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키스해도 됩니까.
(56/63)
56. 키스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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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키스해도 됩니까.
2023.05.15.
진 사장의 이마가 깊게 파여 있었다.
혜숙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도대체 언제 가까워진 거래요?”
“그러게 말이야.”
결혼하고 쭉 붙어 있던 것도 아니고, 떨어져 지낸 기간이 더 길었던 부부였다.
왜 이렇게 순식간에 도준이 태연에게 스며들었는지 그 때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튼 일 이야기를 할 때와 태연이 이야기를 할 때 눈빛 자체가 달랐어.”
“여보, 그런데 진짜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거예요?”
혜숙의 물음에 진 사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행여나 지난번처럼 찾아가서 깽판 놓을 생각 하기만 해봐.”
“아니, 당신도 잘 알 거 아니에요. 우리 태진이랑 다르게 태연이 그X이 얼마나 영악한지.”
“하아. 그러니까 말이야.”
“이대로 있다가 투자가 그냥 물 건너가면? 우리는 그냥 버림받는 거잖아요.”
태연이를 내버려 두라고 한 도준의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정말 손을 놓고 지켜보기에도 영 찜찜했다.
혜숙은 잠자코 생각을 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여보, 나한테 진짜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허튼 짓이면 시도도 하지 말라고 했어!”
“아, 나 좀 믿어봐요. 호호호.”
“뭐가 됐든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럼요. 이건 절대 들킬 일이 없어.”
혜숙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태진이 자니?”
2층으로 올라가는 혜숙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부엌에 앉은 태연과 도준은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의식하며 식사를 했다.
몸이 좋지 않은 태연을 위해 최 여사는 죽을 만들어놨고, 멀쩡한 도준도 같은 것을 먹겠다며 나섰다.
죽을 한 숟갈 뜨던 태연은 도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준 씨라도 맛있는 거 드시지 그래요?”
“충분히 맛있습니다. 진태연 씨랑 먹어서 그런가.”
“죽 드시면 배가 금방 꺼질 텐데.”
“지금 내 걱정해주는 겁니까.”
“그럼요.”
망설임 없이 내뱉은 태연의 말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도준은 연신 피식피식 웃었다.
“왜 그러세요?”
“그냥, 좋아서.”
좋다는 말에 태연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꽃이 피었다.
“켈록.”
식사를 이어가던 도준이 난데없이 기침했다.
태연은 수저를 내려놓고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태연은 유심히 도준을 관찰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랑 다르게 그의 인상이 창백했다.
이마에 식은땀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빙 둘러서 도준에게로 다가갔다.
도준의 고개가 태연을 보며 서서히 돌아갔다.
“왜 그럽니까.”
태연은 망설임 없이 도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 이마에도 손을 대고 체온을 비교해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도준 씨, 이마가 뜨거워요.”
도준은 난처하다는 듯 혀로 아랫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저한테 감기 옮으신 거 아니에요?”
어제 제게 약을 먹이기 위해 입맞춤을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도준에게 감기를 옮긴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도준은 제 이마 위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태연의 온기를 느끼다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녀린 태연의 손목을 탁- 잡아서 제 쪽으로 당겼다.
“어어?”
도준이 당기는 힘에 태연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몸이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태연의 허리에 도준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
바로 앞에 잘난 도준의 얼굴이 있었다.
짙은 검은색 눈동자와 베일 듯이 날카로운 콧대, 도톰하며 혈색이 도는 입술, 잡티 하나 없는 말끔한 피부.
신이 공을 들여 빚어놓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이목구비를 홀린 듯 쳐다보며 태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너무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태연은 위, 아래로 훑으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썼다.
자신은 지금 도준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고 제 허리는 도준이 팔로 감싸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쏟아지듯 도준의 품에 안긴 탓에 맞붙은 신체가 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 제가 일부러 이렇게 앉은 건 절대 아니거든요.”
태연은 횡설수설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럴수록 도준은 태연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줘 더더욱 강하게 당길 뿐이었다.
태연의 다갈색 눈동자에 천진난만하게 웃는 도준의 모습이 담겼다.
정말이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저렇게 치명적인 웃음을 짓는 건 반칙이다.
도준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그럼요. 당신이 일부러 앉은 건 아니죠. 내가 당긴 거니까.”
“네?”
“이렇게 있고 싶어서.”
태연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도준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태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손을 뻗어 도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진짜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걱정하고 있는 태연과 다르게 도준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안 되겠어요. 김 박사님을 부를게요.”
도준의 허벅지에서 내려가려고 했건만 이번에도 태연은 그럴 수 없었다.
“도준 씨?”
“잠시만 이렇게 있읍시다. 머리가 갑자기 아픈 것 같은데.”
태연을 있는 대로 걱정시켜 놓고 도준은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도준은 태연을 허벅지 위에 앉히고 아주 능숙하게 죽을 한 숟갈 떴다.
“약을 먹든 뭘 하든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렇죠.”
