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긴장하셨습니까?
(9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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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긴장하셨습니까?
2023.03.06.
아샤는 음악에 맞추어 맨발로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아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사실 황궁에서 예법 교육을 받을 때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수업이 바로 ‘춤’이었다.
춤을 출 때만큼은 갑갑한 황궁 생활에서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살아 숨 쉬게 만들어 주었다.
아샤는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턴을 했다.
발이 떨어지자마자 옆으로 물 흐르듯이 이동하는 것이, 얼핏 보면 거의 바닥에 발을 내리지 않는 것 같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점점 격정적으로 변하는 멜로디에 맞춰 과감하게 턴을 하고 점프를 하자, 카라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다리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젖히며 균형을 잡을 때마다 치마 안쪽의 투명한 시스루 천이 나비의 날개처럼 흔들렸다.
살짝 땀이 맺힌 얼굴과 목선, 얇은 팔에서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 등이 모두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카라프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주변 귀족들도 눈이 커졌다.
아샤는 자신이 가진 바람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손에서 금가루 같은 금빛 바람이 흘러나오더니, 드레스 주변을 화려하게 감쌌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금빛으로 밝혀주는 반딧불을 보는 것 같았다.
귀족들과 신전 사람들은 그 광경을 황홀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음악이 막바지로 향하는 그때였다.
붉은 드레스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아샤가 걸어 나왔다.
벗은 드레스가 허공에 그대로 떠 있어서 그녀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다.
바람의 힘을 사용해 드레스를 허공에 고정시킨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레스를 벗고 나온 아샤는 황금색의 드레스를 새롭게 입고 있었다.
꽃의 연회 때에는 꽃이 개화하듯 초록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화한 드레스였지만, 이번에는 꽃에서 진정한 나비로 부화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겉에 붙어 있는 반짝이들이 노을빛을 반사해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층층이 노을처럼 드레스에서 빛이 났다.
움직일 때마다 변화하는 빛들이 마치 그녀의 드레스에 노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드레스에 저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니.
르네 공작부인은 충격에 눈과 입이 벌어진 채 부채를 손에서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영적 체험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나비의 춤’을 바라보았다.
나비는 하늘이 내린 성스러운 존재.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에 사제들은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며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특히 다아트는 몹시 충격을 받았는지 입까지 벌리며 떨리는 눈으로 그녀의 춤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또다시 그 정체불명의 꽃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풍겨 나왔다.
그는 격한 감동을 미처 감추지 못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고 기도식을 함께 마무리했다.
엘라는 이번에도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둥 뒤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귀족 부인들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바넷사의 시녀로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드레스를 만들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시작된 춤은 끝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남은 노을의 잔상만이 아샤의 드레스에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카라프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다.
정작 박수를 쳐야 할 때 그가 얼어붙어 있자, 아샤는 살짝 민망해져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카라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그녀는 눈이 커지고 말았다.
그는 무척이나 황홀하고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엄해야 할 황제가 짓는 표정이라기엔 조금 과했지만 아름다운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다니, 반칙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한 사람처럼 얼굴이 상기된 채, 마치 무언가에 도취된 것처럼 붉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카라프가 경의의 표시로 들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무대 위로 던지자,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박수 소리와 함성,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족 여인들 역시 이번에는 압도적인 그녀의 모습에 시기나 질투를 느끼지도 못하고, 들고 있던 꽃을 무대 위로 던졌다.
소냐는 옆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다른 하인들과 열심히 무대를 향해 꽃을 뿌려대는 중이었다.
덕분에 아샤의 모습은 더더욱 꽃밭에 서 있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보였다.
* * *
한 차례 의식을 끝내고 그들은 이제 황궁으로 돌아와 무도회를 즐겼다.
아샤는 춤을 춘 복장 그대로 무도회에 참석했다.
무도회장에는 이번에는 평민들이 아닌 귀족들로만 가득 찼다.
그런데 문득 아샤의 눈에 기둥 옆에서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바이올렛 남작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가 아샤를 발견하고는 눈이 커져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바넷사님.”
그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제게 매일 꽃을 바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샤는 그 말에 살짝 놀라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카라프가 그 일을 지시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카라프는 아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바이올렛 남작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의 부름에 남작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알현실에 도착했다.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그에게 카라프가 담담하게 말했다.
‘바이올렛 가문에서는 해마다 아름다운 제비꽃이 난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바넷사님께 꽃 선물을 바치려고 했었습니다.’
