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부디 제 가슴을 봐줘요
(8/125)
8화. 부디 제 가슴을 봐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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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부디 제 가슴을 봐줘요
2022.04.25.
게브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여자였네. 아니면 고집이 황소고집인가?”
주방장이 술병을 들고 오자, 게브가 기분 나쁜 얼굴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됐고, 내가 말하는 거로 가져와. 폭탄주나 함 만들어주게. 친목질을 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안 그래?”

“게브, 적당히 해. 숙녀분을 죽일 생각이야?”

“죽이다니, 누가? 저 여자 말마따나 순찰대에 들어온 걸 미리 축하해주려는 건데.”
게브가 삐딱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샤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가져와 주세요.”
게브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자신 있나 봐? 보기와는 다르게 술이 센 모양이지?”
아샤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게브가 입꼬리를 비틀더니, 술을 이것저것 한 그릇에 말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조직원들이 ‘아, 저거 센데…….’ 하고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게브가 술을 넓은 나무 잔에 각각 따르고 한 잔을 건넸다.

“이거 먹고 버티면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줄게. 눈밭에서 맥없이 기절했던 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아샤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동시에 술잔을 들이켰다.
순간 목구멍이 타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깜짝 놀랐지만, 아샤는 겉으로는 표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이 술은 황궁에서 마셔봤던 그 어떤 술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독했다.
코와 목을 사정없이 톡 쏘는 맛에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았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최대한 편안한 얼굴로 술을 원샷했다.
이래 봬도 술을 좋아하는 황제 카라프 때문에 강제로 술을 마셨던 적이 많았던 그녀였다.
이 정도는 정말로 그가 말하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조직원들은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감탄했다.
저 폭탄주는 술을 즐기는 남자들도 마시면 정신 줄이 끊어지곤 하는 독한 술이었다.
게브가 술잔 너머로 아샤를 힐끔 보며 말했다.

“제법인데, 아가씨.”
어느새 호칭이 ‘공주님’에서 ‘아가씨’로 바뀌었다.
그도 여유로운 척하지만, 얼굴이 벌게진 게 조금은 타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자칼이 소사와 함께 아지트로 돌아왔다.
조직원들은 그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자기들이 다 어쩔 줄 모르며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그들은 소란의 중심에 있는 아샤와 게브를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칼이 뚜벅뚜벅 탁자로 걸어와 술이 담긴 그릇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확 풍겨 나오는 독한 냄새만으로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게브, 설마 이 여자에게 폭탄주를 먹인 거냐?”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에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게브는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대장. 이 여자가 자꾸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라서 혼 좀 내주려고 했…….”

“……기어올라?”
자칼이 순간 멱살을 잡아드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소사와 조직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그를 말렸다.
자칼이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매섭게 말했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게브는 벌게진 얼굴로 표정을 싸하게 굳히고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왜 갑자기 발끈하고 그러십니까? 작은 험담도 용납 못 할 만큼 저 여자가 신경 쓰이십니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정이라도 드셨나 봅니다?”

“……입조심해라. 마지막 경고다.”
분위기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하지만 게브는 물러서지 않고 소리쳤다.

“대장이 정말로 조직을 생각한다면, 저 여자를 반려로 들이시든가 내쫓으시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십시오……!”
그 말에 자칼은 순간 몸이 굳으며 손에 살짝 힘이 풀렸다.
소사가 얼른 그들을 떼어놓고 중간에 서서 그에게 말했다.

“대장, 아무래도 다들 오늘따라 기분이 과하게 들뜬 것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정신일 때 얘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자칼은 뒤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을 보며 마지못해 싸움을 관뒀다.
그가 아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취했으니, 이만 돌아가지.”

“좋아요.”
아샤는 살짝 취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를 따라 나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 게브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조직원들은 입을 벌렸다.
아샤는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가 아까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두고 보세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고, 훨씬 쓸 만한 여자니까!”
아샤가 등을 홱, 돌리고 자칼보다 먼저 아지트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녀가 화난 모습은 처음 봐서, 조직원들은 살짝 멍한 얼굴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칼은 게브와 소사를 내버려 두고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샤는 몸이 휘청거리며 눈밭에 쓰러졌다.
그녀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 자칼은 타이밍 좋게 한 팔을 뻗어 그 몸을 붙들었다.
그가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물었다.

