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순례자의 길 (1)
조이는 허벅지 아래에서 꿈틀대는 몸놀림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었다.
승리감에 도취해 붉게 물든 그녀의 미소 아래로, 앓는 듯 내뱉는 누군가의 신음이 쉼 없이 이어졌다.
“잠깐……! 아파요!”
“원래 저항하면 더 아픈 법이야.”
“제발 그만……! 여기서 끝내요!”
“약속했잖아? 한번 시작한 이상, 끝내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찡그리는 세린의 얼굴에 조이의 미소가 더욱 짙게 번졌다.
하지만 곧 그 소리가 끊어지며, 두 사람의 몸 위치가 뒤바뀌고 말았다.
“흐으, 어때요? 제가 이겼죠?”
올라앉은 세린은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냈다.
한참을 뒤엉킨 탓에 누구의 체취인지도 분간이 어려울 지경.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가냘픈 목에 차가운 도끼날이 닿자,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에 올라탄 쪽이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야.”
조이는 세린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며, 그녀를 다시 뒤로 넘어트렸다.
덕분에 세린의 얼굴은 땀 섞인 흙먼지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엉망이 돼버렸다.
이미 한참을 겨룬 듯, 둘의 옷은 잔뜩 흐트러진 채 땀에 흠뻑 절어있었다.
“그렇게 정 힘들면 오늘은 여기서 끝낼까?”
조이의 달콤한 제안에 세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본능에 굴복했다.
“정말요? 진짜로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해도 돼요?”
“대답할 기력이 있는 걸 보니 더 해도 되겠네.”
“와! 너무해!”
입을 딱 벌리며 경악하는 세린.
조이는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넘어져 있는 세린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대신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세린도 역시 조이가 물러난 뒤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우며 몸을 일으키되, 눈과 칼날의 끝은 계속해서 조이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이젠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는구나? 그래. 날은 언제나 상대를 향하게 해.”
“그야. 거의 백번은 당했으니까요.”
훈련이 끝나기 전까진 언제나 임전 태세를 유지.
이것은 세린이 몇 번이고 두들겨 맞아가며 배운 항목이었다.
“음, 못 본 사이에 두 사람 꽤 친해졌지? 둘 분위기가 뭔가 좀 뜨겁고 끈적하지 않아?”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형님.”
두 여자의 땀 흘리는 대화를 구경하던 알트가 불순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그 말에 도라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어라? 알트! 너 언제 돌아왔어?”
“야, 앞을 봐야지! 지금 그런 거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알트는 자신의 등장으로 부주의하게 한눈을 팔아버린 세린에게 급하게 경고를 날렸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흐약!”
조이의 도끼 옆면이 세린의 엉덩이를 강타하며, 찰싹하는 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와! 겁나 찰지네!”
소리에 대한 알트의 순수한 감탄사에, 세린의 얼굴이 잔뜩 빨개졌다.
조이는 그런 세린을 보고 웃으며 도끼를 어깨에다 걸쳤다.
“그럼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
세린은 조이에게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며 얼얼한 엉덩이를 문질러댔지만, 원망하더라도 소용없는 일.
순전히 훈련 중에 집중력을 잃어버린 그녀의 잘못이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진 상대에게서 절대로 눈 떼지 마.”
“네에…….”
입을 삐쭉 내민 세린은 아직 배울 게 한참 남아있어 보였다.
***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알트는 유독 이 세계의 주민이 된 다음에야 처음으로 경험해본 일들이 많았다.
물론 검과 마법 같은 판타지적인 것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남들에겐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도, 불완전한 심장을 가지고서 태어났던 그 당시엔 죽음의 위협이었기에.
서른이 넘은 나이가 돼서도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커피조차 마셔보지 못했다.
격한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놀이공원에 가서 타본 거라곤 회전목마 같은 게 고작.
‘그땐 연애도 못 해봤지만, 그걸 심장 때문이라고 하는 건 양심 없겠지.’
속으로 그 시절을 추억하던 알트는 혼자 피식 웃었다.
