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12화 (12/282)

12. 별 헤는 밤 (2)

오웨인은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다.

지금은 붉은 달 아카샤가 석양을 머금고 더욱 새빨갛게 물드는 시간.

허나 아름다운 노을과 붉은 진주처럼 빛나는 달도 오웨인의 눈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고향 생각이라도 하십니까?”

알트가 그의 옆을 지나가며 넌지시 물었다.

그제야 오웨인은 하늘을 자세히 살폈다.

공교롭게도 그가 바라보던 방향은 제국이 있을 북쪽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죽은 황제 폐하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러셨군요.”

“난 황제 폐하께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어. 그분이 내 눈앞에서 눈을 감으시던 그 순간까지도.”

황제를 떠올리는 오웨인의 표정엔 정말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리움과 슬픔, 후회, 그리고 원망과 분노 등.

그리고 평생 그래왔듯이 그 감정을 다시 삼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게 제국의 법도이니까요.”

“하지만 이곳 연합에서는 별것 아닌 일이지. 그건 조금 부럽기도 하더군.”

“물론 여기서도 밖에서 아이를 데려오면, 아내에게 맞아 죽을 각오는 해야 할 겁니다.”

알트의 농담 섞인 대답에 오웨인은 피식 웃었다.

이 땅에서는 그가 평생 안고 산 고민거리가, 정말 별것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줬다.

태어나면서부터 오웨인, 사생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죄인으로서는 처음 받아보는 평범한 대우.

“쓸데없는 얘기를 해버렸군. 세린과 도라는?”

“목욕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씻으러 갔습니다. 물론 도라는 끌려간 거고요.”

“저런 안됐군. 캐트시는 목욕을 싫어한다고 들었네만.”

“원래라면 아주 지랄 발광을 하지요.”

알트는 세린에게 질질 끌려가며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던 도라를 회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자네는 어디 외출하던 길이었나?”

“네. 약속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긴. 자네라면 여기저기 지인이 많을 테니 당연하겠군.”

“그런 김에 혹시 세린이 물어보거든 말씀 잘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말없이 사라졌다고 뭐라 할 것 같거든요.”

“알겠네.”

엄살 섞인 알트의 말에 오웨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을 빠져나온 알트는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지만, 오히려 지금이 본격적인 장사 시간인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업종이 바로 주점.

알트가 향하던 주점의 간판에는 구부러진 도끼날이란 이름과 맥주잔 그림이 새겨져있었다.

다만 가게 옆에 잔뜩 쌓인 맥주 통 덕분에 간판이 없어도 주점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서 오게 알트! 자네가 엠브라에 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오랜만에 흑맥주 한잔할 텐가?”

“아니. 이번에는 와인으로 할게. 실은 이따가 올 일행이 다크 엘프라서.”

“하여간 엘프들은 보리의 은혜를 도통 알아먹질 못한다니까.”

알트는 툴툴거리는 주점 주인을 보고 웃으며,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받아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주점 문을 바라보며 만나기로 한 상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길 십 분 정도쯤 지나자.

색채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양, 온통 무채색인 다크 엘프 여인이 주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이 살짝 도는 짙은 회색 피부에 검은 머리.

검은색의 로브는 가슴 쪽이 과감하게 파인데다, 양옆이 트여있어 그대로 드러나는 맨다리.

그런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다녔다.

“오랜만이야, 광부의 아들 알트.”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아라네아. 어서 앉아.”

알트는 맞은편 자리를 권했지만, 아라네아는 그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그녀가 트여있는 치마 한쪽을 슬쩍 들어 올려 긴 다리를 꼬아 앉자,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흑단 같은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겨 기다란 목과 함께 어깨선을 슬쩍 드러내자, 또 한 번 탄성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미래를 조금 엿볼 줄 아는 나도 이런 식으로 약속을 잡지는 않아.”

아라네아는 세상 모든 권태감을 끌어안은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딜 봐도 그녀의 행동은 유혹하려는 모양새였지만. 알트에겐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는 상대와의 대화에 주도권을 얻기 위한 그녀의 얄팍한 수작에 지나지 않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내가 계획을 칼같이 짜는 데엔 자신 있거든. 보다시피, 이렇게 문제없이 정확하게 만났잖아?”

“그래. 시간과 계획은 중요하지. 그거라면 100년 전에 확실히 배웠어. 그렇다고 날짜와 시간, 장소만 달랑 적어 보내는 건 좀 아니지만.”

알트가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닐 테지만, 아라네아는 찬란했던 옛 과거가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략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아까부터 전혀 엉뚱한 남정네들 눈만 호강시켜주고 있었으니까.

“요즘 글레스카에서의 일은 어때? 벌이는 좀 되고?”

“평소랑 똑같아. 언제쯤 한방 크게 터트릴지 점쳐달라는 한심한 노름꾼들 상대하며 푼돈이나 버는 일상이야.”

