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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눈물의 고백 (54/63)


#54. 눈물의 고백
2023.05.08.


태연의 위로 도준의 우직한 그림자가 자리했다.

도준은 두 팔로 제 몸을 탄탄하게 지탱하면서 난처한 얼굴로 태연을 내려다봤다.

평소라면 당황하며 긴장했을 태연이 오늘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면서 말이다.


“진태연 씨?”

“네.”

“유혹하는 겁니까.”

“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미치겠네.’

도준은 태연의 뒷말을 기다리면서 잠자코 있었다.

열이 들끓고 있어서 제 아래에서 태연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도준 씨, 가지 마요.”

“안 갑니다.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태연은 두 팔을 들어 올려 도준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면서 슬쩍 도준을 당겨서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태연이 처음으로 하는 돌발 행동에 도준은 얼음이 된 사람처럼 굳었다.


 


“오늘 혼자 있었는데 쓸쓸했어요.”

태연은 아래에서 도준을 쳐다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집도 너무 넓고, 특히나 침대는 더 넓고. 하아.”

태연이 옅은 숨을 내쉴 때마다 도준에게도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태연 씨, 우선 김 박사님부터 부릅시다.”

태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수액도 맞았고 이따가 약 먹으면 돼요.”

“그럼 약부터.”

도준이 움직이려고 하면 태연은 그의 목을 휘감은 팔에 더 힘을 주면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태연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관찰했다.

마냥 웃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에 여러 감정이 서려 있었다. 살짝 흔들리는 동공에는 슬픔도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안 갈게요. 걱정 말아요.”

“진짜요?”

“진태연 씨와 했던 약속은 나, 지금까지 다 지켰는데.”

그 말에 태연은 도준의 목을 꽉 잡았던 손을 슬며시 풀었다.

흔들리던 태연의 다갈색 눈동자도 점점 안정을 찾았다.


“아픈데 혼자 둬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김 박사님도 같이 계셨고…….”

“그럼 뭐해. 내가 없었잖아. 당신 옆에.”

도준은 넥타이를 당겨 바닥으로 던지고는 한 팔로 머리를 지탱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태연도 몸을 돌려 도준을 쳐다봤다.

태연이 손을 뻗어 도준의 잘난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뭐가 그렇게 고맙습니다.”

“도준 씨가 내 남편이라서요.”

“또.”

“그리고 이렇게 다정하게 저를 대해줘서.”

도준은 피식 웃었다.

제 뺨에 올려져 있는 태연의 손을 슬며시 잡고는 아래로 내리면서 깍지를 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안 고맙고?”

그 말에 태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나마 평온했던 태연의 얼굴에 동요가 이는 걸 보고 도준은 피식 웃었다.


“뭐야, 그건 정말 안 고마운가 보네.”

태연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고맙죠, 당연히.”

“그런데 그건 왜 빼먹습니까.”

“사실 아직 믿기지 않아서요.”

“뭐가. 내가 사랑한다는 게?”

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거짓말 같다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태연은 잠깐 망설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누군가가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처음이라서요.”

“…….”

이번에 놀란 것은 도준이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진 사장과 혜숙에게서도 그 흔한 ‘사랑한다, 우리 딸’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도준 외에 다른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으니 그가 당연 처음이었다.

도준은 속내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을 하면서 태연을 빤히 쳐다봤다.


“도준 씨, 저 한심하죠?”

“아뇨.”

도준은 조금 더 몸을 가깝게 가지고 오면서 태연과 시선을 겹쳤다.


“진태연 씨에게 고백을 한 남자가 내가 처음이라 기쁘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너무도 진솔한 말에 태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는데.”

“뭔데요?”

“질릴 때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네?”

“나 싫어할 겁니까.”

진지한 물음에 태연은 두 눈을 반달처럼 접으면서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진짜 진지한데.”

“음.”

태연도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사실 겪어보지 않은 거라 뭐라 확답을…….”

“사랑합니다, 진태연 씨.”

태연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사랑한다고. 내가 많이.”

진솔한 고백을 듣고 있자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진짜 난데없이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아.”

도준은 태연의 눈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을 보고 진심으로 당황했다.


“미안합니다. 난처하게 하려고 한 고백은 아닌데.”

도준은 서둘러 검지를 뻗어 침대 시트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에요. 제가 더 미안해요. 아, 갑자기 왜 눈물이 나는 거지.”

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침대 헤드에 몸을 걸치고 앉았다. 침대 곁에 둔 탁자에서 도준은 얼른 티슈를 뽑아다 건넸다.


