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이지? (30/125)


30화.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이지?
2022.07.11.


새벽에 난데없는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자고 있던 하인들은 모두 헐레벌떡 일어나 휴게실로 집합했다.


“폐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뒤돌아 서 있던 카라프가 잠옷을 입은 채 뒤를 스윽, 돌아보았다.

그의 위압적인 눈빛에 하인들이 모두 움찔해, 곧장 고개를 숙였다.

카라프가 그들을 둘러보다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샤를 찾아왔다. 지금 어디 있느냐.”

하인들은 황제인 그가 이 밤중에 직접 일개 하인을 찾아온 것에 놀랐지만,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살피는 것을 보며 그가 무섭게 말했다.


“지금 당장 그녀의 방으로 안내하라.”

아샤가 지내는 숙소에 도착하자, 카라프는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이 방에 없기에 하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카라프는 잔뜩 어질러져 있는 방의 모습에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봐도 이 방은 그녀가 어지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집무실과 침실을 정리 정돈한 것만 보아도, 그녀의 깔끔하고 섬세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내어준 방을 그녀가 이렇게 더럽힐 리도 없었다. 명백한 괴롭힘의 흔적이었다.

뒤에서 듀란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 야심한 시각에 대체 어딜 가신 것이지…….”

“도, 도망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하인이 그 말에 냉큼 대답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불안을 잠재워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의 화를 더욱 돋웠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카라프가 무겁게 소리쳤다.


“하인장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의 엄한 외침에 곧 한 여자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아까 아샤에게 욕탕 청소를 시킨 여자였다.

그녀도 방금 잠에서 깼는지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카라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아샤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것이…… 아직 야외 목욕탕에 있는 모양입니다.”

“야외 목욕탕?”

뜬금없는 장소에 카라프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묻자,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카라프는 그녀를 더는 쳐다보지 않고 곧장 야외 목욕탕으로 터벅터벅 향했다.

하인들은 죽을상이 되어 그의 뒤를 따랐다.

목욕탕에 도착한 그들은 곧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저 멀리, 이 늦은 시각까지 홀로 남아 목욕탕 청소를 하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얇은 팔로 바닥을 쓱쓱, 문지르는 모습이 어딘가 처량하고 가련해 보였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금발은 선명하게 빛이 났다.

하인장이 그런 일을 시켰다는 것을 몰랐던 소냐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입을 가렸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낮은 목소리에 아샤는 고개를 들어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앞에는 카라프가 무서운 얼굴로 서 있고, 그 뒤로 하인들이 눈도 못 들고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상황을 눈치챈 아샤가 잠시 말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


“목욕탕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나도 보면 안다! 내 말은, 왜 이 밤중에 너 혼자 청소를 하고 있냐는 말이다.”

아샤는 그가 지금 크게 분노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왜 화가 난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여자는 자기만 괴롭힐 수 있다는 그런 심리인가.

아샤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그게 바로 제가 할 일 아닙니까?”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대답에 카라프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하인들이 한 짓임을 알았지만, 그녀의 말로 자신이 그 일을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아샤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선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제게 뭔가 또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분명 할 말이 있었는데 막상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나니, 그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급하신 일입니까?”

“……아니.”

아샤는 지친 기색을 감추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거의 다 끝났습니다.”

그녀는 바닥을 솔로 더욱 빠르게 박박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카라프는 물에 젖은 아샤의 허름한 옷을 발견했다.

힐끔 시선을 내리니 하얗던 손이 다 부르트고, 추위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봄이 왔다고 해도 아직 쌀쌀한 날씨에 장시간 밖에서 일을 하다 보니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분명 그녀가 초라한 행색을 하고 고통을 겪는 건 그가 바랐던 모습이었다.