“제정신이야? 그 술이 뭔 줄 알고 마셔.”
아샤는 술에 취해 콧등이 빨개져서 대답했다.

“……축하주였어요.”

“축하주? 그걸 믿어?”

“게브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그렇다고 믿을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울적했다.
자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나간 사이에, 그놈이 뭐라고 시비를 걸진 않았나?”
아샤 역시 잠시 말이 없어졌다가, 곧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뇨. 별일 없었어요.”

“…….”
자칼은 그녀가 게브를 감싸주려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아꼈다.
아마 저 하나 때문에 조직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걸 그녀도 원치 않을 것이었다.
아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었지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했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몸에 폭탄주까지 들이켰으니 멀쩡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보다 못한 자칼이 대뜸 그녀의 몸을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가슴팍에 폭 안기게 된 아샤는 민망함에 눈이 커져서 말했다.

“내, 내려줘요. 전 멀쩡해요!”

“멀쩡하긴 뭘 멀쩡해. 집에 가자마자 발 닦고 잠이나 자.”
아샤도 이제는 말이 없어졌다.
자칼은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걸었지만, 속으로는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 속은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부터 모든 조직원들에게 환영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당연한 일이니까 실망할 것도 없어.”

“네, 알아요…….”
냉정한 말처럼 들려도 아샤는 그가 자신을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칼은 오두막에 도착해서야 아샤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아샤는 그의 몸에서 내리자마자 어쩐지 크게 각오한 얼굴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뭘 하려는 건가 시큰둥하게 따라 들어가던 그는 이내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아샤가 문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입고 있던 겉옷을 훌러덩 벗었다.
자칼이 뒤를 홱 돌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설마, 아까 내게 보여준다는 게, 이거였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당혹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마음도 모르고 민소매 속옷만 입은 아샤는 진지하게 말했다.

“네. 부디 절 봐주세요.”
그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저를 유혹하는 여자는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통의 여자들은 처음 그를 보면 알 수 없는 기에 눌려 겁에 질리고,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야생마의 기운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배척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아샤는 처음 봤을 때부터 저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쳐다봤었다.
그리고 그녀가 첫눈에 반했다고 당돌하게 고백하는 순간, 그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피하지 않는 유일한 여자일 거라고 느꼈다.
말로 변신하는 남자 따위, 누가 좋아하겠냐며 지금껏 여자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였지만, 아샤는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벽을 허물고 찾아온 여인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갑자기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가슴과 조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하는 머리가 격렬하게 스파크를 튀기며 싸우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칼은 이내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한 번 쓸더니, 겨우 이성을 되찾고 중얼거렸다.

“……나를 유혹하려는 거라면 그만둬. 미인계는 내게 안 통하니까.”

“미인계요……?”
아샤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다부진 뒷모습이 어쩐지 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풋.”
아샤의 웃음소리에 그가 움찔했다.

“……지금 이게, 웃을 상황인가?”

“뭔가 크게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제가 보여줄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뭐지. 대뜸 옷을 벗고 보여줄 만한 게.”

“전 그냥 저를 조직에 받아주시면 이득이 될 걸 보여드리려는 거예요.”

“……이득? 이득이라고?”
그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게 몸이라면 나한테는 통하지…….”

“하아…….”
도저히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아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의외로 이성 앞에서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 신선한 느낌도 들었다.
아까는 제 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더니, 경고를 하려고 일부러 연기를 한 모양이었다.
자신은 위험한 남자이며, 이곳은 여자가 지낼 곳이 못 되는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는 그런 과격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실상은 어쩌면 여자를 대하는 것을 무엇보다 어려워하는 남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샤는 살짝 장난기 어린 얼굴로 그의 뒤로 걸어가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부디 제 가슴을 봐줘요.”
‘가슴’이라는 말에 그가 눈에 띄게 몸을 흠칫했다.

“……대체 얼마나 부주의하면,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외간 남자에게……!”
살짝 화가 난 듯 뒤를 홱 돌아본 그는 눈이 커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아샤의 심장 부근에 문신처럼 새겨진 문양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금색의 ‘나비 문양’이었다.
눈이 커진 채 다시 뒤돌아 얼어 있는 그를 보며 아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아시겠죠. 저는…… 제국의 나비예요.”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제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아샤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