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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93화 (93/282)

93. 별이 지는 밤 (1)

뒤늦게 생각해보니 안일했었다.

황제의 근위기사였던 오웨인은 눈앞의 적 하나에만 몰두하지 않고, 호위 대상의 안위를 살펴 가며 싸우는 방식에 익숙할 터.

그런 그가 사하긴 여왕과 싸우면서도 알트와 도라가 있는 후열 쪽을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야 했을 거짓말.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렇게 된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렇군. 자네는 제국을 떠난 직후 개종했던 건가?”

“진작에 얘기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닐세.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은 밝히기 힘든 부분이니, 자네 사정은 이해하네.”

다행히 오웨인은 여태 속여온 것을 크게 질타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어렴풋이 알트가 블랙 대거라는 것도 눈치챘을 듯하지만, 그것까지 파고들지도 않았고.

‘그래도 역시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네.’

알트는 이제는 익숙해진 오웨인의 가짜 수염 아래로 감춰진 그의 표정을 읽어내며 쓴웃음 지었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이런 일 하나로 무너지진 않겠지만, 같은 신앙이란 믿음에서 온 유대감도 있었을 테니 이래저래 타격이 있을 수밖에.

“그러고 보면, 자네 조부께서 임프리스 출신이라 했나? 그곳은 국민 대부분이 빌레르 신자라고 들었네.”

“네. 정작 할아버진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결국 자네의 신앙도 잃어버린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르겠군. 그 마음은 이해하네.”

그 와중에 어떻게든 공감대를 형성해보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짠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데 역시 기도문에 복수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선지, 금방 알아차리시는군요.”

“음? 아아. 일전에 아드리안 저하를 뵀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말이지.”

“어쩐지…….”

그때를 회상하는 오웨인의 표정에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이해는 간다.

그 수다스러운 괴짜를 상대하는 건 알트조차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역시 사기꾼…….”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몇 배는 오래 벨하라 신자로 지냈었거든?”

세린도 감쪽같이 속았단 사실에 뾰루퉁한 얼굴로 그녀 나름대로 유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웨인처럼 신실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니, 알트는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보다 알트. 그 물고기 여왕 잡을 때 쓴 기술 말이야.”

“그냥 물고기가 아니라 사하긴. 뭔가 물고기라니까 모양 빠지잖아.”

“어쨌든 번개처럼 슈슉 베어버린 그거! 굉장하긴 하던데. 설마 이렇게 매번 다쳐가며 쓰는 기술이야?”

알트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쓴웃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최종적으로는 의도치 않은 필살기 같은 게 나갔지만, 지금의 몸 상태는 의도적이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으음. 마법과 검술이 완전히 융합된 그런 형태는 처음 보긴 했지만. 아무리 위력이 좋아도 그런 위험한 기술이라면, 가능한 봉하는 게 좋을걸세.”

역시나 미래에 기사왕이 될 NPC 답게, 오웨인도 걱정하는 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도라도 별말은 하지 않지만, 아까부터 귀가 축 처져있기도 했고.

알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느 정도 불가항력이긴 했으나. 역시 이번처럼 일부러 몸까지 상해가며 무리하는 건 자제해야만 했다.

‘그래도….’

알트는 그때 느낀 감각을 떠올리며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온몸이 가볍고, 그를 둘러싼 세상조차 느리게 휘어지던 감각.

그 수수께끼의 현상을 밝히기 위해 시험 삼아 다시 독을 먹는 건 곤란하겠지만, 어떻게든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역시 뭔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어. 직전에 터트렸던 다량의 번개 폭탄에 영향받았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마침 모든 지식의 보고라는 카다일의 대도서관이 코앞에 있으니, 그곳은 무언가를 조사해보기엔 최적인 장소.

세린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이 고루한 도시에서의 일정을 조금 더 연장해야 할 것 같다.

* * *

카다일의 대도서관이 모든 지식의 보고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천여 년에 걸쳐온 수많은 이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과거, 브리즈지역이 엘프의 왕국조차도 들어서지 않은 하나의 도시였을 시기.

카다일은 대륙 각지에 사서를 파견 보내 닥치는 대로 서적을 확보하여 필사하는 방식으로 장서를 늘려왔다.

거기다 고전 시리즈인 3편의 메인 시나리오가 그것과 관계된 내용이었기에, 이 도서관은 알트에게도 나름대로 추억이 있는 장소였는데.

물론 지금은 인쇄술의 발명도 있고, 제국에서 출간되는 모든 서적을 카다일에서 인쇄하고 있기에.

그 옛날 보물찾기하듯 서적을 찾아 헤매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다만 카다일의 대도서관이라해도 완벽하게 세상 모든 지식을 보관하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저, 다시 말씀해주시겠나요?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요?”

“볼라크의 제사장 아일렌이 남긴 고대의 법전을 필사한 겁니다. 기존의 연구물과 비교해보면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역사시대 이전의 기록물이라니!”

그런 만큼 ‘새로운 지식’을 가져오는 이들에겐 공헌도나 특혜를 안겨주는 등, 그 특유의 지식광적인 면모는 지금까지도 잘 이어져내려오고 있었는데.

사서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기는 걸 보며 알트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멸망해버린 알트의 고향 마을 아래에 잠들어 있던 고대 엘프의 유적.

그곳에서 유물들을 챙기는 건 물론이고, 혹시 몰라 벽면에 새겨져 있던 고대의 법전도 꼼꼼히 필사해놨었는데.

역시 그런 신학적,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기 마련이었다.

“네, 그럼 기부해주신 이 필사본은 저희가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볼일이 있으실까요?”

“아. 혹시 공헌도 제도가 아직 남아있나요?”