그야말로 모든 욕망을 억누르고 수도승처럼 살아야 했던 전생.
스릴과 전율, 흥분 등의 단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멀리해야 했던 단어였었다.
그리고 그 반동이었는지 이 세계에서 겪은 두 번째 사춘기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지금 널 보니까 12살 때 아버지가 아끼던 벌꿀주를 훔쳐 마셨을 때가 생각나네.”
알트는 와인이 담긴 잔을 기울이는 세린을 보며 이 세계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세린은 알트의 입에서 나온 당시의 나이를 듣고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12살? 완전 발랑 까졌었네!”
“결국엔 들켜서 아버지한테 죽을 뻔했어. 비유법이 아니라 진짜로. 아버진 전형적인 제국 사람이었거든.”
“아니 아버님도 좀 너무하셨지만, 그래도 12살에 그러는 건 아니지!”
알트는 술잔을 기울이며 아무래도 첫사랑 얘기는 들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순진한 소녀가 들으면 굉장히 충격을 받을 게 뻔했다.
“흐응…… 그나저나 이거 정말 술술 넘어가네. 그래서 술인가?”
“아재 같은 말장난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너 완전 취했네. 취했어. 그보다 너 술 마셔도 되는 나이야? 아직 애 아니었어?”
“뭐래. 나 20살이거든! 완전 어른이거든!”
“딱 20살? 그 나이면 아직 애잖아? 어쨌든 맥주보다 와인이 더 도수가 높으니까 조심해.”
와인을 계속 홀짝이던 세린은 알트의 핀잔에 눈을 흘겼다.
그래도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자제해야겠다 싶은지, 잠시 잔을 내려놓고 입맛을 다셨다.
“나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저번에 먹었던 맥주보다 이게 더 부드러운데?”
“부드러운 건 그만큼 좋은 술이라서 그래. 괜히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 부르겠어?”
그녀는 인생 처음으로 마셔보는 와인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맥주는 이미 조이와 함께 여러 번 마셔봤지만, 취향이 아니었다고 하더니.
와인은 벌써 석 잔째다.
알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술은 무려 이번에 알트의 상회가 다시 수입해온 바릭산 와인.
알트에겐 이쪽 세계 고향의 특산물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자부심이 담겨있는 술이었다.
“신의 물방울은 염병. 너 그런 소리 할 때마다 속이 니글거려서, 내가 맥주 말고는 다른 걸 못 마셔.”
다만 조이는 와인 같은 술은 취향이 아니라며, 혼자서 흑맥주를 들이키는 중이었다.
“물론 이 주점이 자랑하는 수제 소세지에는 흑맥주가 제일 어울리는 건 나도 알아. 그래도 내가 이걸 다시 들여오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래서 고작 그거 때문에 보름이나 싸돌아다녔어?”
“야! 고작이라니? 이거 하나만으로 오가는 돈이 얼만데! 배 한 척이 오갈 때마다 집 한 채를 지을 정도라고.”
조이도 이 와인이 상당히 고가라는 건 알고 있었을 터.
하지만 알트가 거래하는 규모가 어느 정돈지는 짐작 못 했는지, 금액에 대한 구체적인 비유를 듣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알트. 우리가 예전에 이혼한 다음에 위자료를 제대로 계산했던가?”
“했지. 너 지금 사는 집이 내가 해준 거잖아?”
“제길! 그랬었지!”
조이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자기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세린은 그런 두 사람의 만담을 조용히 지켜보며 연거푸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갑자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나 질문! 질문!”
“응? 뭔데?”
“그러니까. 그……. 둘이 이혼했다는 건, 원래 결혼했다는 거지? 그럼 어쩌다가 결혼하게 된 거야?”
“뭐야.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알트의 물음에 세린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 반응에 알트는 살짝 난처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틈에 알트 대신 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흔한 얘기지. 이렇게 진탕 마시다 눈 맞고. 그러다 입 맞추고, 아랫도리도……. 우픕!”
알트는 그런 조이의 주둥아리를 황급히 틀어막았다.
