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온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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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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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남편
2022.11.03.
팡- 팡-
사진 작가가 카메라 셔터를 누름과 동시에 야외에 설치되어 있는 조명이 반짝 빛나기를 반복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다소 긴장한 얼굴을 하고 흰 웨딩 드레스를 입은 태연이 서 있었다. 어젯밤 눈이 온 탓에 정원 곳곳에는 눈이 소복하게 내려 더욱 운치를 더했다.
태연의 옆에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도준이 카메라를 씹어 먹을 기세로 자리했다.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웨딩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으나 이 두 사람에게서 설렘, 들뜸 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이질감이 느껴질 뿐.
긴장한 신부를 달래주려는 신랑의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자, 신랑, 신부님. 여기 다시 보세요.”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사진 작가가 카메라 속 렌즈를 들여다보면서 연신 탄성을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껏 만났던 여느 배우보다 실물이 훨씬 빼어난 두 남, 녀였다.
신이 몇 년을 공들여 빚었을 게 분명한 조화로운 이목구비는 아무렇게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도 우아하게 담겼다.
“제가 촬영한 그 어떤 모델보다 완벽한데요?”
한 장이라도 더 담고 싶은 마음에 사진 작가는 홀린 듯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워낙 장신의 도준이지만 그 옆에서 절대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태연은 늘씬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모는 입을 열어 칭찬하는 게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데 한 가지가 사진 작가의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어서 태연의 빼어난 얼굴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게 영 속상했다.
그리고 결혼할 신혼부부답지 않게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내외하는 것 또한 사진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보통 사진 찍을 때 긴장하시는 신랑, 신부님이 많거든요.”
사진 작가는 카메라 렌즈에서 눈을 떼고 제 앞에 있는 완벽한 부부를 쳐다봤다.
“두 분이서 평소에 있을 때처럼 하시면 됩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네. 그러죠.”
사진 작가의 주문에 도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사진 작가는 한껏 웃으며 들뜬 모습으로 두 사람의 포즈를 기대했다.
이렇게 어색하게 서 있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의 두 부부를 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다정한 모습, 특히나 저 부부가 서로 가까이에서 그윽한 눈빛을 보내는 걸 사진으로 남긴다면…….
정말이지 평생 찍은 그 어느 화보보다 더 수려할 것임이 분명했다.
사진 작가가 느긋하게 기다리려는 걸 확인하고 도준은 옆에 서 있는 태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만 들을 수 있게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도준의 중후한 저음이 태연의 귓가를 울렸다.
“촬영이 얼른 끝나야 다음 일정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네.”
“이딴 촬영에 쏟을 시간이 많이 없다는 것쯤은 진태연 씨도 잘 알 것 같은데요.”
당연히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적응하기가 영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옆에 서서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태연의 남편이 될 이 사람을 마주한 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으니까.
결혼을 앞두고 진행되는 그 흔한 맞선 자리도 없었다.
집안 어른들끼리 몇 번 통화를 주고받고 사진을 교환하더니, 대뜸 결혼이 성사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하아.”
태연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 허리를 다시 꼿꼿하게 폈다.
추운 겨울이었으나 별장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아두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사진 작가의 의견 때문에 진행되고 있는 야외 촬영이었다.
태연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도준은 그런 태연은 안중에도 없는지 괜찮냐는 그 흔한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딱 그런 사이였다.
서로가 필요한 위치에 서서 할 일만 하도록 정해진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완벽한 연기로 덮어야만 했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게 전부인 도준과 태연은 더더욱.
그때.
멈춘 줄 알았던 눈이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흩날리더니 이내 덩치를 키워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기 시작했다.
도준은 이 추운 날 팔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태연을 힐끗 보더니 한 손을 뻗어 사진 촬영을 중단시켰다.
“밖에서는 이쯤 하죠.”
그리고 잠깐 망설이더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 아내가 많이 추워보여서.”
“그럼 별장 안으로 들어가서 남은 촬영 이어가시죠.”
그 말에 사진 작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손뼉을 치며 장비를 철수했다.
아마 도준이 진심으로 태연을 위해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남자였기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라는 게 일어날 리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사진 작가가 장비를 챙기는 동안 도준은 먼저 발걸음을 뗐다.
두터운 숄을 덮고는 있었으나 웨딩 드레스가 워낙 얇아 태연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웨딩 드레스를 입은 태연이 움직이려는 때.
한참을 앞서 걷던 도준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태연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의 단추를 풀더니 벗어 태연에게 내밀었다.
태연이 멀뚱멀뚱 그 재킷을 쳐다보고 있자 도준이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걸쳐요.”
“아, 저는 괜찮아요.”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신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한 손에는 부케를, 그리고 한 손으로는 웨딩 드레스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탓에 태연에게는 남는 손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힐끗 보고 도준은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태연의 어깨를 덮고 있는 숄 위에 자신의 재킷을 얹었다.
사진 작가가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다시 카메라를 재빠르게 들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웨딩 촬영에서는 늘 하는 주문을 하나 했다.
“지금 풍경이 너무 예뻐서요. 두 분, 가까이서 입맞춤 한 번 하실까요?”
“네?”
태연이 놀라 짧은 물음을 던졌다. 도준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주 찰나 고민을 하고 그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태연이 난처해서 아랫입술을 이로 꾹꾹 누르기만 하자 도준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큰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팔뚝을 잡아 돌렸다.
누가 보기에는 아주 박력 있는 신랑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의 속내를 아는 태연은 죽을 맛이었다.
흠집 없이 살아온 인생이 앞으로도 쭉 완벽하길 바라는 것.
그게 이 결혼에 응하는 도준의 마음가짐이었다.
