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흑색 단검 (2)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밤이 지나고.
밤 사이 탈리스커가 끔찍하게 살해당했던 사실은 금세 탑 전체에 퍼졌지만.
학회에선 이 일에 대해 절대로 관여치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이는 보란 듯이 침실 바닥에 새겨진 빌레르의 낙인과, 시신에 남아있던 신성력이 복수의 집행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색의 날이 거둬간 목숨은 묫자리도 쳐다보지 말라.’
빌레르의 복수와 관련된 오래된 격언.
이것은 비단 연합만이 아닌 제국에서도 전해지는 말이다.
신이 허락한 복수는, 그만큼이나 정당하고 무거울지니.
애초에 복수의 신에게 원한을 산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는 법.
하지만 먼 옛날 한 왕은 그런 어리석은 자였고.
복수의 기도를 올린 자를 찾아내어 처벌했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에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공정의 신이기도 한 빌레르가, 왜 왕 한 사람만이 아닌 나라 전체를 멸망시켰는가에 대해선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긴 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가설은, 기도를 올린 자를 죽인 건 왕이 아닌 그 나라의 법으로 간주했단 해석.
그렇기에 나라 자체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단 추정이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야말로 빌레르가 맞춰놓은 천칭의 균형을 기울여버리면, 어떤 말로가 기다리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알트는 학회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지금쯤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침묵의 경비대는 비상 소집이 걸렸겠는걸.’
이번 일로 발등에 불똥이 튀었을 그들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물론 그들 또한 엠브라의 사냥꾼 윌리처럼, 제4여명회를 지원하라는 그 명령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꽤 있겠지만.
하지만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군인의 숙명.
당장은 뒷수습으로 골치 아프더라도, 나중에 가선 내심 고마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메인 퀘스트가 진행될수록 제4여명회와 직접적으로 엮인 자들은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까.
‘지금은 나한테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지.’
애초에 알트는 특별 감시 대상도 아니다 보니, 요원들도 그의 방문을 유달리 신경 쓰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세상일에 만일이라는 게 있는 만큼, 보험은 많이 들어두는 편이 좋으니까.
“정말 이 많은 걸 매달요?”
“이만한 양을 주문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굳이 오버델에 왔겠습니까? 이후의 대금은 은방울여관을 통해 청구해주세요.”
“어, 그럼 다시 한번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납품처는 발랴의 마이너슨 상회. 품목은 새벽의 정수 세 상자에 말린 피 이끼 다섯 상자. 그리고…….”
연금술 학회의 부속시설로 딸린 약재상.
아무리 오버델이 대량생산에 특화되어 있다지만. 직원은 알트가 주문한, 생각지도 못한 물량에 당황하는 얼굴을 감추질 못했다.
‘이걸로 내 행적이 의심받을 위험은 좀 더 줄어들겠지.’
물론 한두 번도 아니고, 알트가 어딘가에 출몰할 때마다 제국에 불리한 상황이 생긴다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이제 상회의 일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여러모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뭐, 세린이가 제대로 활약만 해준다면 차차 해결될 일이야.’
알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문서의 말미에 서명을 남겼다.
“……흠.”
일을 마치고 약재상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느껴지는 묘한 시선.
거리엔 많은 사람이 돌아다녔지만, 시선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느껴지는 그 감각만큼은 선명했다.
은신의 전문가인 알트조차 기척을 눈치채는 게 고작인 완벽한 은신.
이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도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줄래?”
“네, 형님! 그런데 어디 가시는데요?”
“저기서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
알트는 시선의 주인에게 들으라는 듯,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대답하고는 근처의 골목길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시선 또한 알트를 뒤따라왔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하자, 그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길게 기른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수수한 원피스 위에 흙 묻은 앞치마를 덧입은 모습.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마을 처녀였지만.
그 정체는 평범함과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을, 알트는 잘 알고 있었다.
“세 번째 손가락께서 어쩐 일로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몰라서 묻습니까? 열 번째 손가락이여.”
“글쎄요? 어젯밤의 일 때문이라면, 빌레르께서 허락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라면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겠죠?”
알트는 여인의 말에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 말에 여인은 화가 났다기보단,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더니.
잠깐의 뜸을 들인 후, 짜증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건방 떨지 말고 그분의 관대함에 감사하며 겸손해지세요. 복수의 기도를 올리는 것도, 사사로이 단검을 휘두르는 것도 저희 열 손가락이 할 일은 아닙니다.”
여인의 말대로 어제 알트가 한 일은 일종의 권력 남용이었다.
본디 복수의 기도란 힘 없는 약자들에게 그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한 은총.
그러니 신의 도구인 복수의 집행자가 복수의 기도를 직접 올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블랙 대거의 간부인 빌레르의 열 손가락.
