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다음날, 변경백군의 종군 마법사로 부임한 토드가 택한 첫 번째 직무는 성채 내 묘지 시찰이었다.
시신들을 매장하는 매립지는 성채의 하수로 옆에 있었다.
묘지 어귀에 이르자마자 토드는 대뜸 소금을 얻어맞았다.
어이구, 저 귀한 걸 이리 뿌리다니. 제법 따뜻한 환대였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구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물렀거라! 이 불경한 자야! 주의 빛을 거스르는 악도여! 네놈에겐 반드시 천상의 필벌이 내릴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 귀의하지 못한 영혼들의 비통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짭짤한데. 좋은 소금이야.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소금을 빨아먹은 토드가 빙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안돌리코 수사.”
늙은 수도사는 경기를 일으키며 파르르 떨었다. 사람이 주전자처럼 끓는 건 처음 본다. 귀에서 김이라도 나올 것만 같다.
“변경백 각하께선 제게 사망자들의 수습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부디 묘역의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썩 꺼져라! 삿된 마법사여! 네놈이 간교한 혓바닥을 놀려 변경백을 미혹했을지 몰라도, 노부는 주의 신실한 종이다!”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성채에 기거하며 객지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셨다고요. 존경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솔마르께서도 수사님의 헌신을 굽어보실 테죠.”
“감히! 그 더러운 입에 주의 이름을 올려?! 어찌 변경백은 이런 극악무도한 자를 들였단 말인가!”
주름진 얼굴을 구긴 수도사가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아아, 죄악이 깊다. 죄악이 깊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저러다 뒷목잡고 쓰러지겠군. 토드가 뒤에 대동한 병사들을 향해 턱짓하자, 그들이 친히 수도사를 부축했다.
“놔라! 이놈들! 악의 하수인을 자처하다니! 네놈들은 유황불이 두렵지도 않더냐! 이 성채에 심판이 도래할 것이다! 회개하라!”
노인네치고 목청이 괄괄하다만, 계속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건 망자들에게도 좋지 않다.
하다못해 자라나는 풀떼기도 좋은 말만 들려준다는데, 망자들에게 이렇게 저주를 퍼부어대면 바른 심성으로 살아나겠는가.
토드가 그에게 다가섰다.
“안돌리코 수사. 정녕 제가 그리 못 미더우시면, 구축의 제례를 올려보시지요. 당신처럼 신실한 신자라면 악을 쫓는 기도에 마땅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토드의 제안에 수도사가 병사들을 뿌리쳤다.
“오냐! 네놈이 내 신앙을 의심하는구나! 파멸을 자처하겠다니 거리낄 것도 없지.”
묵주를 쥔 수도사는 목에 걸린 광륜표(光輪表)를 만지작거렸다.
이곳의 교회는 십자가 대신에 햇무리를 표현한 광륜표를 종교의 표상으로 사용한다.
하늘에 산란하는 빛의 그림자는 지상에 두루 미치는 신의 권위를 나타낸다지.
수도사가 거창한 기도문을 읊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전지전능한 세기의 아버지, 여기 당신의 하인이 있나이다. 부디 바라옵건데, 10만 천상 군대의 영도자인···”
졸립다. 오늘따라 볕이 좋은 느낌이다.
“미구엘 천사장님의 권세를 빌어 여기 도사리는 악을 멸하소서. 저자의 악의와 악행이 종결되게끔 하소서. 부디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는 힘차게 토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수도사의 목에 걸린 광륜표가 은은한 빛을 흘렸다. 언뜻 따스한 기운이 노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대번에 기세등등해진 안돌리코가 외쳤다.
“보았느냐! 핫하! 이제 네가 비롯된 무저갱으로 돌아가라, 이 사악한···!”
하지만 수도사의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예.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토드는 그를 향해 유유히 미소지었다.
“···됐습니까?”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어느새 수도사를 내리쬐던 온기가 걷히고, 광륜표의 빛도 온데간데없었다.