“그럼 당신이 직접 도박판에 뛰어들면 되는 거 아냐? 카드 뒤집는 일이란 건 비슷하잖아.”

“그야, 카드를 뒤집기 전에 뭐가 나올지 모르는 것마저 비슷하니까.”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말투.

그녀가 알트의 밑도 끝도 없는 부름에 응한 것은, 100년이나 변함없는 일상에 대한 염증 때문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보다 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 지금쯤 발랴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점술가잖아? 한번 맞춰봐.”

알트의 짓궂은 대답에, 아라네아는 그녀의 얼굴을 알트의 코앞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을 그 상태로 있더니, 이내 다시 거리를 벌렸다.

“음. 전혀. 여전히 똑같아. 당신에게선 아무것도 안 보여.”

아라네아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와인병을 열어 술잔을 채웠다.

“애초에 뭔가를 봤다면 여길 오지도 않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거지.”

과거 스무살도 되지 않은 애송이 알트가, 아라네아에게서 호의를 얻어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대륙의 운명조차 읽어내고 틀어버렸다는 운명의 점술가 앞에 나타난 미지의 생물. 무료하던 삶에 끼어든 변수.

아라네아는 다른 잔에도 와인을 따른 뒤 알트 쪽으로 살짝 밀어냈다.

알트는 아직 잔을 받아들지 않았지만, 아라네아는 테이블 위의 잔과 부딪히며 건배를 한 뒤 와인잔을 입에 가져갔다.

황홀한 빛깔이 그녀의 입술에 번지며, 온통 무채색이던 그녀에게 붉은색이 덧칠해졌다.

“어쨌든 사정이 있어서 발랴에겐 가기 힘들어졌어.”

알트도 그녀를 뒤따라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기대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나 대신 발랴에 가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눈을 지그시 감고 와인의 맛을 음미하던 아라네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다시 떠졌다.

“싫어. 나더러 그 하이 엘프 할망구가 다스리는 나라에 가라고? 그게 말이 돼?”

“그럼 고귀하신 엘프들이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사는 건 말이 되고?”

“비꼬지 좀 마.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

아라네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려보냈다. 현세대의 엘프가 이런 신세가 된 건 반쯤은 자업자득이니까.

한때는 하이 엘프와 다크 엘프가, 지금의 인간처럼 두 신앙을 놓고 대립했던 시기가 있었다.

애초에 그 신앙들도 엘프에게서부터 기원하였으니 이는 당연한 일.

이러한 과거의 업보는 고스란히 후손에게 이어졌고.

지금은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인간사에 휘말려 선조들의 싸움을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발상의 전환을 해봐. 발랴의 경제가 우리 손에서 놀아날 거야. 그러면 메이라 여왕이 널 어떤 얼굴로 바라보게 될까?”

“흠. 나더러 그곳에서 황금의 여왕 노릇을 해라? ……뭐, 솔직히 짜릿할 것 같긴 하네.”

아라네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 콧대 높은 괴물 할망구가 자신에게 절절맨다니.

군침이 싹 도는 이야기다.

“거봐. 사람은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니까.”

“그러면 내가 거기서 뭘 해주면 돼? 장부 정리나 하라고 날 거기 보내는 건 아닐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밭에다 씨를 뿌리듯이, 돈도 어떻게 뿌려놓느냐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거든.”

원한다면 왕족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며, 알트는 은근하게 미소지었다.

허풍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대륙 어디에서도 명품 취급받는 엘프제 물건들이 알트의 자본과 만난다면, 더 많은 돈을 낳아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메이라 여왕은 군주로서는 탁월하나, 사업가로서의 창의력이나 기발한 발상, 영업력은 매우 부족한 편이었다.

드높은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상인과의 거래에서도 종종 손해를 보곤 했으니.

앞선 회차에서도 이미 몇 번이고 성공해온 사업인 만큼 알트는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앞서 던버스의 왕 갈로드에게 판 항유와 같은 비약이라거나, 엘프 귀족들만 사용하는 화장품 등은 수요를 공급이 절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품목.

그런 물건들의 생산량을 늘릴 인프라를 발랴에 구축해놓는 것이 알트의 첫 번째 계획이었고.

인간의 틈에 섞여 살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아라네아라면 충분히 알트의 대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크 엘프라해도, 영웅인 만큼 하이 엘프 사이에서도 존중받는 편이니까.

“전부터 궁금하긴 했어. 대체 당신 전 재산이 얼마야? 뭐, 성 하나는 살 정도는 돼?”

“나도 환산을 다 해본 게 아니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될걸?”

마음이 흔들리던 아라네아가 가볍게 던진 질문.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얼떨떨한 표정이 지어졌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웃으며 대답할 줄 알았었다.

“그러니까. 그 이상도 될 수 있단 뜻이지?”