그러면 금세 꼬리를 내리고 제게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격하니, 어째서인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마치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를 짓궂은 장난으로 허무하게 망가뜨려 버린 것 같은, 자신의 소유였던 무언가가 반쯤 잘라져나간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분명 그가 원하거나 예상했던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모습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카라프는 성큼성큼 걸어가 아샤의 손을 홱 낚아채 들었다.


 
아샤가 놀라서 쳐다봤지만, 그는 그녀의 손에 잡힌 수많은 굳은살과 물집을 눈으로 조용히 훑었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너에게 짐의 시중을 들라 했지, 욕탕 청소를 혼자 하라고 시킨 적 없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이지?”

카라프는 말을 끝내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눈으로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붉은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그들은 움찔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게 혹여 죽임이라도 당할까 봐, 모두들 손을 앞으로 모으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아무리 소수민족을 경멸한다지만,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엄연히 근무 태만이었다.

카라프는 자신 덕에 호화로운 궁에서 생활하면서 태만하게 구는 자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고,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그들 중 가장 결정적인 잘못을 한 하인장은 가련할 정도로 몸을 떨며 눈가에 눈물까지 보였다.

표독스럽고 앙칼졌던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듀란은 이 새벽에 황궁에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인들에게는 오늘은 제가 혼자 청소할 테니, 다들 먼저 들어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뭐?”

카라프는 눈이 살짝 커져서 아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아샤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폐하를 만족시켜 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만족시켜드리려고 했습니다. 제가 청소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카라프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선의의 거짓말이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바넷사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듀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카라프는 안 보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네가 그랬지.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 네 꼴을 보아라. 이게 네가 말하는 너의 가치더냐?”

“…….”

“사람의 가치는 그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아샤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라프는 멈칫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유감입니다. 폐하의 눈에는 지금의 제가 가치 없는 여인으로 보이시는지요.”

그 질문에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넷사는 고귀한 존재였다.

이 제국에서 자신을 개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여인이었다.

허름한 하인 복을 입고 있더라도 그녀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저에겐 언제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제 힘으로 하인들의 일을 덜어줄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카라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저주에 걸린 후로 단 하루도 소수민족을 원망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카라프는 이내 사나운 눈초리를 풀고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앞으로 짐이 시키지 않은 일은 할 필요 없다. 아니, 하지 말아라.”

아샤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카라프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오늘 짐이 만족할 만큼 청소를 잘했으니, 상을 내리겠다.”

그가 말을 끝내며 그대로 하인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듀란은 아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하인들은 급하게 다가와 청소를 도우려고 했지만, 아샤는 그들을 막았다.


“제가 마무리를 하고 돌아갈 테니, 먼저들 돌아가 쉬세요.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아샤는 여전히 그들에게 원망 섞인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묵묵히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듬직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미안한 눈길을 보내며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두들 한밤중 사달에 잠이 확 달아나, 좀처럼 다시 잠들기가 어려웠다.

무려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태평히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개를 침대 밖으로 슬그머니 내밀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얼른 2층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둥글게 모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들은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다.

카라프가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푼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저주를 받은 후로 모든 일에 쉽게 싫증을 냈고, 한 번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을 실망시킨 자에겐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변화시키다니…….

아까 전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증오나 혐오가 아닌,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하인들은 그 점에 대해 호들갑을 떨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폐하께서 그 여자가 정말로 마음에 드시나 봐!”

소냐는 이때다 싶어, 아샤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과장을 섞어 열심히 늘어놓았다.

하인들은 모두 눈썹을 흐트러뜨리며 자신들이 너무 심했다고 자책했다.


“소수민족이라고 다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우리가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해서 어째…….”

그들은 밤새 아샤와 카라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하인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무수한 소문들이 탄생했으나, 아샤의 평판은 산처럼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 * *

늦은 새벽, 일을 마치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온 아샤는 침대에 눕자마자 숨소리도 내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햇빛이 얼굴을 비추자, 아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스르르 눈을 떴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퍼질러 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샤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채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식탁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녀는 멈칫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