당황한 수도사가 황급히 광륜표를 풀어헤쳐, 토드 앞에 내밀었다.
“당신께선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세 어린 성인을 보호하셨나이다!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주인이시여, 육과 영을 보호하는 천사들을 보내시어···”
의심이 많으시군. 그래, 3번까진 기다려주마.
토드의 웃는 낯이 한결같았지만, 수도사의 경악 어린 얼굴은 점점 절망에 물들었다.
수도사는 쉴 새 없이 그가 아는 모든 기도문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신벌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사령술사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어, 어째서··· 이미 이곳의 죄악이 깊은 까닭인가?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신께서 진정 여길 벌하실 생각이신가.”
허물어진 수도사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사령술사였다. 그는 차마 뿌리칠 힘도 없었는지, 어깨가 붙들린 채로 일어섰다.
사령술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안돌리코 수사. 신께선 모든 걸 안배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땅에 악을 방치해둘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아침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따라 유독 천둥처럼 크게 느껴지는 종소리가 마치 자신을 꾸짖는 듯하여 수도사가 벌벌 떨었다.
“그분께선 악인마저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장차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요. 어쩌면 더 큰 악인인 이리공을 징벌하기 위해 저를 이용하실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네가, 감히 신의 대리자를 자청한단 말이냐?”
수도사를 놓아준 토드가 문득 하늘을 힐끔댔다.
구름 사이로 무심한 햇살이 희미하게 내리쬔다.
“어찌 피조물이 감히 천상의 저의를 짐작할까요. 뜻하신 대로 이루어지겠죠.”
사령술사는 존재만으로 신성모독이다.
그가 어젯밤 벌인 권능도 신성모독이요, 입에서 튀어나온 모든 발언이 신성모독이다!
그런데 어떠한 위해도 그에게 가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소용없었다.
늙은 수도사가 평생토록 간직해온 관념이 요동쳤다.
‘사실 사제 직업군이 너무 사기라 하향된 거지만.’
이 게임에선 신성력이 언데드 상대로 무용하다.
정확히는 45 레벨 이후부터 배우는 「장엄구마」가 있어야 기도나 축도문 따위가 언데드 상대로 유효해진다.
발매 첫 주차부터 사제 직업군을 골라 언데드만 때려잡으면서 연이어 만렙을 찍은 사례들이 속출했던 까닭이다.
당초 제작사가 이 게임에 대해 방대한 스케일을 강조했던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가파른 레벨 업 속도였다.
게다가 자힐과 버프기도 빵빵한 사제 특성 상, 필연적으로 지출을 강요하는 회복 물약도 살 필요가 없어서, 아껴둔 재화로 장비 세팅까지 빠르게 맞출 수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레딧에서 논란이 크게 불거져 부랴부랴 핫 픽스가 적용되었는데, 오죽하면 언데드가 힐을 받을 시 체력이 회복되도록 정신 나간 하향을 먹였다.
거의 관짝에 처박힌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는데, 해당 변경 사항이 이곳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 또한 몇 안 되는 토드의 인생 업적 중 하나였다.
모두가 똥캐라 단언했던 성전사를 골라, 고렙 언데드들만 족치는 식의 공략 루트를 처음으로 개척한 게 다름 아닌 그였으니.
‘정작 너무 사기다 보니까, 흥미가 빨리 식어서 만렙이랑 업적만 후딱 찍고 바로 유기했지만.’
어쨌거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세상의 비밀스러운 내막 중 하나였다.
그걸 이 세상의 존재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된 건진 모르겠지만.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린 토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이만 묘지의 문을 열어주시지요.”
“죽은 자들을 살려, 네놈 멋대로 우롱할 작정 아니더냐?”
“저는 병사들을 변경백 각하를 위해 다시 싸우게끔 만들 겁니다. 맹세컨대 망자들을 모욕하거나 그들의 의지를 억압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수도사가 힘겹게 반문했다.
