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야생마의 체력을 얕보면 큰일 나
(119/125)
119화. 야생마의 체력을 얕보면 큰일 나
(119/125)
119화. 야생마의 체력을 얕보면 큰일 나
2023.05.19.
뒤늦게 아샤가 알현실로 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자칼도 주전자를 들고 따라왔다가, 문가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아트는 정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다.
일단은 카라프가 잠들어 있기에 그를 살려두고 감옥에 가둬두었지만, 아마 그는 살아나오기 힘들 것이었다.
황위를 노리고 제국을 위험에 빠트린 자이니, 최소한 광장에 목이 걸리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분은 카라프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샤는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일단 진정하시게 차를 한 잔 드셔보세요.”
아샤가 문가를 쳐다보자, 자칼이 얼른 다시 우린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차를 한 입 마셔본 아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맛있네요.”
자칼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사제도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고 차를 한 입 마시긴 했지만, 초췌한 얼굴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아샤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옆에서 말을 걸어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대사제는 힘없이 돌아갔지만, 그가 돌아가고 나서도 아샤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넷사님. 그자의 처분은 바넷사님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아샤는 놀라서 문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서 있던 듀란이 진지하게 말했다.
“바넷사님은 제국의 나비. 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바넷사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결정에 폐하가 반대할 수도 있는데…….”
“폐하께서는 바넷사님의 결정이라면 무엇이든 존중해주실 겁니다.”
듀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의 말을 뱉었다.
아샤는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무언가를 각오하고 말했다.
“그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요.”
아샤는 듀란과 함께 예전에 자칼이 갇혀 있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통로의 끝에는 이번엔 다아트가 갇혀 있었다.
그는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팔다리에 수갑이 묶인 채 힘없이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머리칼이 이리저리 헝클어졌지만, 어둠 속에서 그의 은발은 빛을 잃지 않고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샤는 굳이 기척을 죽이지 않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리자, 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아샤는 잠시 쇠창살 앞에 서서 그의 회색 눈을 마주 보았다.
본모습을 전부 드러낸 그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적의와 반항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다아트 크리샌드멈.”
아샤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의 본명을 부르자, 다아트는 입가에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를 죽이러 오셨습니까, 바넷사님.”
“아니요.”
“그럼 제 하찮은 꼴을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제국의 반역자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희열이라도 느끼고 싶으셨는지요.”
일부러 삐딱하게 묻는 그에게 아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제국의 하나뿐인 국화꽃이 잘 있는지 보러 왔어요.”
그 말에 다아트의 반항적인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를 살려두셨습니까.”
“오래전, 에츠하임 신께서 제게 그러셨어요. 모든 꽃을 차별 없이 보듬어주고 아껴달라고. 그게 바로 제가 받은 신탁이었어요.”
다아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샤는 예전에 신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끔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꽃들이 있지. 예를 들어, 누구도 피어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대리석 틈 사이에서 홀로 고고히 피어난 꽃이라든가.]
그녀는 그 꽃이 바로 다아트라고 생각했다.
아샤가 은은하게 말했다.
“전 신의 뜻에 따를 거예요. 다아트 사제님.”
아샤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에츠하임 신의 꽃밭으로 이동했다.
다아트는 처음 와보는 공간에 눈이 커졌지만, 곧 무언가를 발견하고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앞에 놓인 대리석 판 위에는 그를 닮은 하얀 국화가 갈라진 틈 사이에 피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국화는 응애와 깍지벌레 등 온갖 진딧물로 뒤덮인 채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다아트는 그 꽃이 자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이 꽃밭에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국화이자, 피어나면 안 될 곳에서 피어난 꽃…….
그는 손을 뻗어 제 손으로 자신의 꽃을 꺾어버리려고 했다.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도록…….
그런데 그때, 뒤에서 아샤의 손이 나타나 그 꽃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놀랍게도 하얀 국화는 순식간에 다시 생생해지고 예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다아트는 떨리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샤가 그를 잔잔히 보며 말했다.
“아까 대사제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다아트의 얼굴이 곧장 어두워지고 서글퍼졌다.
“당신이 죄를 저질렀어도 그분께서는 여전히 당신을 아들로 생각하고 계셨어요. 제게 아들을 구원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대신 사죄하셨어요.”
“…….”
다아트는 대답이 없었으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에 핏줄이 가득했다.
