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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부부의 대화 (20/63)


#20. 부부의 대화
2023.01.09.


태연은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들고 얼른 손을 빼냈다.


“아버지랑은 무슨 이야기 했어요?”

“주말에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태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준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태연을 관찰했다.

사이 좋은 모녀라면 주말에 부모님을 보러 간다는 말을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돌 텐데. 태연은 그와 정반대였다.

무릎 위에 올려 둔 태연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고 도준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태연이 고개를 들어 올려 도준을 쳐다봤다.


“고민 있습니까.”

“아뇨.”

“그런 얼굴인데.”

“아니에요.”

태연이 다시 시선을 피하자 도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쥐고는 다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끔 돌렸다.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입니다.”

“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진태연 씨에게 남자가 있다고 오해한 거,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라면 이미 사과도 하셨잖아요.”

“근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찝찝합니다.”

도준은 느리게 태연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태연의 밤갈색 눈동자에 꽂혔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껴본 적도 처음이고.”

“…….”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계속 신경이 쓰인 것도 처음이고.”

그 말을 전하는 도준의 눈동자에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오히려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쪽은 태연이었다.

이 남자는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할까.


“제가 신경이 쓰인다고요?”

“맞습니다.”

“도대체 왜…….”

자신이 도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했나, 돌이켜 봐도 기억 나는 게 없었다.

도준 역시도 태연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맑은 태연의 밤갈색 눈동자에 닿았다.

그래, 처음의 시작은 이 눈동자였다.

태연의 눈은 참 맑고도 투명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면 그녀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상은 온전히 반대였다.

평소에 태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의 의견에 따르는 듯하지만 정작 그게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마치 부부로서 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예전의 도준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차 회장이 보기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에 평범한 부부처럼 보일 수만 있다면.


“이젠 나와 이렇게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가 봅니다, 진태연 씨.”

도준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태연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말에 태연은 또다시 시선을 피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최 여사님도 안 계시니까……. 놓아주셨으면 해요.”

도준이 손에 힘을 풀자 태연이 엉덩이를 들어 그와 거리를 벌리려는 듯 옆으로 물러났다.

그가 애써 거리를 좁힌 게 무색할 정도로 다시금 멀어진 둘 사이였다.

태연은 늘 이런 식이었다. 딱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오지 않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그 선을 넘어간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도 하지 않고 도준이 거리를 좁혔다.

옆으로 다가온 그를 보고 태연이 소파 끝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불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탁- 잡았다. 태연의 고개가 저절로 홱 돌아갔다.


“도준 씨!”

“왜 자꾸 나한테서 도망갑니까, 진태연 씨.”

“도망이라뇨. 더운데 자꾸 옆으로 다가오셔서 그런 거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태연은 즉시 후회했다.

오히려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으니까.

도준이 입꼬리를 슬며시 당겨 올리면서 짓궂게 물었다.


“그랬습니까. 입고 있는 그 카디건을 벗으면 되겠네요.”

그의 짙은 눈동자가 가녀린 태연의 어깨로 향했다. 태연은 손을 들어 올려 혹여라도 카디건이 흘러내릴까 싶어 철벽 방어를 했다.


“설마 내가 벗길까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네? 아뇨.”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태연이 입술을 말아 물더니 오해했다는 사실을 이내 실토했다.


“도준 씨가 옆으로 조금만 가주면 더운 것도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가 미동도 없자 태연은 본인이 이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했는지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도준에게 손목이 탁- 잡혀 다시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진태연 씨, 오늘 이 집에 우리 둘뿐입니다.”

“……네.”

“부부의 대화를 좀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랐다. 그리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준 씨,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왜 그렇습니까.”

태연은 이번에도 카디건을 두 손으로 꽉 잡아서 가슴 앞에서 여미면서 연신 도준의 눈치를 봤다.


 


“그……. 그거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로 하는 거니까요.”

태연의 말이 끝나고 도준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러고는 이내 그가 아랫입술을 혀로 느리게 쓸면서 되물었다.


“진태연 씨, 설마 내가 말하는 그 부부의 대화를 다른 거로 오해한 겁니까?”

“네?”

뺨이 붉게 달아오른 태연을 보고 도준은 확신했다. 그의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호선을 그렸다.


“하하. 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말을 했군요.”

“…….”

“스킨십을 하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진태연 씨가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라고요?”

태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도준은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코 그런 수작 부리자고 꺼낸 말, 아니었습니다.”