“어찌, 순리를 뒤트는 행위 자체가 망자에 대한 모독이 아니란 말인가···!”
“허허, 구주 앞에서 제 결백함이 증명된 거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이리공의 행각을 수사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떠한 포로도 살려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성채 내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걸 수도사도 모르진 않았던지, 동공이 흔들렸다.
“저는 정녕 수사께서 이리공이 이 성채를 짓밟도록 방조하고, 안에 있는 자들을 모두 사지로 내몰 위인이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수도사는 토드의 종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갈등 끝에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하수구가 근처에 있어 습기가 상당할 텐데, 어느 비석도 이끼가 없었다.
여태 토드가 본 묘지 특유의 음침한 기운은 없고, 정원 같은 느낌이었다. 새삼 수도사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발생한 전사자들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하에 화로와 납골당이 있다.”
수도사의 인도하에 토드는 지하에 마련된 납골당으로 향했다.
그나마 부유한 자들은 지상에 묘비를 세우고 객사한 자들은 이곳에 안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서늘한 지하에 있어 부패를 유예하고는 있지만, 원체 변경백의 사정이 열악한지라 시신들을 덮어줄 아마포나 천 쪼가리도 부족했다.
헝겊으로 코를 막아도 이곳에 진동하는 시취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뒤따라온 병사들이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견디기 어려우면 이만 물러나게. 여긴 수사님과 나만으로 충분하니.”
사양하지 않고 병사들이 앞다투어 뛰쳐나가자 수도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토드는 찬찬히 안치소를 한 바퀴 둘러봤다.
대강 살펴보니 외상으로 즉사한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후유증으로 죽은 이들이었다. 성채의 사정이 조금만 나았더라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성채까지 들어왔으나 마땅한 처치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이다.
“안타깝군요. 성채에 비치된 약초가 없습니까?”
수도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부상자들에게 쓸 것도 턱없이 부족하다.”
고개를 끄덕인 토드가 되묻는다.
“이 가엾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는 했는지요.”
“이미 새벽에 저들을 위해 기도했다. 마침 저들을 매장하려던 참에 네놈이 들이닥쳤고.”
“다행입니다. 지금부터 사자소생을 행할 건데, 혹여 보기에 불편하시다면 잠시···”
“난 네놈이 하는 짓을 똑똑히 지켜보겠다. 혹여 주께서 즉각 철퇴를 내리실지도 모를 일이니, 내 어찌 그 광경을 피하리오!”
그렇다면야.
미소지은 토드가 부싯돌을 부딪쳤다.
차악!
발갛게 타오른 불씨가 향로에 옮겨붙는다. 통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었음에도 불꽃이 세차게 흔들리는 거로 보아, 이곳에 예사롭지 않은 원념이 짙게 깔려있다.
황록색 불꽃이 춤을 추듯 일렁인다.
요사스러운 광경에 수도사가 주춤댔다.
“불꽃을 너무 응시하진 마세요. 간혹 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토드의 경고에 위축되었던 수도사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점차 석굴에 향연이 번지고, 벽에 향로를 걸어놓은 토드는 방울을 거머쥐었다.
스러진 자들의 눈물에 호소하라.
“내가 그대들을 부르노라. 성난 전사자들이여. 비통한 혼령들이여. 영광스러운 엘리시움의 입구에서 허락받지 못한 이들이여.”
스스스스―···!
어디선가 들려오는 뱀이 쉭쉭대는 듯한 소리. 뼈에 사무치는 한기가 등골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몸을 움츠린 안돌리코가 거칠게 헐떡였다.
“그대들을 죽인 원수, 이리공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어찌 원통하지 아니한가! 내가 그대들로 하여금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아지랑이가 바닥에 누운 이들의 눈, 코, 귀로 빨려 들어간다.
“비단 나의 사욕 때문이 아니다. 나의 이름을 걸고, 그대들의 한을 완수한 뒤, 안식을 취하도록 돕겠다. 순리를 거스르는 죄의 허물은 내가 질 터이니, 그대들은 다시 일어나 나와 함께 적들의 파멸을 향해 행군하겠는가?”
