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13화 (13/282)

13. 전사의 자격 (1)

알트는 다음 메인 퀘스트 진행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세린의 방을 찾았다.

똑똑- 또 독 똑

예의 그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자는 중인가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침대 위에서 독서에 빠져있는 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의 진지한 대화가 큰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이야, 아침부터 공부야? 역시 대한의 딸! 장하네.”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그야 방금이지. 그런데 뭐 읽어?”

“아, 이거? 던버스의 다리안 왕자님이 고생했다며 주신 마법책.”

세린은 책의 표지가 보이도록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기초 마법서이긴 하나, 궁중 마법사인 르노의 소장품이었던 만큼 꽤 정석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원작인 게임에서도 꼭 챙겨야 하는 보상 중 하나.

“당연한 얘기지만, 마법 연습은 실내에서 하면 안 돼.”

“걱정 마세요.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애 취급하는 알트의 말에, 세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마법도 좋지만, 기왕 검도 있으니까 그것도 배우고 싶은데, 그건 어떻게 배워?”

“잘됐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온 거야.”

“어, 진짜?”

“그래. 그러니까 나갈 준비 해.”

어젯밤의 영향인지, 세린은 제법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책을 덮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옆구리 쪽에 몸을 말고서 자는 도라를 보고는 머뭇거렸다.

“자게 냅둬. 재작년쯤에 이 성에서 몇 달 머문 적 있어서, 쟤한테도 여긴 나름대로 익숙한 장소일 거야.”

알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린이 옷을 갈아입도록 문을 닫고 나와줬다.

* * *

엠브라의 수도에 본거지를 둔 전사 길드, 실버 울프 클랜.

보통 전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창칼을 들고서 근접전투를 벌이는 직업군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 엠브라에서는, 그 단어가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칼이 아닌, 활을 쏘고 주문을 외워도 상관없었다.

적과 시련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누구라도 전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그래도 실제로 하는 일은 용역 사무소에 가깝긴 해.”

“와, 그렇게 말하니 좀 깬다…….”

“너도 오늘 입단 테스트 겸 임무 하나를 골라서 보조로 따라가게 될 거야.”

“엣, 오늘 바로? 너도 같이 가는 거지?”

“내가 왜? 시험을 치러 가는데 보호자가 따라가는 거 본 적 있어?”

세린은 조금 전까지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곧바로 실전에 들어간다는 말에 살짝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크게 호위랑 몬스터 사냥, 그리고 탐색 임무가 있는데. 지금 너한테는 탐색 임무를 추천할게.”

“응. 알았어! 그래도 앞에 두 개 보단 그건 해볼 만할 것 같아. 지정해주는 걸 찾아오면 되는 거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의욕을 짜내는 세린을 보며, 알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추천하는 이유가 쉬워서라곤 말 한 적은 없었다.

“오오, 알트. 많이 기다렸나? 오즈월드 전하께 얘기는 전해 들었네.”

이윽고 이곳의 수장 브롤린이 로비로 내려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알트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라는 오즈월드의 왕명이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알트와 그의 친분을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협력해줄 터.

“그래서 우리가 뭘 도우면 되겠나?”

“쟤 좀, 어엿한 전사로 키워줘.”

하지만 그 한마디에 브롤린의 표정이 싹 바뀌고 말았다.

“저 꼬마 아가씨를 단련시켜 달라고? 자네, 못 본 사이에 농담이 재미없어졌구먼.”

“그야 농담이 아니니까. 당연히 재미없지.”

“쯧. 우린 초짜는 안 받아. 여긴 오직 증명된 전사들만이 모이는 명예로운 장소라고.”

알트는 그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주인공인 세린이 앞선 사건들을 해결하고서,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전부 알트의 공이 되어버리면서. 메인 퀘스트가 살짝 꼬이고 말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주 살짝만.

“불만 있으면 오즈월드 전하한테 말해.”

“제기랄! 치사하게 그렇게 나오긴가?”

브롤린은 턱수염을 벅벅 문지르며 작게 신음했다.

엠브라에선 왕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왕과 힘을 겨뤄서 이길 자신이 있는 이후의 얘기지만.

“어휴. 알겠네, 알겠어. 그럼 일단 실력이나 가늠해보자고.”