“당신에게도 지키고 싶은 집과 가족이 있지 않나요? 당신을 위해 손을 내미는 소중한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릴 건가요?”
그 말에 다아트는 그가 자란 수도원과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대사제의 온화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샤가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에게는 그것들을 모두 포기할 만큼 권력이 더 소중한가요?”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에 아샤는 조금 표정을 풀며 말했다.
“평생 사죄하며 수도원에서 제국을 위해 봉사해 주시길 바라요. 그것이 제가 당신을 살려준 이유이자, 당신에게 내리는 판결이에요. ‘크리샌드멈’이라는 성은 제국에서 부활하게 될 거예요. 당신의 아버지에게 죄가 있다면, 나비를 사랑한 죄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결코 죄가 아니고요.”
아샤는 할 말을 끝내고 이만 돌아가 보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째서.”
아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저를…….”
다아트는 정말로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어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말끝을 흐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아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었듯이, 당신에게도 두 번째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두 번째 기회를 받고 달라졌으니까요. 당신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게 무슨 소리……?”
다아트가 커진 눈으로 쳐다보자, 아샤가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제가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제 진짜 능력은 ‘예언’이 아니라 ‘회귀’예요. 저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어요.”
다아트는 입을 벙긋거릴 뿐,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은 빛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죠. 저는 어둠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광합성도 중요하지만, 쉴 시간도 필요한 법이거든요.”
아샤는 말을 끝내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카라프의 꽃이 피어 있는 절벽 위였다.
그곳에서 꽃봉오리였던 검은 장미는 어느덧 거대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아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웃음을 참았다.
검은 장미 위에는 저번처럼 소년이 아닌, 다 큰 카라프가 편하게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꽃을 활짝 피우느라 온 힘을 다 소진해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작은 요정처럼 귀여워 보였다.
아샤는 그를 가까이서 보고 갈까 하다가, 그냥 푹 자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두 사람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정말로 할 말을 모두 끝낸 아샤는 어두운 통로를 다시 또각또각 걸어갔다.
다아트는 얼른 쇠창살로 다가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샤의 금발이 어둠 속에서 빛나며 마치 그녀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다아트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런데 문득 다아트는 쇠창살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하얀빛이 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멍하게 손을 들어 상처가 난 팔에 갖다 대자, 놀랍게도 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그가 가진 진짜 ‘꽃의 힘’이었다.
다아트는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의 능력이라고 믿고 있었던 ‘마물을 조종하는 능력’은 사실 그의 진짜 힘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욕망이 만들어낸 가짜 힘이자, 꽃의 피를 원하는 마물에게서 빌려 썼던 힘에 불과했다.
어두운 감옥 안을 은은하게 비추는 은백의 빛을 바라보며 이내 다아트는 결심했다.
그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을 떠돌이처럼 떠돌며 안 보이는 곳에서 자신의 힘을 좋은 일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순례를 떠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줘봤자 그동안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나비가 자신을 용서하고 제게 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하고 싶었다.
그를 키워준 아버지에게 더 이상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부끄러운 아들로 남고 싶지 않았다.
진흙 위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는 로터스로서, 그리고 국화로서 자신만의 꽃을 피울 것이었다.
* * *
아샤는 수도원의 복원, 그리고 마물로 피해를 본 마을과 관련해 여러 안건을 처리했다.
밤낮으로 자칼과 함께 업무를 본 탓에 이제 급한 일은 거의 마무리된 것 같았다.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샤에게 자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아직 할 일이 더 남은 거야?”
“아,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아샤는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은 후, 살포시 옆에 올려두었다.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양팔을 뻗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는데, 갑자기 자칼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칼 씨?”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자칼은 그녀의 뭉친 어깨와 목, 팔뚝을 커다란 손으로 안마했다.
조직원들을 직접 치료해줬던 그는 이런 일에도 빠삭했다.
아샤는 너무 시원해서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손이 뜨거운 편이라, 정말로 온열 마사지를 받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괜찮아요. 자칼 씨도 많이 피곤하잖아요.”
아샤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자칼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얼굴에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난 나흘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어.”
아샤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응. 야생마의 체력을 얕보면 큰일 나.”
어쩐지 그의 말이 야릇하게 들렸다.
아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얼굴을 가까이 맞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은 눈꺼풀을 내려 서로의 입술을 힐끗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