차갑게 굳어있던 이들의 몸이 꿈틀거렸다.
“동의하는 자들은 사령술사 토드가 건네는 손을 잡고, 지상으로 회귀하라.”
딸랑.
망자가 일어선다.
안치소에 누워있던 시신 전원.
그들의 눈에서 녹색 광채가 흐릿하게 번뜩였다.
죽은 자들의 눈에 하나같이 투지가 가득하다.
【우릴 죽인 이리공,】
【그자와 다시- 싸울 수 있다면.】
망자의 음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기꺼이 당신을 섬기겠소.】
“바라는 대로.”
접수 완료.
토드가 마력을 거둬들이자, 저들은 다시 잠들었다.
망자들의 품질이 썩 훌륭하다.
이리공에게 복수하겠다는 강렬한 일념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라.
게다가 생전에 병사였으니, 최소한의 전투력도 보장된 셈.
이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닌, ‘해골 병사’로 만들어야겠다.
“장례 절차를 거쳐야겠습니다. 혹시 남은 소금이나 식초, 밀랍 따위가 있는지요.”
“그런 게 나한테 남아있겠나?”
“···보통 그런 물자는 수도회에서 지원을 해주는 게 일반적인 관행일 텐데요.”
수도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뿌린 소금이 전부였어? 토드는 조금 황당한 심정이었다.
이런 변방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건가.
하기야, 규모가 작은 수도회면 사정이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지.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
입맛을 다시던 토드는 문득 덩달아 구금되었던 일행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성안에 장사치들이 아직 남아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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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변경백의 종군 마법사가 되었다고? 출세했구만! 흑마법사 양반. 난 또 우리 따위는 까먹은 줄 알았지. 꼼짝없이 감옥에서 늙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빨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워낙 하룻밤 사이에 다사다난했던지라.”
“아녀! 암, 바쁠 수도 있지. 원래 높은 양반들이랑 굴러먹는 작자들은 일 없어도 허벌나게 바쁜 척을 해야··· 엌!”
옆구리를 후린 피에트가 손목을 매만졌다.
“보아하니 우리한테 시킬 일이 있는 모양이로군?”
“예. 성안에 있는 장사꾼들로부터 소금, 식초, 밀랍, 꿀, 아마포, 갈대를 모아주세요. 저희가 마차에 싣고 온 물자들은 그대로 있으니, 그걸로 흥정하면 될 겁니다.”
팔짱을 낀 쇠렌이 되물었다.
“그럼, 우리한테 뭐··· 떨어질 만한 게 있나?”
토드는 말없이 품에서 변경백이 작성한 양피지를 건넸다.
내용을 살핀 피에트가 탄식했다.
“제국 금화 100닢 차용증이라. 변경백의 직인도 찍혀있고.”
콧김을 흘린 쇠렌이 팔뚝을 걷어붙였다.
“반나절 내로 가져오지. 그냥 싹싹 긁어오면 되는 건가?”
어떤 수완을 발휘했는지 몰라도, 흥정을 빠르게 마친 쇠렌과 피에트는 토드가 요구한 물건들을 가득 싣고 금세 묘지로 돌아왔다.
전경을 훑은 쇠렌이 중얼거렸다.
“뭔, 이게 묘지라고? 괜히 아닌 척 꽃밭으로 꾸며놓은 것 같아서 기분 나쁜데.”
그러자 안돌리코 수사가 눈을 부라렸다.
“말조심해라. 고얀 놈! 여긴 망자들이 안식을 취하는 곳이니!”
“저 영감태기는 또 뭐여. 어째 가는 곳마다 괴팍한 작자들만 꼬이는 것 같소? 흑마법사 양반.”
웃어넘긴 토드는 그들의 조력하에 물품들을 납골당으로 옮겼다.
