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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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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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2022.12.26.
백작의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새까매졌다.
시한 블라썸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문득 옆에 서 있는 아샤와 눈이 마주쳤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작게 씩 웃어 보였다.
이미 카라프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프리지아 백작은 목까지 붉어진 채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라프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개처럼 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아주 태연하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이상하네. 내가 아는 누리끼리한 털을 가진 개는 이러지 않았는데.”
프리지아 백작은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이더니, 이내 모깃소리만 한 작은 목소리로 아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넷사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옵고…….”
“다시.”
카라프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가 이제는 무섭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과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짐이 이 향수병을 면전에 대고 집어 던져야 말을 알아들을까?”
그 말에 백작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창피함에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바넷사님.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카라프는 본때를 보여주려는 듯 여전히 개처럼 기어보라는 명령을 철수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샤는 여기서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얼른 말했다.
“사과를 받아줄게요, 프리지아 백작. 그 대신 앞으로는 서로 얼굴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아샤는 눈을 힐끗 내리며 카라프의 평소 오만한 표정을 따라 하고는, 슬쩍 그의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팔 옷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폐하, 이미 충분히 사과를 받았으니, 폐하께서도 이만 프리지아 백작을 용서해주세요.”
“이런, 자비로운 바넷사. 마음이 이리도 태평양 같으니, 짐승들로 넘쳐나는 이 황궁에서 어떻게 버티겠나. 가히 신이 내린 성녀라 할 수 있지 않겠나, 경들?”
카라프가 대답을 종용하듯 주변을 쓱 쳐다보자, 귀족들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폐하.”
“바넷사님의 자비로운 마음씨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샤는 빨리 이 웃지 못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부추겼다.
“우리는 이만 가요.”
“그래. 바넷사는 저딴 싸구려 향기 말고, 짐의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만 맡는 게 몸과 정신에도 좋아.”
아샤는 어쩐지 야릇하게 들리는 그 말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하지만 귀족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것을 느끼며 애써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그와 함께 태연하게 또각또각 걸어갔다.
카라프는 더 이상 향수병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보란 듯이 빈 병을 바닥에 휙, 버리고는 걸어갔다.
의도치 않게 아샤와 팔짱을 끼고 복도를 걷게 된 그는 표정이 매우 흡족했다.
떠나는 두 사람 뒤로 프리지아 백작은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귀족들은 부채로 웃음을 가리며 자리를 떴다.
아마 그가 당한 수모는 살롱에서 한동안 떠들썩한 먹잇감이 될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아샤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문을 닫자마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따졌다.
“폐하! 일부러 저 난처해지라고 그런 행동을 하신 건가요?”
카라프가 그 말에 정말로 놀랐다는 듯 눈이 커져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지? 짐은 오늘 최선을 다해 귀족들 앞에서 바넷사를 추켜세워 줬거늘.”
아샤는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귀족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저를 그렇게 곤란하게 만드시면 어떡해요……!”
카라프는 더욱 놀랐다는 얼굴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곤란했나? 안 그래도 바넷사가 곤란해 보여서 짐이 아주 강렬한 방식으로 경고를 줬는데. 원래 귀족들이란 머리가 나빠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법이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아샤는 입을 달싹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프는 소냐가 내온 쿠키를 발견하고 여유롭게 하나를 집어 와삭, 씹었다.
“역시 식사도 같이하는 상대가 좋아야 입맛도 좋군.”
“오찬이 별로셨습니까?”
“좋을 리가 있나.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었나? 웬만해선 누구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는 편이라고. 오늘은 정말로 잘라버리고 싶은 손가락들이 많은 날이었어.”
“…….”
카라프는 쿠키 하나를 집어 얼어붙은 아샤에게 넘겼다.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쿠키를 받아 와삭, 베어 먹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들 바넷사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더군. 누가 보면 자기들이 바넷사의 연인인 줄 알겠어.”
아샤는 쿠키를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 입을 가리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카라프는 짓궂은 표정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바넷사를 무시하는 놈이 있으면 내가 다 족쳐버릴 것이다.”
아샤가 놀라서 물었다.
“지금 그 말…… 진심은 아니시지요?”
“무척 진심이야. 상상만 해도 몸이 근질근질하는군.”
그는 무슨 간질에 걸린 것처럼 손을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무서운 말에 아샤는 기겁하며 외쳤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그래도 된다. 그리고 바넷사도 이제는 조금 악녀가 될 필요가 있어.”
