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곳은 S구역 사냥터.
신성력의 보호는 더욱 빨리 소진되었다.
사냥이 시작되고.
나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기를 잠시.
아니나 다를까.
서은채는 발작했다.
“크으흐흐!”
“어어?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정석우는 말을 더듬거렸다.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그녀가 미칠 줄 어찌 알았겠나.
가뜩이나 설명도 부실했는데.
‘대충 30분쯤인가.’
나는 발작 간격을 재고 있었다.
원래 1시간 정도는 괜찮았다.
하지만 차원 부식 속에서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몬스터 하나 잡을 짬도 부족했다.
“이거 좀 귀찮은데.”
내심 좀 오래 버텨주길 바랐다.
1시간이면 빠듯하지만.
사냥 한 번은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았다.
서은채를 죽일 순 없지 않은가.
‘아니, 정석우가 먼저 죽겠는데.’
뒤편의 소란과 함께 공격이 뚝 끊겼다.
그러자 이중희가 물소 괴인을 밀어냈다.
잠시 대화할 틈을 번 것이다.
“왜 저래?”
“습격이라도 당한 모양이군. 이놈 좀 붙잡아 두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부탁할게.”
이중희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몬스터 난입은 자주 있는 일이니까.
서은채가 날뛰는 건 예상도 못 했겠지.
나는 얼른 상황을 살펴보았다.
후방은 혼란 그 자체였다.
“끼이히히히―!”
“으아아아!”
서은채는 악귀가 되어 손톱을 휘두르고.
정석우는 미친 듯이 도망 다녔다.
한데, 생각보다 대처가 좋았다.
‘대단한데? 그 와중에 힐러 쪽으론 안 가려고 하다니.’
달리 소수 정예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빨리 발작을 잠재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서은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키얏!”
쩌엉!
즉각적인 반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의 손톱은 허망하게 막혔다.
딱히 방어를 한 건 아니고.
내 목에 꽂히긴 했다.
신성력을 뚫을 수 없었을 뿐.
“얌전해져…….”
나는 혼잣말을 도중에 끊었다.
끝내주는 생각이 떠올랐거든.
“굳이 잠재울 필요가 있나?”
어차피 플레이어도 되었는데.
잘 써먹으면 그만이잖아.
거기다 서은채의 각성 검사는 한계 초과.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아니겠어?’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원래라면 무차별 공격을 가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멀뚱멀뚱.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뭔가를 느꼈겠지.
자신의 운명이 조졌다는 걸.
“가랏! 너로 정했다.”
나는 서은채를 있는 힘껏 던졌다.
그녀의 체중은 45kg 전후.
꽤 가벼운 편이었다.
그렇다고 투포환이 가능한 무게는 아니었다.
자주포 같은 데다 넣고 쏠 수준.
하나, 서은채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이게 바로 인간 투석기다. 으하하하!”
나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곁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정석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괜찮을까요? 분명 크게 다칠 텐데.”
“걱정하지 마. 당신 마스터 아니야?”
“그렇습니다만.”
“쟨 이제 막 각성한 초짜다. 그런데도 널 바짝 뒤쫓았지.”
“전투력까지 좋다고 볼 순…….”
반박은 이어지지 못했다.
서은채가 엄청난 활약을 벌였거든.
물소 괴인의 머리에 달라붙은 채.
미친 듯이 손톱을 박아 넣어서 말이다.
푸쉭! 푸쉭―!
“캬하하하핳!”
그녀는 광소를 터트렸다.
몬스터의 피로 온몸을 적신 상태로 말이다.
정석우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자신이 저 꼴을 당했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별명은 인간 기계톱이 좋겠군.”
순간 정석우의 표정이 더욱 아득해졌다.
* * *
최근 어지럼증이 너무 심해졌다.
기억도 드문드문 끊겼고.
그럴 때마다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아픈 건 불쾌했다.
하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CG로 만든 것처럼 완벽한 얼굴.
‘존나 잘생겼어.’
그 남자가 항상 자신을 바라봐 줬으니까.
게다가 찬란한 백광이 다가올 때면.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아…….”
오늘도 서은채는 의문의 공간에 있었다.
원래 살던 곳보다 한참 좁은 아파트.
그러다 한 번씩 사냥터에 가곤 했다.
멍하니 남자를 따라가면.
항상 기억을 잃었다.
한참 뒤.
따뜻한 빛에 눈을 뜨곤 했다.
“생각보다 멀쩡하군. 의외로 부작용이 없는데?”
잘생긴 남자의 한마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도 광증의 영향인가.
오늘은 기필코 말을 붙여 보리라.
“당신은 누구죠?”
“나? 널 고쳐줄 사람.”
“저는 서은채예요.”
“알아.”
“어떻게요?”
“네 아버지가 부탁했거든. 치료.”
서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 남자와 함께하는 이유를.
최근에 겪은 극심한 두통.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좋네요.”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최근 점점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물론 웬만한 건 다 알았다.
단지 정신을 잃었을 때만 떠오르지 않을 뿐.
하지만 그것도 점점 선명해졌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몬스터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저 괜찮은 걸까요?”
“방법을 찾고 있어. 좀 어렵긴 하지만, 언젠간 답을 알게 되겠지.”
“고마워요.”
서은채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남자의 곁에 있으면 고통이 줄어들었으니까.
미쳐 날뛸 때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괴로웠다.
하긴 괜찮을 리가 있겠나.
육신의 한계까지 쥐어 짜내는데.
매번 녹초가 되어 돌아왔지만.
기분은 좋았다.
“제가 도움이 되나요?”
“응.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요. 쓸모가 있어서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원래는 가치 없는 인간이었나.”