“미안해요. 앞으로 질릴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 안 하겠습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태연은 눈물을 닦으면서 칭얼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이 또한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대본 적도, 응석을 부린 적도.

도준은 이 순간에도 태연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애써 꾹 누르면서 점잖은 척을 했다.

한 번 더 고백을 했다가는 침실이 눈물 바다가 되버릴 지도 몰라 아주 비상 사태였다.

도준은 태연의 감정이 잦아 들 때까지 옆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태연은 벌개진 눈가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푹 숙이면서 말을 뱉어냈다.


“아파서 저도 모르게 조금 감성적이었나봐요.”

사실 처음으로 듣는 사랑한다는 고백에 그간 서러웠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같은 딸이지만 진 사장과 혜숙은 제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게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려 했으나 유년기에 많은 상처였던 모양이다.

태진에게는 하루에도 수십번 사랑한다는 말을 달고 살던 이들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랑한다.’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말이다.

그랬던 말을 도준의 다정한 음성으로 듣고 있으니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그러나 도준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벌리면서 태연을 기다릴 뿐이었다.


“안아주고 싶은데, 지금.”

“…….”

“안길래요?”

때때로 보면 도준은 귀신같이 제 마음을 잘 알았다.

누구보다 지금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태연이었다.

태연은 잠시 망설이는 척을 하고는 이내 선심 쓰듯 도준에게로 다가갔다.

도준은 팔을 뻗어 태연을 제 안으로 당기고는 꽉 안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군요.”

태연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도준을 볼 때마다 설레었던 그 마음. 아마도 도준과 같은 감정이지 않을까.

그러나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 했다.

그럴 용기가 없어서.

도준은 오늘 집무실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금 태연의 등을 쓸어 내렸다.


“편하게 누워요. 재워줄 테니까.”

태연은 도준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서서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저 혼자 잘 수 있어요. 그러니까 씻고 오세요.”

“진태연 씨가 잠들면 가겠습니다.”

도준은 무척 확고했다. 몇 번을 보내려고 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얼른 잠들게요. 그래야 도준 씨도 씻으니까.”

“잘 생각했어요.”

도준은 눈을 감고 누은 태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규칙적으로 그녀의 손을 두드렸다.

아까 제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서 도준 역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태연의 곁에 있다 보면 이렇게 머리도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불쑥 튀어나온다.

생각해보면 진 사장의 앞에서도 엄청나게 태연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고 온 것 같은데.

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제가 변해버린 건지.

확실한 건 태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새 잠이 든 건지 새근거리는 소리가 침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거 압니까.”

“…….”

“사랑한다고 한 번 말하기가 어렵지, 그 뒤로는 아주 쉬워요.”

물론 당신이란 여자가 쉬운 건 아니지만.

도준은 태연이 잠들고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

태연이 곤히 잠든 것을 보고 도준은 얼른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더웠지만 에어컨을 아예 껐다.


“몸은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어 태연의 옆자리에 누워 도준은 습관처럼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뭐야.”

아까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 식은땀도 나는 것 같았다.

도준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스탠트를 켰다.


“진태연 씨!”

온몸이 불구덩이처럼 달아오른 상태였다.

집에 있던 체온계를 가지고 와서 태연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런.”

정상 체온을 이미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새벽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도준은 김 박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김 박사님, 제 아내가 지금 열이 펄펄 끓습니다.”

-제가 해열제 처방해드렸는데 혹시 드셨습니까.

김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도준은 태연이 처방받은 약봉지를 뒤졌다.


“안 먹고 잠든 것 같은데요.”

-그거부터 우선 먹이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지방 출장에 와 있어서 도착하려면 내일 아침쯤 되어야 합니다.

“하아. 우선 알겠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준은 태연을 흔들어 깨웠다.


“진태연 씨, 잠깐 일어나봐요.”

“흐으응.”

태연은 옅은 신음 소리만 낼 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약을 어떻게 먹이라는 거야.”

도준은 다시금 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박사님, 제 아내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해서 약을 못 먹일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약을 꼭 먹어야 하는데…….

잠시 망설이던 김 박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방법을 한번 써보시겠어요?

김 박사는 보통 약을 잘 못 먹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쓰는 방법이라면서 무언가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김 박사는 도준에게 약을 먹이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말을 남기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가 오려면 최소 네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이렇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약을 빻을 것을 찾아야 하는데.”

부엌으로 내려가서 도구를 찾을까 하던 도준은 그럴 시간도 아까워서 약봉지를 우선 뜯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약을 제 손에 올리고 도준은 눈을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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