덕분에 나른하던 아라네아의 눈빛에 광채가 생겨났다.

그리고 괜히 옷깃을 매만지더니, 알트에게 기대듯 상체를 살짝 숙이며 병을 집어 들었다.

이를 눈치챈 알트의 입가로 난처한 웃음이 스쳤다.

* * *

세린의 얼굴엔 점점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방금 목욕을 마쳤건만, 도라의 털은 암만 빗어도 털이 계속해서 빠졌다.

“세상에……. 대체 털이 언제까지 빠지는 거야?”

“헤헷. 옛 속담에 캐트시의 주머니와 털 빠짐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더라.”

싫어하는 목욕 탓에 내내 툴툴거리던 도라는 괜히 자신의 털 빠짐을 자랑스러워하며 으쓱거렸다.

결국 세린은 빠지는 털이 없을 때까지 빗는 건 포기했다.

그러자 도라는 빗어놓은 결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자기 손톱으로 털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똑 똑- 또독 똑

세린이 그렇게 깨끗이 패배에 승복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것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리듬.

“뭐야, 그 리듬. 설마 알트 너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알아듣네. 들어가도 되지?”

“응. 괜찮아.”

이에 알트는 방문을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가에 기대어 섰다.

“약속 있다더니 금방 왔네?”

“오랫동안 같이 있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사람이거든.”

알트는 과하게 색기를 흘려댔던 아라네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일단은 건장한 남자인지라, 오랫동안 철벽을 유지하는 건 조금 버거웠다.

심장이 좋지 않았던 전생의 몸이었다면 골백번은 죽었을 정도의 위험이었다.

“세린이 너랑 할 얘기가 있으니 밖으로 좀 나올래? 밤바람이 좀 차니까 겉옷은 걸치는 게 좋을 거야.”

“응? 나랑? 이 시간에?”

세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벨벳 로브를 몸 위에 걸치고 알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알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성의 꼭대기 층.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장소였다.

덕분에 발아래로는 도시의 전경이, 머리 위로는 밤하늘이 가득했다.

“와아! 예쁘다!”

그리고 표현력이 약한 세린은 그저 단순한 감탄사만 연신 내뱉을 뿐이었다.

“나, 여기 밤하늘을 제대로 본 게 오늘이 처음이야.”

“그렇지? 너 맨날 바닥만 보고 다니더라. 사실 생각해보면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하늘을 볼 일은 그리 많지 않더라고.”

알트의 말에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밤하늘을 보고 지구의 밤하늘을 떠올리려 했지만, 사진으로 본 것 말고는 그다지 기억나는 모습이 없었다.

애초에 지구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이 세계의 자연은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혹시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일단 절반은. 이 세계를 이해하려면 일단, 이 밤하늘이 제일 중요하거든.”

알트의 대답에 세린은 실망한 듯 입꼬리가 내려갔다.

뭔가 데이트 같은 분위기에 살짝 설렜지만, 알고 보니 지금은 알트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성실한 세린 학생은 금방 배움의 자세로 돌아갔다.

“저기 지평선으로부터 위로 쭉 뻗은 은하수가 보이지?”

“응. 뭔가 엄청 커다란 나무 같이 생겼어.”

“제대로 봤어. 그래서 엘프들은 저 은하수를 세계수라고 불러.”

“으응. 그건 얼마 전에 신학책에서 본 것 같아.”

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자세히 밤하늘을 살폈다.

이곳의 별들은 마치 저 은하수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와 이파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 은하수는 정확하게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게 이곳의 별자리야.”

“별자리면, 혹시 여기 종교와 관련된 거야? ”

“맞아. 저렇게 뻗은 별자리를 세계수의 가지라고 부르고, 동쪽으론 질서의 신들이. 서쪽으론 혼돈의 신들이 있어.”

“아아. 서쪽 가지 연합이라는 게 그 뜻이었구나. 난 왜 남쪽인데 서쪽인가 했어.”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알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세린에게 준 책들이 좀 어렵긴 했지만…….

아무래도, 어린이용 신학책을 빨리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를테면 동화책 같은.

뭔가 의문점이 생겼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린이 알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혼돈이면 뭔가 안 좋은 거 아냐?”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긴 한데, 그냥 자유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해.”

“흐음. 그렇구나. 그럼 오히려 혼돈의 신앙이 좋은 거네?”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으려 마. 개발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니까. 까놓고 말해서 그냥 틀딱 꼰대랑 미친 새끼일 뿐이거든.”

“헐. ……너 이 세계 좋아하는 거 맞지?”

세린은 이 세계의 종교관에 대한 알트의 신랄한 평가에 눈을 끔벅거렸다.