결혼식을 올릴 시간조차 아까워 간단히 웨딩 촬영만 하고, 집안 어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사진 촬영은 언론에 배포할 용도라 꼭 진행해야 해서 생략할 수 없다나 뭐라나.
오히려 태연도 다행이었다. 이 짧은 촬영 하나로 결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를 얻을 수 있다면.
눈이 펑펑 내리는 별장 정원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떨리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이였다면 이 순간이 동화처럼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연에게는 아니었다.
오늘 태어나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웨딩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거기다 키스라니.
자신을 뜨겁게 쳐다보는 도준의 시선이 느껴져서 태연은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남자의 눈이라기에는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그러나 그 눈빛 안에 담긴 의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잡음 없이 이 촬영이 진행되길 바란다는 것. 그러니 얼른 해야 할 일에만 집중을 하라는 것.
잘 빚어둔 조각 같은 도준의 얼굴을 보고 태연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준의 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마치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키스를 하겠다고?’
그 생각에 답이라도 내리려는 듯.
도준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두 사람의 얼굴 사이 거리는 고작 10cm 정도.
당황해서 태연이 어깨를 움츠리며 잔뜩 긴장했다. 도준은 그런 태연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상황이 재밌기라도 한 걸까…….’
태연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도준이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이 자리에 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과정 중 하나라 하는 것뿐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그냥 연기의 연장선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착각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말라고.
곧이어 도준이 태연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차갑디차가운 눈빛과 다르게 그의 숨결은 뜨거웠고 입술은 말캉했다.
환호성처럼 카메라 셔터가 연신 눌렸다.
그렇게 아주 잠시 닿아 있던 두 사람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떨어졌다.
“와! 신혼집에 대문짝만하게 이 사진 걸어두시면 만족하실 겁니다. 제가 찍은 사진 중 가장 완벽한 결과물이에요!”
사진 작가의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지 도준은 허리를 펴면서 당당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태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슬며시 지었다.
활짝 웃은 것도 아니었고 고작 옅은 미소였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 촬영은 여기까지만 하죠.”
별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준은 팔짱을 끼라는 듯 자신의 팔을 힐끔 내려다봤다. 태연은 애써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저 안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는 집안 어른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내딛는 걸음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2년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가짜 결혼을 연기해야 하는 시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늘 이 자리가 끝나자 마자 도준은 미국에 있는 지사로 곧장 갈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 태연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한 듯 보였다.
***
Rrrrrr.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또 그 꿈이었다.
태연은 느리게 눈을 밀어 올려 기지개를 켰다. 침실 벽에는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그날의 결과물이 아크릴 액자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하.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그런 꿈을 꿔서는.”
샤워하면서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인생에 정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을 웨딩 촬영이겠지만, 적어도 태연에게는 아니었다.
가장 긴장했던 날이었으며,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아주 주기적으로 웨딩 촬영을 하는 꿈을 꿨다. 그 어느 꿈보다 태연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리고 꼭 그 꿈을 꾼 날은 운이 안 좋았다.
“오늘은 제발 아니길…….”
태연은 혼자 살기에 너무도 넓어 적막한 신혼집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현관을 나섰다.
결혼식을 올린 지 1년 6개월이나 지났다.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이 6개월 뒤에는 막을 내릴 예정이라는 말이었다.
6개월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에 잔뜩 들떠서 태연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꿈을 꾼 것도 속상한데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내리는 비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습도가 무척 높은지 꿉꿉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비 때문인지 차가 막힌 탓에 9시 정각에 딱 맞춰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했다.
기껏 드라이하고 나왔지만 눅눅해진 습기 탓에 머리는 얼굴에 턱-하니 달라붙어서 몰골이 최악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얼굴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사무실로 태연이 들어섰다.
“태연 씨, 늘 일찍 오던 사람이 오늘은 왜 딱 맞춰서 왔대?”
“아직이죠?”
“어. 본부장실에 도착은 하셨대.”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면서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최윤지 대리가 뛰어들어오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신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최 대리, 왜 그래!”
“진짜 장난 아니에요.”
“뭐가?”
“저 방금 본부장님 봤어요.”
그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윤지에게로 쏠렸다. 윤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황홀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 무슨 배우가 우리 회사에 방문한 줄 알았다니까?”
“에이. 새로 온 본부장님 본 것 맞아?”
윤지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면서 소리쳤다.
“장난 아니에요. 내 인생 태어나서 그런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봐. 진짜로!”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은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거울을 보려는 순간.
뚜벅뚜벅. 복도에서부터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KK 식품 신사업 팀 직원들이 다들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허리를 더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곧이어 신사업 팀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연의 시야에 잘 닦인 구두코가 먼저 보였다.
“반갑습니다.”
‘어?’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태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윤지가 그녀를 툭- 쳤다. 태연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얼굴 봤어?’
새로 온 본부장이 도대체 얼마나 잘생긴 남자길래 이 난리인지.
태연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빤히, 그리고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익숙한 남자였다. 오늘 아침에도 얼굴을 봤으니까. 직접은 아니지만, 그녀의 꿈에서.
상대방 역시 태연을 알아본 건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면서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앞으로 KK 식품 신사업 본부를 이끌게 될.”
그는 이름을 말하기 전 잠시 뜸을 들였다.
여전히 태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도준이 말을 이어갔다.
“차도준입니다.”
“환영합니다, 본부장님.”
박 팀장이 그를 향해 손바닥이 닳을 정도로 손뼉을 쳤고 태연을 제외한 모든 이가 활짝 웃으면서 도준을 반겼다.
‘말도 안 돼.’
태연은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면서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 역시도 꿈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했다.
미국에 있어야 할 남편이 뜬금없이 이곳에 나타날 리는 없으니까.
지독한 악몽에서 얼른 깨어났으면.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도준의 음성으로 인해 태연의 바람은 와장창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