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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입 벌려봐요 (55/63)


#55. 입 벌려봐요
2023.05.11.



“아이가 약을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하면 보통 엄마들이 약을 잘게 빻아서 물에 섞어서 주곤 합니다. 본부장님께서도 사모님께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김 박사의 말을 떠올리며 도준은 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으깨보려고 엄지에 힘을 꾹 줬다.

그러나 콩알만 한 해열제는 좀처럼 부서지지 않고 도준을 놀리듯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피해갈 뿐이었다.


“아, 진짜.”

이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제 입에서 이걸 가루처럼 만들어서 태연에게 주는 것.

제 몸이 아파도 약을 잘 먹지 않는 도준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새가 없었다.

도준은 망설임 없이 입안에 알약을 넣었다. 그러고는 이를 이용해서 약을 반으로 쪼갰다.

입안 가득 그토록 싫어하는 약의 쓴맛이 퍼졌지만, 지금은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얼른 약을 뱉어내고 손으로 꾹 누르자 그제야 약이 잘게 으스러졌다.


“진태연 씨, 입이라도 벌려봐요.”

태연의 몸을 슬쩍 일으켜서 안에 약을 집어넣었다.

도준은 생수병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태연의 입으로 조금씩 흘려서 전달해줬다.


“흐음.”

태연은 제 입으로 무언가가 들어오자 놀라서 밀어내려고 했다.

실컷 입 안에 넣어둔 약을 혹시 뱉어낼까 싶어 마음이 조급해진 도준은 저도 모르게 태연의 입 안으로 뜨거운 숨결을 밀어 넣었다.


 
말랑한 태연의 입술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도준은 눈을 꾹 감아야만 했다.


‘환자를 상대로 무슨 상상을 하는 건데.’

도준은 자꾸만 온몸에 피어 오르려는 이상한 상상을 억누르며 약을 먹이는 것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태연은 도준이 직접 먹여준 약과 물을 천천히 삼켰다.


“잘했습니다. 한 번 더 할 거니까 뱉어내지 마요.”

도준은 이번에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해열제를 간신히 다 먹였다.


“하아.”

이 조그마한 한 알의 약이 제발 효과가 있기를 바라야 할 뿐이었다.

도준은 태연을 다시금 눕혀 놓고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태연에게서 옮은 건지 온몸에 후끈 열기가 돌았다.

손 부채질을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 박사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본부장님, 혹시 열이 너무 심하면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라고.”

도준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연이어 그 답이 메시지로 날아왔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모님 열이 내릴 때까지 차가운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셔야 합니다.]

“…….”

도준은 메시지를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직접?”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놓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내가 해야지, 그럼 누구에게 맡기겠어.”

병원에 데리고 갈까 했던 마음은 이내 싹 없애버렸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태연의 몸에 손을 댄다는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으니까.

도준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서 수건에 찬물을 적셨다.

제 팔에 대어서 온도를 확인하고는 태연에게로 다가왔다.

옷을 벗기지 않아도 드러나는 팔과 다리를 먼저 닦고 나서 도준은 다시금 고장난 로봇처럼 굳었다.


“이게 효과가 있는 게 맞아?”

김 박사가 저를 일부러 놀리려는 게 아니니 효과가 있는 방법이긴 할 텐데.

잠들어 의식이 없는 아내의 옷을 벗긴다는 자체가 내키지가 않았다.

도준은 눈을 꾹 감으면서 태연의 잠옷 상의를 슬며시 들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배 부근을 닦아주다가 이내 손을 빼냈다.

아무래도 제가 닦아주는 건 못할 듯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잠옷을 죄다 벗겨다가 수건으로 닦아 열을 내리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고.

현실은 태연의 잠옷 단추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툭- 하고 터져버릴 제 나쁜 욕망이 고개를 쳐들 것 같아서.


“절대 부끄러워서 이러는 건 아니고.”

깨어났을 때 태연이 놀랄 걸 대비해서 그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준은 잠시 망설였다.

이 상태로 태연의 몸을 닦아주다가는 아마 수도승처럼 도를 닦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럴 만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도준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저 대신 태연을 책임져 줄 사람이 필요했다.

혜숙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태연에게 폭행을 서슴지 않았던 모습이 떠올라 이내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남자인 저보다는 믿을 만한 여성에게 태연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도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도준은 거실에서 초조한 사람처럼 왔다갔다하며 정처 없이 배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 여사가 부부 침실에서 나왔다.


“본부장님, 사모님께서 열이 좀 내리셨습니다.”

“그래요?”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물수건으로 닦아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하겠습니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침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최 여사를 도준이 붙잡았다. 혹시라도 오해를 할까 싶어서 미리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내가 하기 싫어서 최 여사님께 부탁한 게 아닙니다.”

“아유, 그럼요. 이게 은근 체력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제가 하면…….”