태연은 도준의 들고 있는 숟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죽을 다 먹으려고 하는 시도는 무척 칭찬할 만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무릎 위에 태연이 앉아 있어서 불편해 보였다.
‘밥을 먹으려면 내가 방해되지 않을까?’
도준을 배려해주기 위해 태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도준은 제 품에 안겨 있는 태연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 해요.”
“네?”
도준이 먹으려고 뜬 죽인 줄 알았건만. 숟가락은 태연의 입 앞에 와 있었다.
“도준 씨?”
뭐라 이야기를 하려고 벌린 태연의 붉은 입술 사이로 도준이 들고 있던 숟가락이 들어왔다.
“…….”
너무 놀란 태연은 동작을 그대로 멈췄다. 도준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씹어야지.”
“아, 네.”
고장 난 로봇처럼 가만히 있던 태연은 그제야 천천히 저작 운동을 시작했다.
죽이 무슨 맛인지 느낄 새가 없었다. 그보다 맞닿아 있는 도준의 신체가 자꾸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태연은 아직 한가득 남은 그릇을 보며 물었다.
“도준 씨, 생각해보니까 이걸 얼른 먹어야 약도 먹고 쉬지 않을까요?”
이제 그만 저를 내려달라는 의미였지만 도준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배고팠습니까? 말을 하지.”
그리고 빠르게 죽을 한 숟갈 떠서 후후 불더니 다시금 태연의 입안에 넣어 줬다.
“뜨겁진 않고?”
“네.”
태연은 홀린 듯 도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한 미소를 건 채로 도준은 그 뒤로도 계속 죽을 퍼다 나르기를 반복했다.
“저 혼자서 먹을 수 있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사람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으니.
잠자코 받아먹던 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걸 다 먹어야 저를 내려주실 건가요?”
“아뇨.”
“다 먹어도 안 내려주실 거라고요?”
“그럴 생각인데.”
태연의 눈이 더더욱 확연하게 커졌다.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있자는 건 아니겠지?’
절대 도준의 허벅지가 너무 딱딱해서 엉덩이가 아파 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제가 무겁지는 않을까 그게 제일 신경이 쓰였다.
태연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도준이 능글맞게 물었다.
“무거울까 봐 자꾸 도망가려고 하는 겁니까.”
“네.”
“그럴 리가 있나. 하루종일 이렇게 안고 있으라고 해도 가능할 정도로 가벼운데.”
“도준 씨는 거짓말을 참 잘하시네요.”
태연의 솔직한 말에 도준이 작게 웃었다.
“거짓말 같다는 겁니까, 지금?”
“그럼요. 어린아이도 이렇게 안고 있으면 힘든데 다 큰 성인을 데리고 있으니까 당연히 무거울 수 있죠.”
“정말 아닌데.”
그 사이 도준은 또 죽을 한 스푼 떠서 태연의 입안에 넣어 줬다.
이제 제법 능숙해진 주고받기였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겠습니다.”
“네?”
그 말은 정말로 오늘 온종일 이렇게 저를 안고 있겠다는 말이었다.
태연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도준 씨가 한 말, 거짓말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바닥 뒤집듯 내뱉은 말을 바꾼 태연이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그 행동에 도준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해도 늦었습니다.”
태연이 뭐라 말하려고 하면 도준은 죽을 떠먹이며 태연의 말을 막았다.
태연은 제 입 앞으로 다가온 숟가락을 한 손으로 슬며시 잡았다.
“도준 씨, 몸도 안 좋은데 이렇게 무리하면 안 돼요.”
“그런가.”
“네. 이상하게 아까보다 더 열이 오른 것 같아요.”
이마를 짚었을 때는 못 느꼈는데 도준의 품에 안겨 있으니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체온계로 온도를 재면 분명 고열이라고 뜰 게 분명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안 궁금하고?”
“그거야 저한테 감기를 옮았으니까 이렇게 열이 나는 거겠죠.”
“아닌데.”
도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태연의 허리를 잡아서 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이랑 붙어 있어서.”
“…….”
“그래서 자꾸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귓가에 와닿는 도준의 숨이 너무도 뜨거웠다.
열이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욕망이 섞여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태연은 너무도 가까워져 있는 도준의 얼굴을 애써 피하면서 허공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열을 내리기 위해서는 저를 놓아주셔야겠네요?”
“허.”
도준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작게 헛숨을 토해냈다.
“저랑 있어서 더 열이 나는 거라면 저를 최대한 멀리하는 게 답이 아닐까 싶은데요.”
도준은 이 상황에서도 참으로 이성적이게 조곤조곤 말을 내뱉는 태연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런 모습도 예뻐서 어쩌나.”
“네?”
“놓아주기 싫게.”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분명 제대로 들어 놓고도 그 안에 담긴 뜻을 파악하기까지 너무도 오래 걸렸다.
도준은 짙은 시선으로 태연을 내려보더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었다.
“키스해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