“너무 실망부터 하지는 마. 보기보다 기본은 할 거야.”

솔직히 알트는 세린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이 게임의 시스템을 믿었다.

모름지기 주인공 보정이란 건 절대 얕볼 게 못 됐으니까.

“어이 꼬마 아가씨. 밖으로 나와.”

“네넷!”

세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브롤린을 따라 뒷마당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다양한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브롤린은 세린이 가진 것과 비슷한 크기의 검을 챙겨 자세를 잡았다.

“허리춤의 검은 이나 쑤시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디 그걸로 한 번 덤벼봐.”

“어? 이거 진짜 칼인데 괜찮나요?”

“그럼 내가 들고 있는 건 숟가락처럼 보이나?”

브롤린의 무뚝뚝한 핀잔에 세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다 이내 한차례 심호흡한 뒤, 허리춤에 매어 둔 검을 뽑아 들고서 지면을 박찼다.

채앵!

검을 받아내던 브롤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가녀린 체구에선 믿어지지 않는 묵직한 검격이, 그의 손목이 시큰해지도록 전해졌다.

다만 반전은 딱 거기까지.

.

.

.

“이만하면 됐다!”

브롤린의 외침에 세린은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십여 차례 검을 휘둘렀을 뿐이지만, 그녀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의외로 힘은 꽤 쓰는데…… 그 밖에는 완전 형편없구먼.”

“잘됐네. 몸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잖아?”

“쯧.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도 입단 테스트까지는 보게 해줄 거지? 기왕이면 조이를 붙여줬으면 좋겠는데.”

알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브롤린이 귀를 의심하며 눈을 찌푸렸다.

“지금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그, 아니. ……아닐세.”

알트가 태연히 대답하자 브롤린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이! 누가 가서 조이 좀 불러와 봐.”

이윽고 브롤린의 호출을 받은 조이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경갑옷을 입고 도끼와 방패를 착용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바이킹을 연상하게 했다.

그리고 알트를 발견한 그녀는.

“엑?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과거에 좋지 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인지, 그를 보자마자 오만상을 잔뜩 찌푸리며 기겁했다.

반대로 알트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고.

“조이. 네가 저 꼬마 아가씨의 입단 시험 좀 맡아줘야겠다.”

“대장.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더러 저 쌍놈이 데려온 여자애를 맡기는 거야?”

조이는 브롤린의 설명을 듣고서 인상을 더욱 구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클랜의 규칙상, 시험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래서 너, 이름이?”

“아, 넷? 세린이에요!”

“내 이름은 들었지? 난 조이. 넌 오늘 나와 함께 수정 호수 동굴에서 실종된 모험가를 찾으러 갈 거야.”

세린은 오늘 임무를 간단히 설명해주는 조이를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보다 훨씬 큰 키에 다부진 몸은, 같은 여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 예쁘다기보단 잘생겼단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얼굴.

덕분에 세린은 왠지 가슴이 뛰며, 얼굴도 살짝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둘 다 잘 다녀와.”

알트는 그런 두 사람을 실실 웃으며 배웅했다.

조이는 게임에서도 성능이 뛰어난 축에 들던 동료로, 알트도 도라 다음으로 선호하던 캐릭터였다.

게다가 탱커 타입이니 위험한 상황에서 세린을 잘 지켜줄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

여러모로 입단 테스트에 동행시키기에는 최적의 인재였다.

휘파람을 분 알트는 브롤린을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어쨌거나 이번 퀘스트는 그가 나설 필요가 없으니, 그 사이에 다음 퀘스트를 위한 물밑작업을 해둘 생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브롤린. 아직 내 이름 안 지웠지?”

“자네가 자꾸 은밀한 방식만 고집하면 언젠가는 박탈해야겠지만, 아직은 이름을 지우지 않았네.”

비록 정면승부를 좋아하지 않는 알트지만, 과거에 여러 업적을 세우며 실버 울프 클랜의 명부에다 이름을 올려뒀었다.

“내가 은신을 선호하긴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련 앞에서는 절대로 도망가진 않는다고.”

“그래 알았네, 알았어. 그래서 의뢰를 맡겠다는 거지?”

툴툴거리던 브롤린이 서류를 한 뭉텅이 꺼내어 책상에 올려뒀다.