배낭에서 정과 단검 따위의 수술 도구를 꺼내자, 안돌리코 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망자들의 육신을 정제하는 작업을 거칠 겁니다. 부패하는 살점은 거추장스럽고, 거동에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죽은 자들의 몸을 푸줏간 고기처럼 도축하겠다는 건가?”
“위생 문제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도 몸에 파리나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걸 바라시진 않겠죠. 일종의 염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숫돌에 간 칼날이 시퍼렇게 번뜩인다. 토드는 능숙하게 뼈에서 살을 발라냈다.
해체한 살점은 아마포에 감싸 단지에 담고, 매번 향로를 흔들어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
그 과정이 잔혹하거나, 사악하거나, 이질적인 느낌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광경이라 더 혼란스럽다. 저들은 언제나 죽음과 공존해왔고, 매장이나 장례는 일상적인 삶의 단면이었으니.
핏자국이 얼룩진 옷 조각을 정성 들여 떼어주는 모습은 숭고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수사님. 이쪽 팔을 닦아주시겠습니까?”
“······.”
아마포를 받아든 수도사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협조한다.
지켜보던 쇠렌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묘지기인 줄 알았더니만, 수도자였어? 흑마법사랑 교회 사람이 같이 일하는 건 또 처음 보네. 더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건 피에트도 동감이었는지, 떠벌대는 쇠렌을 제지하지 않았다.
“쇠렌 씨. 떠들 시간에 항아리들 좀 밖에 묻어주세요.”
기름과 밀랍을 섞어 냄새는 덜했지만, 그래도 꺼림칙한 느낌을 떨치긴 어려웠다.
“젠장, 내가 안 해본 일이 없다지만, 화장터에서 일꾼 노릇을 해본 적은 없다고!”
쇠렌은 투덜대면서도 피에트와 더불어 부산물이 담긴 단지들을 날랐다.
토드야 이런 일에 워낙 이골이 났고, 안돌리코 역시 조수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다.
수도사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군말 없이 따랐다. 덕분에 한나절 만에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해 질 무렵에 이르러, 마침 크뤼거도 묘지에 도착했다. 토드가 마력을 일으키자 뼈만 남은 병사들이 발맞춰 올라왔다.
도열한 해골 병사들을 바라보던 크뤼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30명분의 장구다. 이건 차용증에서 따로 차감하지 않고, 각하께서 특별히 내어주시겠다는군.”
“아량에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자들이 달그락거리며 장비가 담긴 상자를 뒤적인다.
망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조끼를 걸치고, 신중하게 무기를 집어 들었다.
골조밖에 남지 않은 몸이라 다소 헐렁했지만, 끈을 매어 착실하게 덧댄다.
무장을 완료한 해골 병사들은 얼핏 겉으로 보기에 중무장한 보병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으스스한 기운이 흘러 위화감이 느껴졌고, 투구 밑으로 번뜩이는 안광을 감출 수 없었다.
모두가 꺼림칙한 표정이었으나, 토드 혼자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켈레톤!!
스켈레톤이다!
그나마 ‘걸어 다니는 시체’는 위장이라도 할 수 있지, 해골 병사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언데드의 전형이라, 정작 스킬을 배워놓고 여태 한 번도 운용해본 적 없는 하수인이었다.
크으, 역시 네크로맨서하면 스켈레톤은 국밥처럼 든든한 가성비 하수인 느낌이지. 그야말로 근본 중의 근본인데, 드디어 써본다.
문득 주변의 시선을 느낀 토드가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자, 이제 땅 파러 갑시다. 기왕이면 에스터리츠 양도 불러주시고요.”
“땅을 파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쌍심지를 치켜뜨는 수도사를 향해 토드가 태연히 답했다.
“이리공이 여기로 오고 있지 않습니까.”
녹색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다.
“제아무리 야전의 달인이라 한들, 발밑에서 망자가 솟구치는 걸 예상할 수 있을까요?”
원래 바이오닉 상대론 스탑 럴커가 제격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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