이름대로 단 열 명뿐인 그들의 역할은 복수를 집행할 암살자를 육성하고, 복수의 신탁을 받아 전달하는 것.
드물게 직접 집행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또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대모께서 뭐라 하십니까?”
알트는 태연한 얼굴로 여인에게 수장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작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당신 말대로 빌레르께서 허락한 일에 그분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그냥 얼굴 까먹기 전에 좀 보자는 얘기만 전하시더군요. 집회에 오지 않은 지 3년이 넘었잖습니까?”
“어느새 그렇게나 됐군요. 그동안 일이 바빠서 그만…….”
“어쨌든 전 분명히 말씀 전했습니다.”
대모의 말을 전달하는 여인의 표정은 귀찮아 죽겠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알트는 조금 더 달라붙을 생각이었다.
“혹시 가시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의 부탁이라니. 얘기만 들어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요.”
“에이. 그냥 약이 든 상자 몇 개만, 첫 번째 손가락…… 아드리안 저하께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요.”
“배달요? 제가 무슨 전서구라도 되는 줄 압니까?”
여인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블랙 대거의 본거지이자 나라 전체가 거대한 빌레르의 사원이라 할 수 있는 임프리스.
그 나라 왕의 동생이며 블랙 대거의 이인자인 아드리안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니,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치료제는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서 퍼트리는 게 낫겠지.’
이는 알트의 행적을 가리기 위한 술책이면서도, 블랙 대거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물론, 어젯밤 탈리스커의 운반책을 미행하여 얻어낸 치료제는 생각보다 그 양이 많긴 했어도.
도라의 주머니를 이용하면 손쉽고 눈에 띄지 않게 엠브라로 가져갈 순 있다.
허나 알트가 돌아온 직후 치료제가 퍼져나간다면, 분명 그 연관성을 생각할 사람이 나타날 테고. 게다가 효과적으로 막아낸 까닭에 엠브라에서는 역병 환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치료제는 임프리스에서 퍼트리는 게 이상적.
열 번째 손가락인 알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 사실이 대외적으론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더욱 적절했다.
“최근 대륙 남부 전체로 퍼지고 있는 역병의 치료제입니다. 다만 수량이 한정적인데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출처는 비밀이라고 전해드려 주세요.”
“마침 잘됐네요. 거긴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가선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여인이 반색했다.
임프리스는 연합 진영에서 제4여명회와 침묵의 경비대가 침투하지 못한 유일한 청정구역.
그래서일까. 당장은 역병이 발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병이 퍼지다 보면, 제4여명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도 안전하지 않을 터.
분명 아드리안도 기꺼이 협력해줄 거다.
“그럼 나중에 도라를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기르는 그 캐트시 말인가요? 알겠습니다.”
알트의 입에서 도라의 이름이 나오자, 아주 잠깐이지만 여인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허나 알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캐트시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 오버델에서, 굳이 자원해서 활동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 * *
알트는 여러 가지 볼일을 끝낸 뒤, 루퍼스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저걸 내게 맡겨놓고 어딜 그리 쏘다니나? 자네는 내가 100년 전 그 전쟁을 겪은 세대라는 걸 까먹은 게인가?”
루퍼스는 알트를 애타게 기다렸는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기도 전에 툴툴거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알트는 방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가고일 소녀를 바라보았다.
부풀어 오르고 뒤틀린 신체는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고통은 잦아들었는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 치고는 제대로 봐주고 계셨네요.”
“흥! 모름지기 연금술사의 과오는 연금술사가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
루퍼스의 그 말에 알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가고일 소녀를 스승에게 맡긴 건 정답이었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는 조금 글러 먹긴 했어도, 연금술사로서는 확실히 신뢰할 수 있었다.
물론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해주지는 않았기에, 루퍼스는 소녀를 그저 의사를 빙자한 연금술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고통받는 불행한 환자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종족에 대한 앙금보다, 루퍼스의 직업의식이 먼저 움직인 모양이다.
“그래서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
“계속 괴로워하길래 일단 재워뒀지. 돌 인간 아니랄까 봐 약을 갑절은 써야 먹히더군.”
“그, 평소에 쓰시던 이상한 약을 쓰신 건 아니죠?”
“이상한 약이라니! 그건 엄연히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여 진리에 도달하게끔……!”
“아, 예에. 그래서 치료는 가능하겠습니까?”
알트는 소녀의 몸에 꽂혀있는 여러 개의 관을 바라보다 물었다.
약의 내용물은 바뀌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회복약에 의존하지 않고선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로 보였다.
“속은 겉보다 더 엉망인 것 같더군. 안에서 내장끼리 서로 뒤엉키고 아주 난리야. 계속 뒀으면 머지않아 그냥 살아있는 반죽 덩어리가 됐을 테지.”
“그럼 교수님도 치료하기 힘들단 겁니까?”
“에이. 뭔 소린가? 변이는 내 전문 분야지 않나?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완치는 될걸세.”