슬쩍 훑어봐도 단순한 심부름 수준의 일부터, 드래곤 사냥이라는 정신나간 의뢰까지 다양한 퀘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알트는 그 중 적당히 밑쪽에 있는 의뢰서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럼 이걸 맡을게.”

“흐음. 어디 보자.”

브롤린은 알트가 수주한 의뢰 내용을 확인하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이쿠! 자네, 하필이면 골라도 이걸 고른 건가?”

최근에야 입구가 발견된 미답의 유적을 탐색해달라는 한 마법사의 의뢰.

다만 의뢰서의 하단에는 임무에 실패한 전사들의, 줄 그어진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있었다.

“다들 입구를 여는 방법도 못 찾아 난리야. 말 그대로 문만 두들기다 돌아왔지. 어찌 된 게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더군.”

“그럼 더 잘됐네. 내가 문 따는 솜씨도 어디 가서 안 뒤지거든.”

“하긴,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일을 처리하는 게 자네 특기였지? 그럼 어디 기적을 파는 상인의 저력 좀 보여달라고.”

브롤린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알트에게 의뢰서를 돌려줬다.

연이은 실패로 체면을 구기던 그로서는, 타이밍 좋게 구세주가 나타나 준 셈이다.

그리고 알트 또한.

처음부터 이 의뢰를 받으러 오는 것이 오늘의 진짜 용건이었다.

* * *

알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선 의뢰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 마법사는 유적과 관련된 역사를 연구하던 자로 알트와 나름 구면이었다.

“늑대들에게 일을 맡겼는데, 행상인이 찾아올 줄은 몰랐군.”

골동품과 고문서 사이에 파묻혀있는 늙은 인간 마법사는, 알트의 방문에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심보 고약한 늙은이 덕분에 늑대들 체면이 말이 아니거든. 나라도 나서야지. 어쩌겠어.”

“심보가 고약하다니.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볼 생각도 못 하는 머저리들에게 그 유적을 맡길 수 없지 않겠나?”

“그야, 보통은 의뢰인 스스로 해결 못 하는 일을 부탁한다고만 생각하니까.”

알트가 말했듯이.

이 마법사는 유적의 입구를 열지 못해서 이 의뢰를 맡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유적의 입구를 봉해버린 장본인.

그리고 이 퀘스트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뉴비들이 한참을 헤매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쓸데없이 죽을 머저리들을 솎아내고 싶었을 뿐일세. 헌데…… 알트, 괜찮겠나? 그 유적의 망령들이 얼마나 성가신 놈들인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아니면 누가 거기에 들어가겠어?”

“하지만 그것들이 자네 고향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나.”

“6년 전 일이잖아? 지금과 상황이 다르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마법사의 말에 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지금도 살아있는 자는 발 디딜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그 원인은 지하 깊숙한 곳의 유적에서 기어 나온 고대 엘프의 망령.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을의 운명을 알고 있던 알트가 미리 손을 써둔 탓에, 마을 사람들만은 무사했다는 것.

“지금이라면 그 고대 엘프의 망령을 소탕시킬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날 믿고 유물 조각을 넘겨.”

“알겠네. 혹시 죽더라도 망령이 되어 찾아오지는 말고.”

“어차피 그것들한테 죽으면 망령도 못 될걸?”

부디 몸조심하라는 마법사의 당부에, 알트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 * *

유적으로 향하는 알트의 장비는 평소와 달랐다.

인챈트를 덕지덕지 바른 갑옷과 무언가 영험한 힘이 느껴지는 여러 장신구 덕분에 인상이 확 바뀌었다.

상인이 아닌 노련한 전사라고 해도 누구든 믿을 만큼.

거기에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대는 소리가 나는 탓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건 힘들어 보였다.

주 무기도 단검이 아닌 기다란 한손검.

부무장으로 단검도 있긴 했지만, 어딘가 의식에서 쓸 법한 기괴하고 커다란 생김새가 전투에 적합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양한 약과 도구를 담아놓은 여러 개의 보조 가방만큼은 계속 지니고 있었다.

“도라, 넌 안까지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예? 형님 혼자 가시려고요?”

“저 안에선 은신이 전혀 안 먹혀. 너까지 지키면서 싸우는 건 힘들어.”

유적의 망령을 상대로는 은신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제아무리 은신의 전문가인 알트라도, 녀석들 앞에선 숨을 수 없을 정도.