그 말에 카라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참 고마운 말이군.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였네.’
그 말에 바이올렛 남작이 살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그대의 저택에서 키우는 가장 싱싱한 제비꽃을 매일 황후궁으로 보내게. 황후가 보라색 꽃을 아주 좋아하거든. 그대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내리겠네. 그대가 느끼기에도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남작은 크게 감격해서 소리쳤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가장 싱싱한 꽃을 조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남작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나갈 때는 잔뜩 들뜬 얼굴로 나갔다.
그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카라프는 죄책감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과거의 제 잘못을 조금은 청산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아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린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일을 이제야 알게 된 아샤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작님 덕분에 매일 아침 햇살이 비친 싱싱한 꽃을 볼 수 있어서 눈이 즐거워요.”
그 말에 남작은 정말로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어느덧 주변에는 다른 귀족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들을 주목했다.
꽃꽂이 행사는 사실상 바넷사의 선택을 받는 것이었기에, 모두가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저번에 티파티장에서 아샤에게 몹쓸 언행을 했던 여인들은 죄책감에 다가오지도 못했지만, 방관자였던 여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말을 걸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몇몇 귀족 여인들이 두꺼운 역사책을 선물하는 것을 보며 아샤는 고맙다고 우아하게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았다.
니아가 작전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도 책을 선물하는 작자들이 많아서 의자 옆에는 두꺼운 책들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아샤 앞에서는 웃으면서도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바넷사를 욕하더니,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하냐는 추궁의 눈빛들이었다.
선물을 받으며 호감을 사고, 곁에 둘 귀족들을 고르고, 자기들끼리 경계를 하게 만드니 일석삼조의 계략이었다.
니아는 아샤의 명을 수행하면서도 이 기현상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많이 놀라고 감탄했다.
정말로 사교계에 오래 발을 담고 있던 자신조차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귀족들을 손 위에서 굴리고 있는 아샤였다.
쉴 새 없이 인사를 받아주던 아샤는 이제 안면에 마비가 와 미소 짓는 것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카라프가 피곤할 거라고 걱정하더니, 정말로 평소보다 몇 배는 피곤한 사교활동이었다.
특히 예전에는 이렇게 호감이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욱 더 그랬다.
그런데 그때,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카라프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 무도회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고 싶은데.”
카라프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그의 낯간지러운 말에 주변의 귀족 여인들이 또다시 북적거리며 자기들끼리 난리를 쳤다.
아샤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폐하.”
바이올렛 남작은 카라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샤와 카라프가 무도회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서자, 그 주변으로 귀족들도 조금 떨어진 곳에 파트너와 마주 보고 섰다.
이윽고 음악이 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춤을 췄다.
무표정해 보이지만, 그가 지금 굉장히 긴장하고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폐하, 긴장하셨습니까?”
“아니.”
“지금 굉장히 춤을 정석적으로 딱딱하게 추고 계시는데요.”
“…….”
카라프는 귓불이 벌게졌지만, 그래도 꿋꿋이 자신이 리드하겠다는 것처럼 움직였고, 아샤도 그에 따라주었다.
칭찬을 좋아하는 그에게 능청스럽게 칭찬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폐하는 춤도 참 잘 추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짐이 이 세상에 못하는 건 없다.”
아샤는 대놓고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한 차례 춤이 끝나고, 파트너들은 서로를 향해 정중하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춤을 추었더니 땀이 조금 나서 아샤는 바람을 쐬기 위해 샴페인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때, 누군가가 커튼을 걷고 다가왔다.
“바넷사님.”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살랑이는 분홍색 머리를 보며 아샤가 입을 열었다.
“블라썸 공작님.”
니아가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그 남자였다.
시한이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넷사님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감히 뒤를 쫓았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제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샤는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물었지만, 속으로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는 처음 자신을 봤을 때부터 아주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대놓고 호감을 보였지만, 아샤는 귀족들을 믿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시한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가시를 곤두세우고 계시니, 꼭 폐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샤는 속으로 뜨끔, 했다.
시한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곁을 보좌하고 싶어서 바넷사님께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저를 곁에 두시면 아마 큰 힘이 될 겁니다.”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대놓고 목적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아샤는 조금 놀랐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저는 폐하와 바넷사님과 한배를 탄 사람이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시한은 테라스의 장막 너머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귀족들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또 테라스 아래에 숨어 있는 첩자들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다시 아샤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저는 폐하와 마찬가지로 바넷사님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샤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