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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미처 말하지 못한 잠버릇 (29/63)


#29. 미처 말하지 못한 잠버릇
2023.02.09.


그러나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도준은 가까이 다가와서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쳐 앉으면서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진 대리가 제안한 곤약 밥은 잡곡 맛, 된장 맛 이렇게 총 두 가지였죠.”

“맞습니다.”

“된장 맛에 수요가 있을지는 고민이 되는군요.”

“사실 저도 직접 제작해서 먹어본 건 아니라 본부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부산에 있는 공장에 가서 직접 맛을 본 뒤 세부적인 논의를 해봅시다.”

“알겠습니다. 전화해서 일정 잡고 다녀온 뒤 보고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태연 혼자서 출장 다녀오라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준은 팔짱을 낀 채로 태연을 내려다봤다.


“내 일정, 안 물어봅니까.”

“네?”

“최 비서에게 물어보면 가능한 시간 알려줄 겁니다.”

그리고 도준은 할 말이 끝났는지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태연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아서 세웠다.


“본부장님도 같이 가신다고요?”

“진 대리 혼자 갈 생각이었습니까?”

대답은 오가지 않고 질문만 허공에 붕 뜬 순간이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나도 같이 갑니다. 나도 함께 가서 직접 맛을 보고 결정 내려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

도준이 오기 전 본부장은 신제품을 개발하는 세세한 과정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가 했던 것이라고는 올라오는 결재 서류에 사인하고 윗선에 아부하는 일뿐이었으니까.

도준이 먼저 물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습니까.”

“네?”

“질문을 다시 하죠. 본부장인 차도준이 출장에 함께 하는 게 싫은 겁니까, 아니면.”

“…….”

도준은 굳게 닫힌 회의실 문을 한 번 바라보고 태연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남편인 차도준을 출장 가서도 봐야 하는 게 싫은 겁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해봐요.”

“싫다기보다는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어떤 게?”

“본부장님께서 이런 소소한 출장까지 같이 가실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아닌 다른 직원의 기획안이 통과됐어도 같이 갔을 거냐는 물음은 미처 내뱉지 못했다.

그게 혼자만의 착각일 경우 도준에게 비웃음을 사기 싫었기 때문이다.

도준은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얼굴을 했다.


“내가 할 일은 신제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없이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는 일입니다.”

태연이 손에 든 다이어리를 꽉 쥐었다.


“부산이 아니라 공장이 무인도에 있다고 해도 난 진 대리와 함께 갈 생각인데.”

“네?”

“아,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무인도까지 진 대리를 쫓아간다는 말은 아니고.”

그게 그거 아닌가. 어디까지나 자신이 못 미더워서 따라온다는 건가 싶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태연의 마음을 읽은 듯. 도준이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진 대리가 혼자 가서 잘하고 오겠지만. 현장에서 조율이 잘 안 될 시 도움을 주기 위해 따라가는 겁니다.”

도준이 몸을 빙글 돌렸다.


“일종의 든든한 보험 같은 거.”

도준은 자신이 출장에 함께 가는 게 태연이 일을 잘하는지 감시하는 용도가 아니라 더 수월하게 풀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의사를 명확하게 전했다.

이해는 갔지만, 그렇다고 그와 함께 출장을 가는 게 마음이 편해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니 출장 일정 잡을 때 내 스케줄도 꼭 고려해줘요.”

 

***

집에 도착해서 쉬고 있는 때. 태연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당연히 진 사장일거라고 생각했으나 메시지를 보낸 이는 차 회장이었다.

태연이 서둘러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우리 며느리, 뒤늦은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직 전달해주지를 못했구나. 언제 시간이 되는지 말해주면 내가 직접 가마.]

태연은 곧장 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연결음이 들리지 않고 차 회장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메시지 보고 전화 드렸어요.”

-우리 새아가, 저녁 시간을 내가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에요. 쉬고 있었어요.”

-생일 선물이 좀 많이 늦긴 했는데. 그래도 꼭 주고 싶어서 연락했단다.

“회장님 되는 시간에 제가 백상재로 갈게요.”

-허허허. 아니다. 내가 보러 가마. 아, 신혼집에 찾아가는 게 민폐…….

차 회장과 통화를 하는 때. 밖에서 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태연 씨,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태연은 차 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난 뒤 방문을 열었다. 운동을 끝내고 돌아온 건지 그의 앞머리가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도준은 태연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 회장님입니까.”

“네? 아, 네.”

도준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면서 태연에게 휴대폰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태연이 머뭇거리자 도준이 다리를 굽혀 태연의 휴대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버지, 불쑥 이렇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불편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차 회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태연이 도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태연을 올려다봤다.


“제가 연락드린 거예요. 우리는 통화 끝내고 이야기해요, 나가주세요.”

