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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이참에 다 없애버릴까…… (93/125)


93화. 이참에 다 없애버릴까……
2023.02.17.


아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신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비로서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답을 주셨어요.”

다아트가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렇군요……. 저에게는 신께서 말씀하시길…… 개화하지 않은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은 불안정하여 마물이 발생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특히 폐하께서 검은 장미라서 그 강도가 더 큰 것이라 하셨구요.”

그 말에 아샤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꽃의 제국 에츠하임은 예로부터 황제가 제대로 통치하지 않으면 꽃이 썩어들어가듯 점차 쇠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전대 황제 리카르도 역시 제대로 통치를 하지 않아 제국에 유례없는 혹한기가 찾아왔었고, 검은 장미가 태어난 이유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마치 카라프의 개화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처럼 제국에는 자꾸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카라프는 홀로 집무실에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수많은 양피지 묶음들이 쌓여 있었다.

모두 다 제국 곳곳에서 마물들이 발생했다는 보고였다.

카라프는 임시방편으로 급하게 황궁의 기사들을 파견해 마물들을 토벌하라고 지시했지만, 어느덧 손을 쓸 수 없이 번져서 이제는 최정예 부대인 칵투스 기사단마저 나서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했다.

제국이 큰 불안에 휩싸였다.

카라프에 대한 불신 또한 제국민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커지고 있었다.

저주받은 검은 장미가 개화식을 치러 제국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카라프는 신경질적으로 양피지들을 구겨버리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폐하, 바넷사님이 오셨습니다.”

아샤가 왔다는 소식에 그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들라 하라.”

아샤는 고민에 잠긴 얼굴로 양피지 더미에 파묻혀 있는 그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카라프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이 환해졌다.

아샤가 그에게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제가 문서 작업을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카라프는 갑자기 당황하며 허둥지둥 책상에서 양피지들을 치우려고 했다.

그 순간, 아샤는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 뭉치 하나를 슬쩍 집어서 펼쳐 보았다.

카라프의 얼굴이 살짝 망연자실해졌다.

아샤는 그가 왜 이 문서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국에 온갖 마물들이 발생하고 있고, 카라프의 평판도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녀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카라프는 부끄러움에 얼굴도 들지 못하고 바닥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의 붉은 눈 위로 내려앉은 속눈썹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폐하.”

“괜찮다. 이건 황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폐하.”

아샤는 재차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신경 쓸 일이 아닌 건 폐하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둘 다 현재 떠도는 소문들이 모두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아샤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카라프는 그것이 정말로 헛소문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마물이 갑자기 이렇게 한 번에 많이 발생했던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아니, 과거에는 이 일이 빨리 오지 않아서 몰랐을 뿐, 어쩌면 모두 예고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저주받은 존재니까…….

카라프가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 서류를 검토하던 아샤가 진지한 얼굴로 대뜸 선언했다.


“폐하, 저도 마물 토벌에 참가하겠어요.”

“……뭐?”

카라프가 마치 잠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놀라 물었다.

아샤가 그의 붉은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황후이자 바넷사로서 마물들을 토벌하면 황실의 명예도 오르고, 백성들도 황실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과 신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제국에 일어난 모든 불상사는 꽃과 나비가 함께 책임지는 것이 맞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안 된다. 황후가 위험해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만약 황후에게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제국의 평화를 위한다면 그런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거라.”

아샤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서류를 살피던 중, 아샤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폐하. 이제 곧 ‘꽃꽂이의 달’을 맞이해 황궁에서도 본격적으로 행사를 여는 것으로 압니다.”

“아. 그랬지…….”

카라프는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저 멀리 던져둔 서류를 아샤가 넘겨주자,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황궁에서는 뭔 놈의 행사가 이렇게 많은 건지, 그는 행사 서류를 대충 훑어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제국에는 빌어먹을 행사가 참 많아. 이참에 다 없애버릴까…….”

“폐하!”

그 말에 문가에 서 있던 시종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카라프는 지금 진심이었다.

황궁의 행사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보여주기식 행사가 많았다.

특히 전대 황제가 사치스럽고 유희에 관심이 많아, 틈만 나면 황궁에서 귀족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탓에 별의별 행사들이 잔뜩 늘어난 상태였다.

이참에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싹 다 없애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아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꽃꽂이 행사 때 제가 황실을 도와줄 귀족들을 한번 모아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라프는 그 말에 행사를 없애버리자는 생각을 언제 했냐는 듯 머릿속에서 홀라당 날려버리고, 다시 서류를 열심히 살폈다.

꽃꽂이 행사는 꽃들이 모여 홍수나 가뭄, 산사태 등 온갖 자연재해로부터 제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의식이었다.