“악녀요?”
아샤는 정말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라프는 무척 진지하게 말했다.
“성녀처럼 사는 것은 아주 피곤한 짓이야. 폭군의 곁에서는 악녀로 사는 것이 살기 편해. 못하겠다면 내가 이제부터 악녀가 되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도록 하지. 바넷사도 배워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설마,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악녀라는 것이 아까처럼 향수를 머리 위로 붓는 그런 걸 뜻하는 겁니까?”
“잘 아는구나. 그 정도는 해줘야 버러지들이 기어오르지 않는 법이다.”
“버러지들…….”
아샤가 멍하게 중얼거리자,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감히 제국의 꽃과 나비를 무시하는 놈이 버러지이지 뭐겠어.”
아샤는 또다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도저히 그의 논리는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카라프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후를 보고 있자니, 늘 나를 혼내기만 했던 어머니가 떠오르는군. 난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늘 잘못했다고 벌을 주셨었지.”
어쩐지 짠한 이야기에 아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까 지하 창고에서 봤던 그의 어머니의 초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그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카라프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아샤를 돌아보며 슬쩍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나비의 관심이 아주 고픈 관심병자니까.”
아샤도 이제는 그와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뒤에 아샤는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폐하,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저번처럼 말도 없이 내통을 하면 노하실 것 같아서, 미리 허락을 받으려고 해요. 수도원에 있다는 또 다른 꽃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요.”
카라프의 눈이 커졌다.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샤는 그가 충격을 받지 않게 얼른 덧붙였다.
“제 생각엔 그자가 폐하의 몸에 걸린 저주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죽이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할 테니, 제가 한번 먼저 알아보고 올게요.”
태연한 척 말을 꺼냈지만, 아샤는 그가 소수민족 첩자를 죽였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속으로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카라프는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방 안에 감도는 적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샤도 초조해졌다.
이내 그가 입을 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황후 혼자서 말이냐.”
“네. 폐하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폐하께서 동행하시면 그 남자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본인이 꽃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 카라프는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솔직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착잡한 것을 보며 아샤도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자신이 만날 남자는 어쩌면 그 대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던 남자였다.
그 사실이 그의 불안감과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나는 황후를 믿지만…… 만약 그 자식이 흑심을 품고 황후에게 접근하면…… 그래서 강제로 자신을 개화시키게 만들면 그때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지만, 아샤는 그 뒤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피하는 그의 모습이, 문득 혼을 내는 어머니 앞에서 위축된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분명 저보다 키가 훨씬 크고 체격도 좋은데, 왜인지 불쌍하고 가녀린 한 떨기 꽃처럼 보였다.
아샤는 초승달 문양이 새겨져 있는 그의 가슴 부근에 손을 가볍게 갖다 댔다.
카라프가 살짝 놀라서 쳐다보자, 아샤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개화 방법에 대해서는 오직 폐하의 몸을 가지고 실험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 말에 카라프가 그제야 픽,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짐의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아샤는 얼굴이 확 붉어져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 이미 아시겠지만 생각하시는 그 방법은 아니에요.”
“……알아. 많이 실패했었으니까.”
갑자기 꽃이 시드는 것처럼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아샤는 민망함에 그를 외면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폐하의 몸에서 나는 장미 향은 꽤나 독해서, 제 정신이랑 몸 건강에 좋을지도 잘 모르겠군요.”
그 말에 카라프는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샤가 새침하게 눈을 감고 말했다.
“그러니 기다리세요. 제가 개화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
“……알았다. 방해하지 않으마.”
카라프는 잔뜩 풀이 죽어서 방을 터덜터덜, 나갔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아샤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그가 앞으로 못된 마음을 먹거나, 강제로 스킨십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그 시각, 자칼은 촌장과 탁자에 마주 보고 앉아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촌장은 이내 깊은 한숨을 쉬더니, 손깍지를 끼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얀 백발에 그의 새까만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먼저 자네의 목적을 말하게. 내게 그 정보를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정말로 리카온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조금 과한 요청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 텐데. 그리고 나 역시 아직 자네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자네가 이 정보를 얻고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자칼은 잠시 입을 다물고 속으로 대답을 정리했다.
하지만 촌장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돌직구로 물어왔다.
“그것은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함인가?”
“나비를 되찾아오기 위함입니다.”
촌장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되찾아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