유적의 입구에 선 알트는 찬찬히 문을 살폈다.

누가 보면 문이라고 짐작도 못 할 만큼 거대한 돌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에는 다양한 기하학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제법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의뢰인 마법사가 고대의 비술을 복원해 만든 봉인 마법이 아니었어도, 쉽게 열릴 것 같은 문은 아니다.

“어디 보자.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알트는 찬찬히 문의 문양을 더듬어가며 살폈다.

그렇게 한참을 찾다, 한쪽 구석에 작게 떨어져 나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어휴, 여기 있었냐? 이럴 땐 상호작용 키 한 방에 해결되던 게임 시절이 그리운걸.”

툴툴대던 알트가 문에다 마법사에게 받은 유물 조각을 가져다 대며 주문을 외웠다.

조각이 문의 떨어져 나간 부분과 정확하게 들어맞더니, 마치 퍼즐을 맞춘 것처럼 감쪽같이 온전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쓸만하네. 나중에 영감님한테 이 봉인 마법 좀 얻어가야겠다.”

문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려보다가, 또 한 번 주문을 외우자.

쿠구구궁

주문에 반응하여, 건물 3층 높이의 거대한 바위문이 스산한 공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열렸다.

“형님! 조심하세요!”

“걱정 마. 금방 돌아올게.”

알트는 커다란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도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켰다.

“뭐, 정면승부는 내 특기가 아니긴 하지만.”

모름지기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다른 법.

알트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쓴웃음을 짓고는, 유적 안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여길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걸.”

유적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니 묘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웅장한 규모의 벽화.

그것도 달 위에 세워진 고대 왕국 룬델의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푸른 달 할루나는 엘프의 고향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망원경으로 할루나를 관찰하면, 룬델의 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엘프는 신을 직접 모시던 천상의 존재로, 천사와 비슷한 종족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그들이 멸망한 이유만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수천 년 전 그들이 지상으로 내려왔고, 대륙 곳곳에 왕국을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 왕국마저도 전부 사라진 지금은.

그 영토들 또한 인간의 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후손인 현시대의 엘프도 신의 사자가 아닌, 그저 장수하는 종족에 지나지 않았다.

“아차! 이거 깜박하면 큰일이지!”

유적 감상에 정신이 팔려있던 알트는, 다급하게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헐렁한 주머니 속에는 작은 보석 하나만 들어있었다.

“하나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과거의 나, 잘했어.”

할루나의 기운이 결정화된 보석인 문드롭.

문게이트의 촉매가 되는 게이트 스톤과 같은, 고대 엘프의 비술들을 재현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재료였다.

연금술의 힘을 빌려 만들 수는 있으나 그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까다로운 보석.

하지만 고대 엘프의 망령을 사냥하면 낮은 확률로 문드롭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유적의 탐사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필수 퀘스트 중 하나였다.

다만.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망령을 잡기 위해선 이들을 잠재울 주문과 함께, 할루나의 광석으로 만든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장비는 이런 고대 엘프의 유적이 아니고선 구할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가위의 포장을 자르기 위해 가위가 필요한 상황.

그래도 개발진에게 양심이 있었는지, 마법사의 서재를 뒤지면 나름대로 꼼수를 알아낼 순 있었다.

그 꼼수란 게 어째, 보름달 아래에서 핀 달맞이꽃에 초승달을 비춘 이슬을 모아…… 기타 등등의, 아주 까다로운 방법이었지만.

물론.

그 외에, 다회차 고인물을 위한 히든 피스도 존재했다.

검을 뽑아 든 알트는 문드롭을 날에다 가져다 대곤 작게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푸른빛 덩어리로 변한 문드롭이 날 전체를 감싸들듯이 스며들었다.

문드롭을 사용한 특수한 코팅법으로, 효과는 반나절밖에 안 되지만 임시방편치고 꽤 쓸만했다.

이 세계에선 소수의 다크 엘프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비급.

알트가 검을 휘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고인물로서 대륙 곳곳을 털었던 그도 이 던전처럼 주인공과 마찰이 생길만한 곳은 건드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기회가 왔으니, 알트의 최애 무기를 가지러 갈 시간이었다.

‘원래 남의 떡이 맛있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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