사실 평민인 나비의 권위를 가장 크게 보여줄 수 있는 행사라 나쁘지 않았다.

‘개화식’이 황제를 돋보여주는 가장 큰 행사라면, ‘꽃꽂이 행사’는 단어 그대로 나비가 황궁의 귀족 중 원하는 자를 제 곁으로 끌어모으는 독자적인 권한을 가졌다.

나비가 주로 평민들에게서 나오는 이유도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길 바라는 신의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비록 전생의 꽃꽂이 행사 때 아샤는 귀족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누구도 곁에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개화식 때 사건으로 꽃의 축제도 흐지부지되었다고 들었어요. 마물 발생으로 민심이 좋지 않은 이때 수도원에서 ‘연등 축제’를 같이 여는 게 어때요?”

“연등 축제?”

“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제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샤의 똑 부러지는 의견에 카라프도 조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국민들은 축제라면 뭐든지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좋아했다.

이런 우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에는 스트레스를 배출할 해소구와 희망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샤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꽃은 가지치기를 잘해야 더 잘 자랄 수 있다고 하죠. 시든 꽃잎은 되도록 빨리 잘라줘야 보기도 좋고, 다른 꽃줄기에도 옮겨가지 않아요.”

아샤는 니아 델피니움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떠올렸다.

이참에 나비로서 카라프의 주변 세력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필요한 세력은 끌어당기고 배척할 세력은 가지치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예전의 소심했던 그녀라면 결코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아샤는 늘 고독했던 카라프의 주변을 좋은 사람들로 채워주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로 정글 같은 황궁에서 꽃꽂이를 할 때였다.

카라프는 조금 아련한 눈빛으로 아샤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늘 혼자서 골머리를 썩이며 처리했지만, 바넷사가 옆에 있으니 정말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진작 그녀에게 상담을 할걸, 후회가 되었다.

아샤는 방으로 돌아와 자신이 행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점검했다.


‘먼저 수도원에서 신께 춤을 바치는 의식이 있네.’

춤이라면 자신 있으니,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전생에도 이날을 위해 발이 까지도록 밤새 연습을 해서 그런지 몸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번에 카라프의 마음을 춤으로 사로잡았듯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도록 귀족들이 깜짝 놀랄 춤을 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샤의 신체 사이즈를 줄줄이 꿰고 있는 엘라는 곧장 드레스 제작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또 어떤 드레스를 보여줄지 하인들은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의상실에 모여들었다.

아샤는 조금 떨떠름하게 얼굴이 잔뜩 상기된 얼굴의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째 자신이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그들은 광신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샤가 엘라에게 물었다.


“춤은 해가 질 때 시작된다고 하죠?”

“네, 바넷사님.”

아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웃으며 엘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넷사님은 정말로 천재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십니다!”

“뭔데요! 저희한테도 알려주세요!”

엘라의 격한 반응에 소냐를 비롯한 하인들이 잔뜩 달라붙었다.

아샤가 비밀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맡겨만 주십시오.”

엘라가 매우 비장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 * *

자칼은 늦은 저녁까지 계곡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물에 잠수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제는 폭포를 맞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그였다.

웃통을 벗은 채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세찬 물줄기가 떨어졌다.

찬물을 맞은 그의 몸이 긴장한 듯 근육이 팽팽해지고, 구릿빛 피부는 물을 머금어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상처럼 보였다.


 
소사는 그가 명상을 하는 동안 자리를 피해줄 겸, 잠시 정보를 얻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 물과 하나가 되었을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디 있어?]

그것은 마치 소년의 미성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자칼은 미간을 좁히며 소사에게 텔레파시를 하듯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지?]

하지만 목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웅얼거리더니,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자칼은 눈을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목소리는 물의 정령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찾고 있는 걸까.

자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곡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있는 거냐…….”

소사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정령을 찾으러 가지 않으면 왠지 영영 그를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기다려. 내가 깨워줄 테니.”

자칼은 스스로 몸을 쇠사슬로 묶은 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물속으로 점프했다.

그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텔레파시를 보냈다.


[네 모습을 보여.]

그 시각, 아샤의 방에서는 아주 작은 진동이 일었다.

그녀가 황궁에 처음 왔을 때 가져왔던 소지품 상자 안에서 단검이 홀로 진동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검에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던 말의 사파이어 눈에서 돌연 심상치 않은 푸른빛이 ‘번뜩’ 했다.

그와 동시에 계곡에 있던 자칼은 숨이 턱, 막혀와 물속에서 거세게 발버둥 쳤다.

한편, 마을에 내려갔다 돌아온 소사는 계곡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자,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대장! 어디 계십니까!”

코를 킁킁, 거리며 뛰어다니던 그는 마침내 물속에 가라앉아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는 자칼을 발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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