단호한 음성에 도준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을 했다. 태연은 문을 닫을 기세로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얌전히 그녀의 방을 나갔다.

문을 꽉 닫고 난 뒤, 태연이 차 회장과 통화를 이어갔다.


“아버님, 죄송해요. 통화 중에 도준 씨가 불쑥 들어와서.”

-허허허. 아니다. 신혼인데 내가 눈치 없이 전화를 너무 오래 했구나.

“아니에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난 언제든 좋단다. 이만 끊어야겠다. 도준이 놈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지…….

차 회장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전화를 얼른 끊었다. 괜스레 미안했다.

태연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건지 도준의 방에 그는 없었다.

1층에 있는 부부 침실로 들어가니 역시나 그 안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가 멈추더니 욕실 문이 열렸고 도준이 걸어 나왔다. 하체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로.

누가 마음먹고 빚은 듯한 짜임새 있는 가슴 근육 아래로 더욱 조화로운 복근이 들어 있었다. 잘 갈라진 상체 근육은 마치 공들여 만든 조각 같았다. 아직 덜 닦아낸 물이 그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찔했고 위험했다.

생각도 못 한 그의 등장에 태연은 깜짝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랐다.


 
거실로 나가 있을 생각에 태연이 걸음을 떼려고 하자 도준이 나지막한 저음을 쏟아냈다.


“할 말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여전히 뒤를 돈 상태로 태연이 말했다.


“옷 입으시고 나면 할게요.”

어느새 도준이 태연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안 입을 거라면?”

“네?”

태연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따지려고 몸을 홱 돌렸다.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태연의 눈앞에는 온통 살구색이 펼쳐져 있었다.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하신 말씀, 도대체 무슨 의미예요?”

“의미? 그런 것 없습니다. 말 그대로 잠옷을 입을 생각 없다는 건데.”

“왜요?”

“답답해서?”

어이없는 답변에 태연이 입을 열어 말을 다다다 쏟아냈다.


“도준 씨, 짐승도 아니고 옷을 답답해서 못 입겠다는 게 합리적인 핑계가 된다고 생각해요?”

도준은 더 해보라는 듯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우리 커플 잠옷이 문제인 것 같네요. 그 브랜드 제품, 몸에 타이트하게 붙어서 그럴 거예요. 제가 내일 백화점에 가서 편한 잠옷으로 골라 올 테니 오늘 하루만 참으세요.”

그와 커플 잠옷도 입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도준은 생각에 변화가 여전히 없는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가 진태연 씨를 배려하기 위해 이야기를 안 한 버릇이 하나가 있습니다.”

짙어진 도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더한 말이 나올 것만 같아 겁이 덜컥 났다.


“뭔데요?”

“원래 잘 때 아무것도 안 입고 자는 편입니다.”

“…….”

태연은 자신이 들은 말이 뭔가 싶어 두 눈만 끔뻑거렸다.

잠깐만.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면 잠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안 돼요!”

태연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당겨 올리면서 물었다.


“엄청 단호하네요, 진태연 씨.”

“혼자 계셨을 때는 홀딱 벗고 주무시든 꽁꽁 싸매고 자든 상관 안 하는데 저랑 같이 지내는데 알몸으로 주무신다는 건…… 하아, 좀 힘들지 않을까요?”

태연이 간곡히 사정한다는 듯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서 마주 잡았다.


“힘들다?”

“네. 그렇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태연을 보는 게 무척 재밌었다.

도준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잔뜩 걸렸다.


“누가? 내가? 아니면 진태연 씨가?”

“당연히 제가…….”

태연이 말꼬리를 흐렸다.

벗고 자는 건 도준인데 왜 그가 힘들 수도 있다는 거지. 이건 무슨 의미일까.

이내 그 뜻을 깨닫고 태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도준 씨, 옷을 입고 자는 게 힘들다면서요.”

“그렇죠.”

“제 옆에서 도준 씨가 벗고 자는 게 힘들 수 있다는 말, 방금 돌려 하신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도준이었다. 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입어도 벗어도 힘들다면 저를 위해 그냥 잠옷은 입어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한 말은 진태연 씨를 놀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태연은 못 미덥다는 듯 도준을 쳐다봤다.


“옷을 다 갖춰 입고 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요즘 다 껴입고 잤더니 자꾸 가위에 눌리더군요. 그래서 회사에 출근해서도 머리가 자주 아파 왔고.”

가위에 눌린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그러나 그게 태연에게는 먹힌 모양이었다. 태연이 걱정스럽다는 듯 도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요?”

“네. 악몽도 자꾸 꿉니다. 아주 빈번하게.”

도준이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면서 힘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 난처해하는 태연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벗고 자도 된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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