이 세계에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트는 경외심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이 세계엔 일곱 가지 기준을 두고, 질서와 혼돈 두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신앙의 중점이야. 정의, 용기, 절제, 지식, 지혜, 사랑. 그리고 희망. 이 정도는 기억해두는 게 좋아”

점점 길어지는 알트의 설명.

이에 세린은 손바닥 위에다 손가락으로 받아 적으며 암기하려고 애를 썼다.

어깨를 으쓱인 그는 일단 뉴비가 무조건 알아야 하는 부분부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일곱 항목이 각각 스킬과 스테이터스와도 관련 있고…….”

“잠깐만! 좀 천천히! 스킬이랑 스테이터스는…… 기술이랑 상태?”

“우리 세린이 겜알못이어도 영알못은 아니었구나. 역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이야.”

“좀 놀리지 마.”

알트가 손뼉까지 쳐가며 해주는 칭찬 아닌 칭찬에, 세린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쨌든 정의를 예시로 들면, 질서는 심판의 신 볼라크가. 혼돈은 복수의 신 빌레르가 있어.”

“아, 심판!”

요즘 부쩍 익숙해진 단어에, 세린은 동그래진 눈을 깜박였다.

본래라면 복수보다 심판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을 그녀였지만, 광신도를 만나본 이후로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어졌다.

“그럼 벨하라는? 너랑 오웨인 씨가 믿는 신 말이야.”

세린의 질문에 알트는 움찔거리며 살짝 뜸 들였다.

사실 벨하라는 그가 진짜로 믿고 따르는 신은 아니었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분은 희망이야. 혼돈은 요행의 신 로드. 영어 원문은 갬블러라 고전 시리즈에선 도박꾼이라 번역하기도 했어.”

“나 왠지 알 것 같아! 혼돈의 신앙 대부분은 세속적인 느낌이구나!”

“그래. 딱 그런 식이야. 집단과 개인 어느 쪽을 우선시하느냐의 차이도 있고. 다만 서양 게임이라 질서가 조금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없지는 않아.”

“와. 게임이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고 심오하네.”

세린은 한숨을 푹 쉬며 다시 한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애석하게도 그녀가 살아오면서 매달려온 학교 공부는 지금 상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나처럼 되고 싶다며? 그럼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가야 해.”

“으으. 이게 기본인 거구나.”

“그렇지. 저번에 트롤 기억나?”

알트의 말에 세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실수로 인해 알트가 큰 부상을 입었으니, 까먹었을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명심해둬. 그게 내 신체적 한계야.”

“응?”

갑작스레 때려 박은 돌직구에 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씁쓸하게 웃어 보인 알트가 설명을 이어갔다.

“주인공인 너랑 달리 NPC들은 한계가 있어. 올릴 수 있는 스킬 레벨과 스테이터스에 제약이 있거든. 즉, 아무리 노력해도 평범함을 넘을 수 없단 거야.”

이른바 기회비용이라고 할까.

하나의 스킬과 스테이터스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나머지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게 NPC라는 존재.

처음으로 성장의 벽에 도달했을 때.

이를 넘어서기 위해 수십 가지의 학문을 더 배우고 수백 가지의 약물을 복용해보았다.

허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알트의 육체는 시스템이 정한 한계를 넘지 못했다.

상인으로서 필요한 스킬과 스테이터스를 선택한 대가로, 나머지 것들은 입문 정도만 가능할 뿐. 전부 포기했어야 했다.

알트의 얼굴에 흐릿한 체념이 스쳐갔다.

할 수만 있다면 엔딩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게임이고 세계였다. 자신의 한계를 절절하게 깨닫지만 않았어도, 직접 엔딩까지 달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트는 울티마 스크롤의 썩어버린 고인물.

주인공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너무도 잘 알기에, 아쉬움을 꺾고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주인공과 다른 길로 성공을 해보려 한 거고.’

우물쭈물하는 세린의 표정에.

알트는 괴로운 마음을 감추며 빙긋 웃어 보였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고 시스템에 굴복한 건 아니다.

그저 방법을 바꿨을 뿐.

알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골라내며 이 자리에 섰고. 눈앞의 주인공 플레이어 또한 성공적으로 길들여냈다.

“세린이 너라면 날 뛰어넘을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2액트가 시작돼. 그러니까, 파이팅.”

그렇게 입에 발린 응원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말에 감동한 세린의 얼굴을 보며 알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세린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름다운 세계의 운명을 지킬 수 있는 게 오직 그녀 하나뿐이라니.

알트의 믿음이 못내 기껍고 뿌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떨떠름함이 스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파이팅이라 외치는 알트의 얼굴에서 짓궂음이 많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으음. …착각이겠지?’

* * *

세린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와 몸을 뒤덮은 끈적이는 액체.

하지만 그런 기분 나쁜 것들보다 몸이 너무 힘든 게 제일 문제였다.

“이제, 더는 싫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세린은 차근히 오전에 있었던 일부터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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