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부부 사이에 생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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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부부 사이에 생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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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부부 사이에 생긴 비밀
2023.02.16.
어스름한 새벽빛이 드는 침실.
도준이 윗옷을 입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는 사실 때문에 태연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잠에 들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태연은 느리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태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왜…….”
태연의 눈앞에 보이는 건 살구색의 향연이었다.
분명 도준에게서 등을 돌려 침대 끝자락에서 잠들었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다가온 건지.
도준이 있는 쪽으로 돌아누운 거로 모자라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파고든 모양이었다. 그의 품에 쏙 들어간 상태로 쭉 잠을 잔 것 같았다.
“밤에 좀 추워서 나도 모르게 안겼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언제부터 이렇게 도준에게 안겨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 손은 또 왜 이래.”
태연은 도준의 탄탄한 복근 위에 떡하니 올려둔 제 손을 황급히 가지고 왔다.
어쩐지 침대가 평소랑 다르게 딱딱한 것 같더라니.
자신이 손으로 연신 더듬었던 게 도준의 복근이었다는 걸 깨닫고 태연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리자 도준은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건지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태연은 짧은 숨을 뱉어냈다.
“그래도 도준 씨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태연은 제 허리 위에 올라가 있는 도준의 팔을 슬며시 들었다.
혹시라도 도준이 깰까 싶어서 아주 조심하면서.
도준의 팔을 침대로 내려놓고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황급히 도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잠버릇이 전혀 없다고 호언장담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도준의 품에 안겨 푹 잤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이 도준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당황스러워했을지…….
침대 밖으로 나가려던 태연은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보다 눈을 일찍 뜬 탓에 여유가 조금 있었다.
“조금만 더 누워 있어야지.”
그리고 태연은 홀린 듯 잠이 든 도준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답지 않게 맑은 피부는 물론 오뚝하게 솟은 콧날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아침이었지만 뽀송뽀송한 피부는 덤이었다.
제 남편이었지만 진짜 잘난 외모였다.
도드라진 턱선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 날카로움에 베일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평소 회사에서 도준은 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에 집중하곤 했다. 그럴 때면 늘 눈매가 서늘하리만큼 깊어지곤 했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부드러운 얼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준의 얼굴을 감상하던 태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태연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도준이 무척 차갑고 냉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준이 귀국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많이 변했다.
“고마운 것도 많고…….”
진 사장과 태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도준은 정말 신기하게 매번 나타나서 어깨를 빌려주며 힘이 되어줬다.
그런 것을 바라고 한 결혼이 아니었다. 그저 진 사장의 시야에서 벗어날 2년이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뜻밖의 온기를 얻은 게 고마우면서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 사장과 태연이 약속한 이 결혼의 유효기간은 2년.
2년 안에 KK 그룹에서 차신 유업이 투자를 받고 난 뒤에는 태연이 이혼을 하든 한국을 뜨는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조건 때문에 한 결혼이었다.
물론 결혼한 뒤 도준이 쭉 미국에 있을 것이라는 점도 구미를 자극하기는 했지만.
도준 역시 KK 그룹을 물려받기 위해 한 결혼이었다.
남은 6개월 안에 그가 KK 그룹 후계자로서 자리를 공고히 한다면, 그 이후 이 결혼을 유지하든 말든 도준에게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진 사장은 이 결혼을 통해 오로지 투자, 그것 하나만을 바랐다. 투자가 성공적으로 성사된다면 더 이상 진 사장과 혜숙, 태진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
도준 역시 원하는 후계자 자리를 갖기만 한다면 저를 더 이상 붙잡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도준과 이혼은 무척이나 쉬워 보였고 제 자유를 위해 필연적인 것이었다.
처음에 도준이 한국에 왔을 때, 태연은 6개월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간이 천천히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바뀌었다.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 느끼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태연은 싱긋 웃었다.
“이제 나도 준비해야지.”
도준이 깨기 전, 출근 준비를 할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태연은 2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도준의 품에 안겨 깬 게 자꾸만 생각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손끝에 도준의 복근을 만졌던 그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치 엄청 딱딱한 바위 같았어. 사람 몸이 어쩜 그럴 수 있지?”
샤워하는 동안에도 가까이서 마주했던 도준의 얼굴과 그의 탄탄한 몸매가 자꾸만 떠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먼저 일어나서 그래도 다행이야.”
오늘 아침의 일을 도준은 전혀 모를 거라 생각하며 태연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결혼 생활이 쉽진 않지만 그래도 마냥 힘든 건 아니네.”
