다.
분신의 완성도가 높았으니까.
하지만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녀석의 몸이 변할 때가 결정적이었다.
본체의 형상이 영 허접했거든.
어쨌거나 다시 원점이었다.
‘그래도 건진 게 아예 없진 않나.’
나는 활동을 멈춘 생산 시설을 둘러보았다.
아마 이곳을 조사하면, 몇 가지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 마기를 뿜어내는 살덩이도 손에 넣었다.
“저게 겔드라그의 비법이겠지.”
나는 가까이 다가가 보려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푸확―!
고름이 톡 터지며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주먹만 한 검은 형체.
마치 금방 부화한 까마귀 같은 느낌이었다.
“뭐냐?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