“분명 부부의 대화를 하자고…….”

“이런 대화 말입니다. 서로에 대해 아직 잘 모르니 이야기를 하자는 거였는데.”

“아.”

태연이 단말마의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이내 조그마한 손으로 얼굴을 홱 가렸다.

도준이 한 말을 오해한 게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아직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태연을 도준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두 팔로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체구가 그의 두 눈에 쏙 들어왔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도준은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었다.


“귀엽네.”

태연이 얼굴을 스르륵 들어 도준을 올려다봤다. 이번에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는 쪽은 도준이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태연도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의심하며 대답했다.


“귀엽……다고 하셨어요.”

“내가?”

“네.”

“허.”

이번에 소파에서 먼저 일어난 건 도준이었다.

그리고 거실을 정처 없이 배회하면서 앞머리를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 넘겼다.

변명을 찾던 도준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하는 진태연 씨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아……. 네.”

태연이 어색하게 웃자 도준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 분위기를 전환해보고 싶어 태연도 그를 칭찬했다.


“지금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도준 씨 모습도 나름.”

“나름?”

“귀여우세요.”

“…….”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태연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방금 내뱉은 말에 대해 후회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또 혜숙이려나 싶어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상대방은 민현이었다.

도준 역시 발신자를 동시에 확인하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남자군요.”

“남자, 아니고 친구요.”

“그래요. 남자인 친구.”

태연이 전화를 받지 않고 휴대폰을 뒤엎자 도준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태연에게 건넸다.


“받아요.”

“아뇨, 안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도준이 한 번 더 휴대폰을 내밀면서 흔들자 태연이 마지못해 받았다.


“그럼 얼른 받고 올게요.”

안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후다닥 받고 올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태연의 손을 도준이 깍지껴 잡아서 당겼다.


“받으시라면서요.”

“그랬죠.”

“이걸 놓아 주셔야 받을 수 있는데.”

“여기서 받으면 되겠군요.”

“네?”

도준은 휴대폰을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재촉했다.


“전화 끊어지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망설이던 태연은 이내 결정했다. 도준에게 민현과의 대화를 숨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태연의 손가락이 초록색 수신 버튼을 꾹 눌렀다.


-태연아, 내가 보낸 메시지 봤어?

“어. 읽었어.”

-그날 일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민현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하더니 이내 뜬금없는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네 회사 앞에서부터 수상한 검은 세단이 계속 따라왔어. 우연인가 싶었는데 레스토랑으로도 같이 들어오더라고.

“그랬구나.”

이 부분은 태연 역시 몰랐던 부분이었다. 통화하던 태연이 슬쩍 도준을 보자 그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테이블에서 남자 한 명이 너를 노려볼 듯 쳐다보고 있더라고. 혹시 네 스토커인가 해서 반응을 보려고 그랬던 거야.

“아, 그 남자는…….”

-알아. 정말 다행히도 네 남편이었지. 사과하고 싶어. 너에게도, 그리고 형님에게도.

통화 내용이 들리는지 도준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상태였다. 태연이 민현과 대화를 잘 마무리하고 통화를 끊었다.


“회사에서부터 절 쭉 따라온 검은 세단, 도준 씨예요?”

“맞습니다.”

“왜 그러셨어요? 설마 제가 민현이랑 수상한 사이라고 오해해서 그러셨던 건가요?”

“아닙니다, 진태연 씨.”

도준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본인이 그날 레스토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 속 인물이 진태연 씨인 줄 알았던 시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진태연 씨의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가 그 현장에 나타날 거라 예상했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럼 저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셨어요?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보였을 텐데.”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네? 네.”

“질투가 나서. 이 말은 그날도 했던 것 같은데.”

“질투라뇨!”

“내 앞에서는 딱 할 말만 하고 잘 웃지도 않으면서, 그 남자 앞에서는 편해 보여서 부러웠습니다.”

너무도 솔직한 말이었다. 도준 역시도 그 말을 해놓고 스스로 놀랐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제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그랬던 자신의 입에서 부럽다는 말이 흘러나올 줄이야.

태연 역시도 도준의 말이 놀라웠는지 선뜻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친구, 앞으로 둘이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게요. 괜히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도준 씨도 저도 힘들어지니까.”

도준이 한국에 들어온 이래 가장 많은 대화를 한 날이었다. 시곗바늘이 어느덧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둘 사이 어색함의 벽도 점점 녹아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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