샤워하는 태연의 입매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하나씩 아침에 일어난 일의 진실을 감췄다.
서로를 위한 배려라 생각하며.
***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금요일 오후.
도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태연과 함께 출장 가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꼼꼼한 성격의 태연에게 오늘도 감탄하는 날이었다.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진 대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숙소를 어디로 잡을지 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숙소는 내가 알아서 잡겠습니다.”
“그럼 제가 부산의 호텔 리스트 정리해서 드릴 테니 본부장님께서 골라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예약은 내가 직접 합니다.”
“본부장님께서요?”
“아, 정확하게 말하면 최 비서가.”
자신이 하겠다고 하려다 이내 태연은 그만두었다. 도준의 취향을 잘 아는 것은 자신보다 최 비서였으니까.
최 비서가 어련히 알아서 도준의 마음에 드는 호텔을 예약하려니 하며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지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연을 도준이 붙잡았다.
“오늘 저녁은 따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안 물어봅니까.”
도준의 물음에 태연이 그를 응시했다.
“내가 어디 가는지. 진태연 씨는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는 것 같아서.”
태연이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웃었다.
“본부장님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도준이 미간을 좁혔다.
“배려입니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아닙니다. 대답,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혹시라도 관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 자존심이 상할까 봐 한 말이었다.
태연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건 채로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그리고 도준에게 물었다.
“업무적인 만남인가요? 아니면 사적인 만남이에요?”
태연의 질문을 듣고 도준의 눈이 옆으로 가늘어졌다.
“업무적인 미팅이라면 부하 직원으로서 물어보는 거고요.”
태연의 말간 얼굴을 빤히 보면서 도준은 더해보라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사적인 만남이라면 아내로서 하는 질문입니다.”
피식- 만족스러운지 도준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둘 다 섞인 미팅입니다.”
태연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미팅이 있을 수가 있나.
이윽고 도준의 입이 열렸고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그 안에서 나왔다.
“진 사장님께서 미팅을 요청해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요?”
“네.”
태연은 도준 모르게 들고 있는 다이어리를 힘주어 잡았다.
요즘 진 사장의 전화를 피했더니 아예 도준에게 직접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KK 그룹에서 투자를 받아내고 싶어 혈안이 되었으니까.
도준과 진 사장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덜컥 겁부터 났다.
도준은 그런 태연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슈트 재킷을 챙겼다.
“최 비서가 진 대리를 집까지 데려다줄 겁니다.”
“아뇨, 혼자서 갈게요.”
“들를 곳이라도 있습니까?”
“도준 씨가 집에 늦게 올 것 같으니까. 저도 오랜만에 친구 만날까 해서요.”
도준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여자인 친구입니까.”
“네? 네.”
“다행이군요.”
대뜸 친구 성별은 왜 물어본 거지.
“남자인 친구는 만나면 안 되나요?”
순수한 물음이었다. 도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그것도 질문이냐는 듯 되물었다.
“내가 여자인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고 하면?”
“다녀오세요. 친구라면서요.”
“…….”
“성별이 여성일 뿐. 아닌가요?”
“허.”
이번에도 어찌 된 게 태연의 술수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괜스레 마음이 좁은 남자처럼 보일까 싶어 도준은 말을 덧붙였다.
“나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진태연 씨가 친구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어서.”
주절주절 이유를 덧붙이는 도준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귀여웠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만나요. 제 친구랑.”
“그래도 됩니까.”
“네. 안 될 건 없죠.”
***
고급 일식집 주차장으로 도준의 차가 들어섰다.
진 사장의 이름을 말하니 구석에 위치한 프라이빗한 룸으로 직원이 도준을 안내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 사장이 보였다.
“차 서방, 왔는가.”
진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도준을 향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앉지.”
자리에 앉아 요리를 시키고 난 뒤. 진 사장은 뭐가 그리 급한지 본론부터 꺼내려고 했다.
“차 회장님은 잘 지내시는가?”
“네. 건강을 살뜰히도 챙기시는 분이라서. 잘 지내십니다.”
진 사장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보기 위해 도준에게 술을 건넸지만, 그가 거절했다.
“오늘 최 비서가 없어서 직접 차를 몰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술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최 비서는 왜 상사를 두고 먼저 퇴근한 건가.”
“태연이를 집에 데려다주러 갔거든요.”
생각도 못 한 답을 들은 진 사장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렇구먼.”
진 사장은 자신의 잔에만 술을 따라 한 잔 마셨다.
그가 투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는 때. 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