자신감 넘치는 루퍼스의 표정을 보고서 알트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교수는 유명한 괴짜지만, 생명이 걸린 일에 허세를 부릴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돌 인간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겐가?”
“그러게요. 서쪽에 있어야 할 가고일이 왜 여기서 이런 꼴이 됐는지는 저도 알고 싶습니다.”
연금술사의 역병 에피소드는 생각보다 쉽게 잠재울 수 있었지만.
알트는 가고일 소녀의 존재가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탈리스커처럼 메인 퀘스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정작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
게다가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생길 파급력도 보통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 세계의 역사에 확실하게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킬만한 존재.
‘혹시 누구도 찾아낸 적 없는 숨겨진 퀘스트라도 찾아낸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알트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루퍼스의 말대로라면 소녀의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할 거고, 지금은 다음 메인 퀘스트를 신경을 써야 할 때.
아쉽지만 이 일에 대해 파고드는 건 나중이 되어야 할 듯싶었다.
‘이제 곧 그 밀수업자 놈들도 그나마 남아있던 일감마저 끊겨버린 걸 알게 되겠지.’
게다가 탈리스커를 통해서도 듣긴 했지만, 그가 만든 치료제를 제국에다 운반하던 밀수업자 패거리가 있다.
이들은 여러모로 알트와 안면이 있는 집단이었는데.
첼소어는 가장 활발한 경제 항구로 손꼽히는 곳.
제국과 연합의 무역 단절은 밀수업자 놈들에겐 한탕, 아니 여러탕 일을 벌일 기회였다.
그 때문에 첼소어에 금융 원조를 받기 위해 넘어온 주인공이 은행과 상단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는 과정에서, 밀수업자와 마찰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놈들은 적극적으로 암살이나 습격을 시도하기도 했고.
하지만.
주인공과 마찰이 있기 전엔 밀수업자들이 맘대로 활동하던 게임과는 달리.
1회차에서는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알트의 등장으로 그 꿈은 시작도 전에 좌절되었다. 그 이후 주인공의 플레이를 위해 나름 얌전히 지내던 회차들에서조차 알트는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기에, 날파리 마냥 성가시게 시비를 걸어온 녀석들.
‘그래서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나와주려나?’
사실 그 당시엔 소심하게 깔짝대기만 할 뿐, 크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
알트 또한 엔딩 이후를 생각해 기반이 될 만한 알짜 상회 몇 개만 사들였을 뿐. 주인공과 밀수업자들의 갈등을 위해 적당한 밀수는 눈감고 넘어가 주곤 했고.
심지어 나중에 가서 상회가 점점 커지자 알아서 꼬리를 말고 잠적한 소인배들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공 플레이어도 있겠다. 아예 숨통을 확실하게 조여볼 생각으로, 놈들의 마지막 일감인 치료제를 가로채러 왔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궁지에 몰린 녀석들이 좀 더 과감하게 나와주기를 빌면서.
“불이야! 불!”
“뭐야! 대체 어디야? 어디?”
그렇게 알트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어디서 불이라도 났는지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하여간 달에 두어 번쯤은 연구실 태워 먹는 놈이 꼭 있다니깐. 쯧!”
루퍼스는 그 소란이 익숙하다는 듯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불 쓰는 일이 많은 학회의 특성상, 건물에서 화재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그런 환경에서 100년 넘게 지내 온 루퍼스에겐, 그저 일상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기 창문도 열어놓을게요.”
“응? 뭣 하러 그러나?”
“어디서 불이 났는지에 따라, 이쪽으로도 연기가 새어 들어올지도 모르잖습니까? 이 연구실에도 발견 못 한 비밀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루퍼스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열고 있는 알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십 년을 사용해 온 연구실에 비밀 통로라니,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
하지만 곧 알트가 말한 대로 매캐한 연기 냄새가 루퍼스의 연구실에도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흠? 벽에서 연기라니. 이건 별일이로군.”
벽에 난 작은 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를 보며, 루퍼스가 이번 화재에 대해 조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알트도 복도 쪽을 슬쩍 내다보며 바깥의 상황에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건대, 여기저기 바닥과 벽 틈에서 연기만 올라올 뿐, 화재 현장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 난 곳이 빨리 발견돼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그런 일은 지난 100년간 한 번도 없었네.”
“오늘이 그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 될 줄 누가 압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알트의 표정은 걱정하는 사람치고 너무나 태연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화재의 방화범이 바로 알트였으니 당연한 일.
솔직히 이 화재가 발생한 장소는 늦게 발견되길 바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쯤이면 역병에 관련된 자료들은 전부 숯이 됐겠지.’
게다가 이후 조사 도중 탈리스커의 방과 이어진 비밀 실험실이 발견되면, 학회의 중진들이 알아서 납득하고 모든 걸 은폐해버릴 터.