평소에도 자유분방한 편이었지만, 술자리의 효과인지 가만 놔뒀다간 수위가 끝도 없이 올라갈 것 같았다.
“넌 어째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냐?”
“내가 뭘? 그래도 부부였는데 그런 게 없었으면 이상하지! 그럼 니가 고자라서 아무 일 없었다고 해주는 게 더 좋아?”
“넌 그냥 입 다물고 맥주나 마셔라. 응?”
“입을 다물고 어떻게 마셔? 코로 마시리?”
세린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다시 채우고, 한 모금 또 홀짝거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요즘 무서운 병이 돈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거든.”
“오, 우리 세린이 많이 컸네. 나 없이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알게 되고.”
“흥! 나한테도 눈이랑 귀가 달렸다고!”
알트가 자꾸만 애 취급하는 통에, 안 그래도 술기운이 오른 세린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이를 지켜보던 알트는 피식 웃었다.
역시 RPG에선 주점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정석.
그동안 그녀는 조이를 따라 주점을 자주 드나들며 온갖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얘기 나온 김에 훈련은 좀 어때? 첫 번째 깨달음은 진작에 얻었지?”
“응! 그거 무지 신기했어! 갑자기 내가 그동안 뭘 잘못하고 있었는지 다 이해되더라!”
세린은 괜히 포크를 휘두르며 검술을 펼치는 흉내를 냈다.
어찌 보면 재롱떠는 것 같지만, 찌르고 베는 동작이 이어지는 흐름은 확실히 전보다 자연스럽다.
“그럼 이제 슬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 같네.”
갑자기 결정이란 단어가 알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포크를 용맹하게 휘두르던 세린의 손이 우뚝 멈췄다.
“중요하긴 하지만 어려운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한 사람의 성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결정해야 해.”
세린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옆에서 듣던 조이는 단박에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이 꽤 의외라는 듯이 세린을 쳐다봤다.
“뭐야? 그럼 얘는 아직도 신앙을 결정 안 한 거야?”
조입의 입에서 나온 신앙이란 단어 때문인지, 세린의 눈빛엔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땐 지옥이니 천사니 그랬었지.’
알트는 세린이 전생에 가졌던 신앙을 유추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당시의 믿음이 남아있다면 거부감이 들만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주민으로서 자기가 믿는 신의 버프를 받고 말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통신사 같은 거 고른다고 생각해. 너한테 맞는 서비스를 찾는 거지.”
“알트. 비유하더라도 남들이 알아들을 말로 비유를 해야지. 그런 듣도 보도 못한 거로 비유하면 쟤가 어떻게 알아들어?”
알트의 조언에 조이는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현대인이었던 세린이라면 당연히 알아들을 비유였으니까.
하지만 말을 알아듣는다고 해서 마음에 와닿는 건 아닐 거다. 몇 가지 책을 쥐여주긴 했지만, 조이에게 굴려지느라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듯하고.
그렇다면 차라리 그녀의 원래 종교와 가까운 신앙을 추천하는 게 나을까 싶었다.
“이건 질서의 신앙이긴 하지만 오델 신앙을 추천할게. 희생의 신인데, 그것만 들어도 감 오지?”
게이머의 관점에선 소위 말하는 팔라딘 테크를 탈 때 많이 선택하는 신앙.
세린을 탱커 타입으로 기를 생각이기도 하니, 딱 맞는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손에 들고 있는 포크만을 응시할 뿐.
“세린아? 저기요, 조세린씨?”
알트는 계속해서 대답이 없는 그녀의 눈앞에다 대고 손을 두어 차례 흔들었다.
그제야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알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알트……. 나…… 속이 이상해…….”
술기운에 붉게 물들었던 세린의 얼굴이, 한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한 발짝씩 세린에게서 멀어지는 알트와 조이.
“우웨엑!”
술 경험도 별로 없는 애가 계속 쭉쭉 들이킬 때부터 예정된 결말이었다.
“하아.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해야겠네.”
알트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야 좀 쓸 만 해졌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한동안은 세린을 다시 어린애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