머뭇거리는 도준을 보고 최 여사는 잘 큰 아들을 보는 엄마의 얼굴을 하면서 웃었다.


“우리 사모님, 제대로 닦아주시기도 전에 본부장님께서 곤란해지시면 안 되니까요.”

“아.”

“들어가보겠습니다.”

정곡을 찔러놓고 최 여사는 평온한 얼굴을 하며 다시 태연의 곁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도준은 제 속내를 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눈부신 햇살이 넓은 통창으로 들어오면서 잠든 태연의 얼굴을 비췄다.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태연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입고 잔 옷이 아닌데?”

도준과 커플인 핑크색 잠옷을 입고 잠든 것 같은데. 지금 자신은 편한 홈웨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꿈을 꿨나?”

그렇다기에는 지금 입는 옷이 평소에도 잘 꺼내 입지 않는 원피스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침실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습니까.”

“네. 근데 이거 옷이…….”

“어젯밤 진태연 씨가 열이 많이 나서 땀을 좀 흘렸고, 그래서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네?”

당혹스러워하는 태연의 얼굴을 보고 도준이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해명했다.


“내가 벗긴 거 아닙니다.”

“그러면요?”

태연의 얼굴은 못 믿겠다는 듯 변했다.


“최 여사님께 요청했습니다. 최 여사님이 밤새 물수건으로 옆에서 간호했어요.”

“아, 그랬구나.”

태연은 이내 도준을 오해한 게 머쓱해져서 빠르게 사과를 뱉어냈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할 수 있죠.”

태연은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그 말은 제대로 지각을 했다는 뜻이었다.


“아, 저 출근해야해요.”

일어서려는 태연의 어깨를 도준이 가볍게 누르면서 다시 앉혔다.


“몸도 안 좋은데 어딜 가려고.”

“휴가도 못 냈어요.”

“내가 대신 내줬습니다.”

“도준 씨가요?”

“어차피 진태연 씨 휴가 결정권자는 나 아닌가.”

“그렇기는 한데…… 어? 본부장님은요?”

도준 역시 회사에 있어야만 하는 날이었다. 그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도 냈는데.”

“휴가를요?”

“네.”

“왜요?”

“병간호해야지. 내 아내.”

“…….”

내 아내라는 말에 태연의 심장이 잘게 떨리며 반응했다.

들어도 들어도 늘 좋은 말이었다.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어요.”

도준은 곁으로 다가와서 물과 함께 약을 한 알 더 내밀었다.


“열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이거 먹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김 박사님이 그러더군요.”

“감사해요.”

태연은 도준이 내미는 약을 받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보니 무언가 짧게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뭐지?’

도준이 제 입 안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고, 그리고 물을 먹여줬던 것 같은데.


‘꿈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제가 해열제를 먹고 잠들었나요?”

“네.”

“아, 그랬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먹여줬습니다.”

고저 없는 듣기 좋은 중저음에 태연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뭐라고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기미는 안 보이고.”

“…….”

“김 박사님은 약을 먹여야 한다고 난리고.”

도준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태연이 손에 들고 있는 물컵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내가 직접.”

“진짜로요?”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이 기억이 그럼 꿈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까.

태연의 표정을 보고 도준은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생각하는 그거, 맞을 텐데.”

“도준 씨가 진짜로…….”

키스하는 것처럼 물을 먹여줬냐고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태연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도준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 이동했다.

어제는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그랬다 치더라도 이렇게 밝은 아침에 태연의 붉은 입술을 보고 있자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크흠.”

도준은 목을 가다듬었고 태연 역시 이불을 목 끝까지 당겨 올리면서 애써 시선을 피했다.


“최 여사님이 죽 끓여뒀습니다.”

“네, 내려…… 갈게요.”

어젯밤 그렇게 가까웠던 부부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함의 극치를 달리는 두 사람이었다.

***

진 사장의 집에는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혜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투자를 진짜 하긴 한대요?”

“할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진 사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 말을 내뱉었다.


“차도준이 아주 푹 빠졌어.”

“어머, 우리 차신 유업 신사업에요?”

“무슨 소리야. 차신 유업 말고 진태연에게 빠졌다니까.”

“네?”

혜숙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당신, 술이 아직 안 깼어요?”

“그 집에 우리 태진이를 보낼 걸 그랬어.”

“미쳤어, 미쳤어! 어디 그런 놈을 우리 태진이한테 갖다 붙여요!”

혜숙은 듣기만 해도 불결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진 사장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애가 눈알이 돌았더라고.”

“누구, 차 서방이요?”

“어. 태연이한테 그냥 완전 제대로 빠졌던데.”

그 말에 혜숙 역시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당신, 이번에는 진짜 조심해.”

“알겠어요.”

“태연이 한 번 더 건드리면 차 서방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더라니까.”

진 사장은 어제 저를 협박하던 도준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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