알트는 벽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희미한 연기를 조용히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한 노신사가 서류 더미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한숨이 나올 때마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는 중년 사내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탈리스커는?”
“아직 확인이 안 됐사오나, 정황상 녀석도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난감하군. 계획에 이렇게까지 차질이 생길 줄이야.”
“엠브라의 일도 그렇고. 역시 그 사생아 놈 짓일까요?”
“그 미련할 만치 우직한 녀석에게 그만한 재주가 있을 리 없지.”
노신사, 제국의 재상 헤르만은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은 서류 더미를 옆으로 치워놓았다.
오늘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수년간 준비해온 계획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이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금방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아무래도 경비대 녀석들의 첩보만으론 미덥지 못하군. 여명회에 보낼 만한 인재는 없나?”
“가능한 한 수배해보겠습니다, 각하.”
“서둘러라.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하니까.”
헤르만은 중년 사내에게 지시를 내린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널찍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은, 헤르만과 눈이 마주치자 순진무구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때.
쾅 하고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헤르만의 집무실로 한 젊은 기사가 들어왔다.
“헤르만!”
검붉은 피딱지투성이가 된 기사는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헤르만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심지어 살기등등한 살기를 뿜으며 검까지 뽑아 든 모습은 당장에 헤르만을 죽일 기세였지만.
정작 헤르만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아르밋 전하. 시찰에서 복귀하시는 길입니까? 어째 일이 잘 풀리지 않으셨나 봅니다.”
“최근 형님들이 이상해졌을 때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거늘! 네 놈이 감히 날 속여?”
“부디 고정하시지요. 모드린 전하께서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국의 제3황자 아르밋은 그 말에 소파에 앉아, 살짝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막내 황자 모드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아르밋은 도무지 진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격한 분노가 불꽃이 되어 그의 마음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
이를 부득 간 그는 어린 동생에게 일갈했다.
“모드린. 네 방으로 돌아가라.”
“형님, 혹시 헤르만을 해치실 건가요? 그러실 생각이라면 전…….”
“어서 돌아가래도! 이건 명령이다!”
아르밋의 고함에 모드린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내 어린 황자의 고개가 푹 떨궈지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의 말대로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드린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아르밋은 서슬이 퍼런 눈으로 헤르만을 노려보며 그에게 검을 들이댔다.
“말해봐라 헤르만. 내 손으로 무고한 백성을 도륙하게끔 만든 그 이유를 말이다!”
“전하.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황자로서 좀 더 책임감을 가지시는 게 어떻습니까?”
“끝까지 발뺌하기냐! 전부 네놈이 파놓은 함정이었단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검을 쥔 아르밋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작게 떨렸다.
당장에라도 목을 벨 듯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려는 순간.
-팟!
아르밋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갑자기 헤르만이 두르고 있던 망토에서 피어오른 금빛 광채.
눈부시다고 할 정도의 빛은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그는 헤르만을 후광처럼 감싸고 있는 그 빛에 맥을 추지 못했다.
“전하. 옷이라는 건 참으로 기이합니다. 사람이 어떤 복장을 하느냐에 따라 달리 비치는 법이지요. 그래서 저 역시 이 나라의 재상이지만, 제 소명을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사제복을 입습니다.”
“크읏!”
“그래서 어땠습니까? 평범한 촌부도 일제히 제복을 맞춰놓으니, 제법 군대처럼 보이지 않던지요?”
간교한 물음에, 아르밋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자꾸만 뒷걸음질 치던 그의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털썩-
이내 무언가에 짓눌린 듯, 괴로운 표정을 지은 그가 그대로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그 옆으로 나뒹구는 검에선 핏물이 흘러내리는 듯 했다.
“후회되실 겁니다. 한 번이라도 그들의 비명을 제대로 들었다면, 도중에 멈출 수 있었을 텐데. 어린아이들이 집에서 뛰쳐나와, 부모 형제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눈치채시다니.”
“그, 그만… 아니야! 나는 그러려고 한 게…….”
“그들의 눈빛을 제대로 본 적이 있습니까? 공포에 질린 채 구원을 바라던 그들의 두 눈을 말이지요.”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던 아르밋의 얼굴에 점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분노라는 감정을 일으키며 헤르만에게 검을 향하게 했던 옅은 죄악감이, 어느덧 아르밋을 짓누르는 바윗덩이가.
아니,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당신의 죄에 직면하십시오, 전하. 당신이 빼앗은 영혼들의 무게를 느끼며 참회하시는 겁니다.”
“흐으… 흐아아…….”
“받아들이십시오. 그게 전하께 내려진 심판입니다.”
“흐아아악! 그마안!”
헤르만은 천천히 아르밋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황제의 길에 섰던 찬란한 별 하나가.
제 운명을 다 하지도 못한 채,
사그러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