“그럼요! 음 그런데, 원래라면 기부하신 서적의 심사가 끝난 뒤에 드리는 혜택이지만…….”

잠깐을 고민하던 사서는 알트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더니 이내 밝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마이너슨 씨라면 신용이 있으시니,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 어떤 특례를 원하시나요?”

“봉인 서고를 이용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으음. 그곳은 공헌도 특례만으론 이용하긴 어려운 곳인데. 혹시 소지하고 계신 학위가 있을까요?”

조심스런 사서의 질문에 알트는 안쪽 주머니를 뒤져, 동으로 된 메달을 꺼내 내밀었다.

“오버델 연금술 학회의 학사입니다만, 이걸로 괜찮나요?”

“어디 보자. 오버델 연금술 학회…. 네! 문제없습니다!”

비록 제국과 연합이 전쟁 중이라 해도, 역시 학문에는 국경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독학하기 어려운 연금술의 특성상.

제국의 연금술사들도 오버델에 유학을 다녀오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여기 이 열람증을 입구에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그럼 다시 한번 소중한 자료를 기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이너슨 씨!”

“저야말로 친절히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든 절차를 통과하고 알트가 향한 봉인 서고는, 사실 이름만큼 거창한 장소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책이란 늘 진실만 담지는 않는다.

시대적, 혹은 상황적 한계에 의해 잘못된 정보를 담을 수도 있고. 아예 누군가 악의적으로 왜곡된 내용을 남길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악서를 걸러내는 것 역시 카다일 대도서관의 사서들이 하는 업무 중 하나였고.

그렇게 검열된 책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바로 봉인 서고.

이걸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서적을 한데 모으겠단 도서관 측의 이념도 있지만.

당대엔 잘못된 내용이라 여겨진 게 후대에 가선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때때로 극찬을 받던 베스트셀러가 시간이 흐르며 악서로 분류되어 봉인되는 것도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세린이 넌 허가가 안 나니까, 도라랑 같이 다니면서 보고 싶은 책이나 읽고 있어. 아니면 박물관 구경이라도 하던가.”

“에엣? 나는 왜 못 들어가?”

“그야 넌 고졸이잖아. 아까 학위 얘기 못 들었어? 가만. 여기선 아예 고졸도 아니네?”

“와…. 진짜 나쁘다! 나 방금 명치 겁나 세게 맞은 거 같아!”

놀리듯 말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

어쨌거나 잘못된 정보를 구분할 만큼 학식이 있는 사람만이 봉인 서고를 열람할 자격이 있었고.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든 학위가 필요했다.

그렇게 잔뜩 심통이 난 세린과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도라를 뒤로 하고서.

알트는 봉인 서고로 향했다.

봉인 서고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접근성이 조금 좋지 않은 지하 구석진 장소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이 검열실인 구조.

“어떻게 오셨습니까?”

“봉인 서고를 이용하려고요. 열람증은 여기 있습니다.”

“지금 확인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트가 나무로 된 열람증을 건네자, 단정한 얼굴의 사서는 또다른 표를 꺼내어 비교하며 신중히 확인하고 있었다.

출입이 제한된 곳이니만큼, 열람증을 함부로 위조할 수 없도록 나름 암호화된 방식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확인이 끝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은 열람증을 자기 앞에 놓인 상자 안에 꽂아 넣었다.

“봉인 서고는 열람만 가능하시고. 재입장을 위해선 다시 허가를 받으셔야 하니 꼭 볼일을 다 마치시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네. 유의하겠습니다.”

알트는 안내를 받아 봉인 서고 안으로 들어 온 뒤,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대체 검열된 책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한없이 넓은 공간과 끝없이 줄지은 책장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야. 이거 원하는 책 찾는 것도 거의 운이겠는데?”

심지어 이곳은 현대의 십진분류법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책이 나온 연대를 10년 단위로 분류한 다음, 저자명과 제목 순서로 정리하는 방식.

뭐라도 기준이 있기는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솔직히 썩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고난을 직감한 알트의 얼굴이 찌푸려질 무렵.

그때 마침 안쪽 깊숙한 곳에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열심히 정리 중인 한 사서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주먹구구식으로 책을 찾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저기 실례합니다.”

“예? 무슨 일이신지?”

“찾는 책이 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아, 예에. 말씀하세요. 어떤 책을 찾으시는 거죠?”

알트의 질문에 사서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책의 일람표를 펴들었다.

“역사시대 이전, 고대 신앙과 관련된 서적을 찾고 있습니다. 볼라크의 제사장 아일렌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어…. 저기. 그 내용을 여기서 찾으신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물어보시는 거죠?”

“그럼요. 하지만 단지 연구 목적으로 참고할 뿐이니 위법은 아니잖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요.”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해하는 알트의 표정에.

사서는 적잖게 당황하는 얼굴이었지만, 낮게 신음하며 일람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책장 너머로 사라지더니.

이내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총 세 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책은 저희가 정리할 테니, 보시고 난 뒤에 자리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알트는 사서에게 책은 건네받은 뒤, 가장 먼저 제목부터 확인했다.

<황금률의 법전>, <14개의 별자리와 91개의 교각>, <세계수의 뿌리를 찾아서> 등. 확실히 알트도 처음 보는 책들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틀림없이, 지금의 제국으로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관을 담고 있을 거다.

볼라크 교단의 현교리는.

수많은 교리 전쟁과 기나긴 세월을 거치며 겨우 정립된 것이니까.

하지만.

[비록 너와 내가 믿는 정의는 서로 다르지만, 응당 그 뿌리는 같을 터.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너라면 필히 저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니라.]

알트는 아일렌의 망령이 해준 얘기를 떠올리며 그때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사하긴 여왕을 쓰러트렸을 때의 불가사의한 힘은.

이 목걸이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직감이 그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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