“…….”
최태성의 질문.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뼈아팠다.
줄곧 그런 생각을 했거든.
의미 없는 삶이라고.
“진짠가 보네.”
“언젠가부터 그랬어요. 내가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의원 딸이라는 것만 빼면 뭐가 남을까.”
“호오? 철학적이로군.”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요.”
“원래 철학은 거창한 게 아니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는 거지.”
“아…….”
서은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남자.
잘생긴 것뿐만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했다.
편안한 분위기도 좋았다.
초면부터 반말이었는데.
위화감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그녀는 포근함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꿈을 꾸는 내내.
* * *
이중희는 뒷머리를 긁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이게 옳게 돌아가는 거냐?”
“나도 몰라.”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더니.
갑자기 고맙단다.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인 건데.
혼자 수긍하고 곤히 잠들었다.
거기다…….
“너한테 되게 의지하는 것 같다?”
“그러게. 깨어나서 본 게 나라서 그런 건가? 이걸 뭐라 그러더라. 각인 효과?”
“이 여자가 무슨 오리냐? 엄마로 오인하고 따라다니게.”
“비슷할 수도 있지.”
“돌아 버리겠네.”
“돌긴 뭘 돌아. 그간 잘 써먹었으면서.”
“그건…….”
이중희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서은채는 굉장히 쓸모가 많았다.
무지막지한 공격력.
지치지 않는 체력.
거기다 엄청난 집념까지.
그녀는 완벽한 근접 딜러였다.
S구역 사냥터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물론 약점이 없진 않았다.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서은채의 특징은 김로니와 비슷했다.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다가.
갑자기 픽.
폭주하던 마기가 사라지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녀의 몸이 못 버틴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나섰다.
좀 귀찮긴 했지만.
사냥 효율은 엄청나게 올라갔다.
“거기다 인건비도 없지. 얘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근데 그게 맞아? 계약은 했어?”
“참관 아니냐. 당연히 무보수야.”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아. 어차피 돈은 썩어 나는 집안이니까.”
얼핏 서은채를 착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치료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쓰러진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마침 쉴 때니까 시간은 충분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츠츠츠츠츠!
신성력이 스멀스멀 접근했다.
사실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기운은 아니었다.
내 힘은 흉포하고.
단호했으며.
모든 걸 박살 내는 게 기본이니까.
하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까딱 잘못하면, 얘가 골로 가거든.
“옳지. 나와라. 나와라이! 나와라이요. 나와라. 이제.”
한참 폭주하고 나면.
서은채의 체내에 있던 마기가 힘이 팍 죽는다.
그때가 바로 공략 시점.
신성력을 조심스럽게 투입하는 것이다.
그럼 뭉텅이로 긁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뇌를 장악한 마기를.
“오늘은 이쯤 해둘까.”
치료는 거의 막바지였다.
아마 한두 번만 더 하면, 끝날 터였다.
마기의 크기가 대폭 줄었거든.
그렇다고 서은채의 힘이 약해진 건 아니었다.
그냥 폭주 중에도 기억하는 시간이 늘어날 뿐.
아직은 전력으로 충분했다.
한데, 그녀를 바로 눕히려던 순간이었다.
피잉―
“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번쩍 떠진 눈.
서은채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원래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방금 탈진한 상태 아닌가.
재차 폭주했다간 그녀의 몸이 못 버틸 것이다.
마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러웠다.
숙주가 살아야 기생충도 생존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크으으! 최떼썽, 이 썩을 자식아!
의념까지 전할 정도였으니까.
그나저나 이 목소리.
개 같은 말투.
날 최떼성이라 칭하는 것까지.
왠지 익숙한 놈이었다.
“겔드라그 너였냐?”
―또 방해하는 것인가.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내가 할 말이다. 처발린 놈이 왜 자꾸 처 기어와? 뒈질라고.”
―그야…….
“뭐? 계속 말해봐.”
―됐다. 네놈 술수에는 넘어가지 않아.
“나 참, 어이가 없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솔직히 난 치료밖에 안 했다.
길 가다 불쌍한 아저씨를 도와준 것뿐.
‘사실은 납치가 목적이었지만.’
어쨌거나 잘 풀려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겔드라그를 조져 버릴 마음?
애초에 그딴 건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놈이 걸려든 거지.
―믿을 수 없다. 그럼 내 필생의 역작을 왜 이딴 식으로 망친단 말인가!
“아, 서은채가 그런 존재였어? 어쩐지 생각 외로 세더라니. 대륙의 실수가 아니라, 겔드라그의 실수였네.”
―대체 무슨 소리냐?
“그런 게 있어. 어쨌든 고맙다. 얘는 내가 잘 쓸게.”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이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나?
“당연하지.”
―당장 날 쫓아내지도 못할 텐데? 크하하하하!
겔드라그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서은채의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되게 느낌이 이상했다.
젊은 여자에게 아저씨가 빙의된 것 같달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왜 못 하리라고 생각하지?”
―그야 조금만 무리해도 이 여자가 죽을 테니까. 충격만 줘봐라. 마기가 뇌와 척추를 녹여 버릴 거다.
“오,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뭐.
“이거 말이야. 이거.”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서은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겔드라그의 표정이 투영된 것이다.
―어쩌라고.
“마계에서 종종 쓰던 건데, 왜 모르지? 아! 넌 도망 다니느라, 당해 본 적이 없구나.”
―그게 뭔데?
“들어는 봤을 거다. 영혼파쇄격이라고.”
―무슨 개소…… 엉?
어리둥절한 대답.
곧이어 찬란한 백광이 서은채의 안면에 작렬했다.
쩍!
―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